글: 왕영괴(王永魁)
"문화대혁명"이라는 명칭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1966년 5월이전에 그것은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고 불렸다.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 이후, "사회주의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혼용되었고, 의미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1966년 8월 중공8기11중전회에서 <중공중앙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통과된 이후에는 이 운동의 정식명칭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정리되고,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후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명칭은 일부 외국전문을 번역하는 경우에 언급되는 외에 다른 경웅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다.
1. "사회주의문화대혁명"개념의 탄생과 의미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모택동은 문화계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하여 각각 비시(批示)를 내려, 문화계에 "문제가 적지 않고, 사람수는 아주 많다. 사회주의개조가 여러 부문에서 지금까지 거둔 효과가 극히 미미하다." "기본적으로 당의 정책을 집행하지 않고, 관료로서 영감행세를 하며, 공농병에 접근하지 않고,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반영하려 하지 않는다. 최근 몇년간 수정주의의 경계선까지 가버렸다." 이 비시가 문화계에 전달된 후 큰 파란이 일어난다. 그후 문화계는 정풍운동이 벌어지고, 많은 문화예술종사자들이 기층으로 깊이 들어가, 생활을 체험하고, 세계관을 '진지하게 개조'하게 된다.
1964년 6월 5일부터 7월 31일까지, 경극현대희관마연출대회(京劇現代戱觀摩演出大會)가 북경에서 거행된다. 7월 15일, <인민일보>에는 조우(曹禺)의 글 <한바탕 문화대혁명>이 실린다. 조우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한바탕 경천동지할 혁명이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경극이 혁명현대극을 공연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다." "그것은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징이다." 10월 17일 조우는 다시 글을 발표한다. 문화예술계의 상산하향(上山下鄕)으로 기층에 깊이 파고 들어가는 생활체험을 이렇게 칭송한다: "이는 중국문화예술계에서 하나의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대사건이다. 문화전선에서의 대혁명이다." 이 글의 말미에 조우는 이런 구호를 소리높여 외친다: "사회주의문화대혁명만세!" 조우의 글이 <인민일보>에 발표된 것은 관방적인 색채를 띈느 것이다. 비록 중공중앙의 인식을 완전히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문화계의 모택동의 비시와 현대극공연에 대한 반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정식으로 중공중앙을 따라가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이데올로기분야의 도를 넘은 비판이 더욱 심해진다. 문화계가 직면하는 압력은 갈수록 커졌다. 1965년 10월 30일, 문화부당위는 <현재문화공작에서의 약간문제에 관하여 중앙에의 회보제강(匯報提綱)>(이하 "회보제강"라 함)을 실어 이렇게 말한다: "모주석의 두 차례에 걸친 비시, 중앙과 각급당위의 독촉과 영도, 전국사회주의교육운동의 심도있는 발전은 전국의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을 추진시킨다. 이는 격렬하고, 심각하며 복잡하고, 두 개의 계급, 두 개의 길과 두 개의 문화노선간의 투쟁이다." 1966년 1월 23일, 중공중앙은 <회보제강>을 전재하여 발송한다.
1966년 2월, 강청(江靑)은 상해에서 "부대문예공작좌담회"를 소집주재한다. 모택동은 좌담회에서 형성된 기요(紀要)를 아주 중시하여, 직접 여러 부분을 수정한다. 4월 10일, 중공중앙이 이 기요를 전재발송할 때, 특별히 이렇게 비어(批語)를 남겨둔다: "전국해방이후, 문예전선상의 여러차례의 중대한 투쟁 그리고 최근 3년동안의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은 모두 모주석이 직접 영도한 것이다." 이 비어는 중공중앙이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 1966년 4월까지 이미 "근 3년간" 진행되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회보제강>에서의 내용과 연결시켜보면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문화게에 대하여 내린 제1차비시이후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은 "전체 문화전선"의 "혁명"이다. 주로 "문화방면의 흥무멸자(興無滅資, 무산계급을 흥하게 하고 자산계급을 멸망시키는)의 투쟁"이다. 즉 당시에 문화계의 사회주의개조로 생각했고, 운동에 참가하는 주체는 "광대한 문화예술종사자"들이었다.
4월 18일, <해방군보>에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어 사회주의문화대혁명에 적극 참여하자>라는 사론이 실린다. 여기에서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의 대부분 내용이 전달된다. 이 사론은 비록 "사회주의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지위를 매우 높여서, "굳건하게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는 것이 우리군의 혁명화건설의 대사와 관계되고, 우리나라 혁명전도의 대사와 관계되고, 세계혁명전도의 대사와도 관계된다"고 하였지만, 거기에서 기술하고 있는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의미는 여전히 문화영역에 국한되었다. 사론에서는 마지막으로 "하나의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고조가 이미 출현했다. 하나의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군중운동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 이 위대한 혁명조류는 반드시 모든 구시대 자산계급문예사조의 오탁(汚濁)을 깨끗이 씻어내야 하고, 사회주의의 무산계급문예의 신기원을 개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실제로 당시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목적을 명시한 것이다.
그후 신문과 잡지에서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는 글은 확실히 늘어난다. 운동에 참가하는 주체도 변화가 발생한다. 5월 4일, <인민일보>는 "54"청년절을 기념하는 사론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청년들이 모택동사상의 지도하에, 적극적으로 계급투쟁, 생산투쟁과 과학실험의 삼대혁명운동에 참가하는 것, 특별히 적극적으로 현재의 사회주의문화대혁명에 참가하는 것을 축하한다. 이런 혁명투쟁중에서 비바람을 겪고, 세상을 대면하면 더욱 잘 더욱 빨리 성장할 것이다." 5월 6일 <인민일보>는 일부 독자로부터의 편지를 싣는데, 거기의 편집자의 말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공농병(工農兵) 군중은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주력이다. 이 몇 통의 편지는 아주 잘 언급하고 있다. '우리 노동자계급은 이번 투쟁에서 선두에 서야 하고, 돌격대가 되어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문화대혁명은 엄중한 계급투쟁이다. 우리 농촌부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계속하여 총부리를 꽉 잡아야할 뿐아니라, 붓도 들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이번 사회주의문화대혁명에 참가해야 한다.' '문화전선에 공농병이 참전한 것이다. 이제는 자산계급 '권위'를 역사무대에서 굴러떨어뜨릴 때이다."
이를 보면,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개념은 처음에 문화계인사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로 문건에서 정식 사용된 것은 마땅히 1965년 10월 문화부당위의 <회보제강>이라 할 것이다. 1966년 4월, 중공중앙이 이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해방군보> 사설을 통해 전파되면서 이 개념은 신속이 전국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1966년 5월에 이르러 운동에 참가하는 주체에 변화가 발생한다.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사용범위가 전면적으로 문화영역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2. "사회주의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혼용단계때 두 개념의 의미에서 미세한 차이점.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은 북경에서 확대회의를 소집개최한다. 16일, 회의는 모택동의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중공중앙통지(이후 "516통지"라 함)를 통과시키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위대한 무산계급문화혁명의 고조(高潮)를 맞이했다. 이 고조는 자산계급과 봉건잔여세력들이 아직 보존하고 있는 모든 부패한 사상진지와 문화진지를 힘있게 충격을 가한다." 모택동은 "516통지"를 수정할 때 이렇게 썼다: "무산계급문화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고, 철저히 반당,반사회주의의 소위 '학술권위'라는 자산계급반동입장을 폭로하고, 학술계, 교육계, 신문계, 문예계, 출판계의 자산계급반동사상을 철저히 비판하며, 이들 문화영역에서의 영도권을 탈취해야 한다." "516통지"에서 제기한 "무산계급문화혁명"의 개념은 투쟁범위가 여전히 이데올로기영역이지만, 투쟁목적은 이미 변화했다. "모든 구시대 자산계급문예사조의 오탁(汚濁)을 깨끗이 씻어내야 하고, 사회주의의 무산계급문예의 신기원을 개창"하는 것에서 "문화영역의 영도권을 탈취"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6월 1일, 진백달(陳伯達)이 이끄는 공작조의 주재하에 <인민일보>는 <일체의 우귀사신(牛鬼蛇神)을 쓸어버리자>라는 사론을 발표한다. 사론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고조는 현재 전세계인구 4분의 1을 점하는 사회주의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중앙급 매체에서 처음으로 전국이 이 운동의 명칭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론에는 또한 이런 내용도 들어 있다: "짧은 몇달내에, 당중앙과 모주석의 전투호소하에 억만 공농병군중, 광대혁명간부와 혁명의 지식분자들이 모택동사상을 무기로 하여, 사상문화진지에 도사리고 있던 대량의 우귀사신을 쓸어버렸다." 운동의 주체는 문화계에서 '억만 공농병군중, 광대혁명간부와 혁명의 지식분자들'로 바뀌었다. 그러나 운동의 범위는 여전히 '사상문화진지'이다. 사론은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나라 해방16년이래,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은 이데올로기영역내에서의 계급투쟁이 계속하여 아주 격렬했다. 현재의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은 바로 이 투쟁의 계속발전이다."
6월 2일 <인민일보>는 <사람의 영혼을 건드리는 대혁명>이라는 사론을 발표한다. 거기에서 "오늘 우리나라는 무산계급이 정권을 취득한 이후 위대한 변혁의 신시대에 처해 있고, 사회주의혁명이 날로 심화되는 신형세하에 처해 있고, 사람의 영혼을 건드리는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의 격류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호소한다; "영원히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붉은깃발을 높이 들고, 일체의 우귀사신을 쓸어버리고,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
위의 두편의 사론은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도 사용하면서, 다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만일 자세히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상대적으로 경제영역의 사회주의개조에 쓰는 것이고, 강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영역의 사회주의혁명이다. 그러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상대적으로 전단계에 운동의 주체를 단지 문화계인사로 한정했던 것에 비하여, "광대혁명간부와 혁명의 지식분자들"이 이 운동에 참가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966년 7월 1일 <인민일보>에서 발표한 중국공산당성립45주년기념 사론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이런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회주의혁명이 점차 심화되면서, 사회주의교육운동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반혁명집단은 자산계급의 반동입장에서, 극력 당중앙과 모택동 동지가 제출한 사회주의문화대혁명노선을 반대하고 저지하고, 모택동동지가 당의 8기10중전회에서 제출한 사회주의사회계급과 계급투쟁문제의 지도방침을 반대하고 저지하며, 사회주의혁명을 끝까지 진행할 것에 반대한다. 그들이 통제하는 신문계, 교육계, 문예계, 학술계, 출판계 및 기타 문화계의 중요한 진지에서 그들은 자산계급의 무산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을 진행했고, 대량으로 자산계급, 수정주의독소를 전파하여, 모택동사상을 향하여, 모택동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에 대하여, 사회주의제도에 대하여 미친 듯한 공격을 일으켰다. 그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자산계급우파를 비호하고, 무산계급혁명파를 타격하며, 광대한 공농병군중의 혁명운동을 억누르고,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저항하고 파괴했다."
이 시기에 또 어떤 문장은 단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는 개념만 사용했고, 의미가 명확했다. 예를 들어, 1966년 6월 8일 <홍기>잡지에 <무산계급문화대혁명만세>라는 제목의 사론이 실리는데, "작년 11월 요문원(姚文元)동지가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를 발표한 이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호각이 불기 시작했고, 한바탕 군중성의 자산계급에 대한 반격전이 전개되었다." "우리나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투쟁창끝은 한줌도 되지 않는 공산주의라는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반공이라는 개고기를 파는 나쁜 놈들을 겨냥한 것이고, 한줌도 되지 않는 반당 반사회주의, 반혁명의 자산계급지식분자를 겨냥한 것이다." 이 사론은 명확하게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개시한 시간을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가 발표된 시간이라고 규정한다. 더 이상 '근3년이래의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선포한 투쟁대상도 문화계에서 기타영역으로 확장되는 추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때부터 1966년 8월 8기11중전회기간까지, 신문잡지와 문건에서는 "사회주의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대량으로 혼용되기 시작한다. 글자가 다르기 때문에, 두 개념의 의미도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이 단계에서 박해를 받은 것은 주로 문화계인사와 문화업무를 관장하는 간부들이었다. 이렇게 측면에서 이 운동의 범위가 '사상문화진지'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대표하는 면도 갈수록 넓어진다. 운동범위는 다른 분야로 확장도고,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사용빈도가 갈수록 늘어나게 된다.
3.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는 정식명칭확정과 그 의미의 변화
1966년 8월, 중공8기11중전회가 북경에서 개최된다. 회의는 <중공중앙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하 "16조"라고 함)을 통과시킨다. 정식으로 이 운동을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고 명명하게 된다. "16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광대한 공농병, 혁명의 지식분자와 혁명의 간부는 이 문화혁명의 주력군이다." 운동의 주체는 이전단계와 기본적으로 같지만, 운동의 목적은 이미 더 이상 "문화영역의 영도권탈취"에 있지 않고,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를 무너뜨리고, 자산계급의 반동학술권위를 비판하며, 자산계급과 일체 착취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교육을 개혁하며, 문예를 개혁하고, 일체의 사회주의경제기초에 부합하지 않는 상부구조를 개혁하여, 사회주의제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유리하도록 한다." 운동의 대상이 명확하게 바뀌었다. "역량을 집중하여 한줌도 되지 않는 반동의 자산계급우파분자, 반혁명수정주의분자를 타격하고, 그들의 반당, 반사회주의, 반모택동사상의 죄행을 충분히 까발리고 비판하며, 그들을 최대한도로 고립시킨다" "이번 운동의 중점은 당내의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를 숙청하는 것이다."
중공8기11중전회를 거쳐 문화대혁명운동의 주체가 다시 한번 확인된다. 운동의 목적에는 "주자파당권파"를 무너뜨리는 것이 추가되었다. 운동범위는 이데올로기영역에서 "일체의 사회주의경제기초에 부합하지 않는 상부구조"로 확대된다. 운동대상은 문화계인사와 문화업무를 관장하던 간부에서 "한줌도 되지 않는 반동의 자산계급우파분자, 반혁명수정주의분자"로 확대되고 다시 한번 "23조"중에서 이미 제출한 "당내주자파당권파를 숙청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간다. 당시 발동자는 "이 결정은 정확하게 우리나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성격, 형세와 임무를 분석하고, 당의 이번 대혁명에서의 방침과 정책을 제정했다."고 했다.
"16조"가 공표된 이후, 특히 모택동이 홍위병을 접견한 이후,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은 마침내 전사회가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운동이 된다. 모택동이 8월 18일 처음 홍위병을 접견할 때, 임표(林彪)는 더 나아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내용을 설명한다: "우리는 주자파 당권파를 타도해야 하고, 자산계급반동권위를 타도해야 하고, 일체의 자산계급보황파(保皇派)를 타도해야 하고, 형형색색의 혁명을 억누르는 행위를 반대해야 하고, 일체의 우귀사신을 타도해야 한다." "우리는 일체의 착취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파괴해야 하고, 일체의 사회주의경제기초에 부합하지 않는 상부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해치는 일체의 벌레를 제거해야 하고, 모든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 <홍기>잡지가 1966년 제12기에 선별하여 실은 홍위병대자보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리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이런 새로운 특징은 가장 먼저 이번 운동의 규모가 아주 크고, 군중이 확실히 일으켰다는데 있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새로운 특징은 또한 학교의 '투(鬪), 비(批), 개(改)'에서 사회의 '투, 비, 개'로 발전하였다는데 있다."
이제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데올로기영역내의 사회주의혁명의 기능은 이미 약화되고, 문화계의 투쟁은 이미 뒷선으로 밀려났다. 각계층군중이 보편적으로 참가하면서, 주자파당권파를 타도하는 기능이 크게 강화된다. 정치적인 투쟁이 최우선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후, 발동자가 제출한 "자산계급반동노선비판"과 "무산계급독재하의 계속혁명"등의 개념은 모두 정치투쟁에 속한다. '문화'와는 이미 그다지 큰 관련이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개념은 역사무대에서 퇴출되어 버린다.
"사회주의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개념차이의 배후에는 운동주체, 운동범위, 운동대상, 운동목적의 차이가 있다. "사회주의문화대혁명"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까지의 변화과정은 운동주체, 운동범위, 운동대상을 부단히 확대하여 최종적으로 사회각계, 각층이 모두 주도적으로 혹은 피동적으로 말려들게 된다. 운동목적은 문화계에서 '사회주의개조'를 완성하는 것에서 점차 '반동권위'를 타도하고, '주자파당권파'를 타도하여 영도권을 탈취하는 과정이 된다. 이 과정은 '문화대혁명'의 발효, 발동, 재발동의 역사맥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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