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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진독수(陳獨秀) vs 모택동(毛澤東): 중국공산당의 초기지도자

by 중은우시 2023. 2. 1.

글: 오성수행(悟性隨行)

 

중국공산당 최초의 지도자는 진독수이다. 진독수의 특징은 학술사상분야에서 독립구신(獨立求新), 자신불기(自信不羈), 시야서리(視野犀利), 격정양일(激情洋溢)하며,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기 좋아하고, 또한 잘 말할 수 있었다. 이런 특징은 현대교육에 종사하거나 방향성과 기치성을 확립하는 인물로서는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다. 그래서 진독수가 중국공산당의 초대 지도자가 된 것은 아주 적합하다. 민주와 과학 덕선생(德先生, Democracy를 말함)과 새선생(賽先生, Science를 말함). 중국의 신문화운동은 모두 진독수가 극력 추진하여 중국의 넓은 대지 위에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스며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의 한계성이다. 그는 멀리 보고 깊이 보지만, 현실은 도외시했다.

 

1927년이후,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민당은 자신들의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중국공산당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시작한다. 중국공산당은 이때부터 침체기에 들어선다. 코민테른(공산국제)은 진독수를 중국혁명이 이 시기에 실패한 책임자로 몰아 속죄양으로 삼고, 그의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직무를 박탈한다. 그후 중국공산당의 최고권력을 놓고 조직내에서 우승열태(優勝劣汰)의 경쟁이 벌어진다. 당시의 국내정세에 적응하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장정을 끝낸 후 모택동이 중공의 최고지도자에 오른다. 그리고 중공은 성공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진독수와 모택동은 아주 크게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른가? 흥미를 느끼는 점 혹은 주목하는 점에서 진독수는 시중 문화사상분야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시종 권력에 있었다. 중공에 있어서, 진독수의 역할은 교권(敎權)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고, 모택동의 역할은 왕권(王權)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총부리에서 정권이 나온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실제로 진독수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다. 이건 무슨 새로운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수천년간 사회에서 권위를 확립하는 기본이치이다. 진독수는 군사를 중시하지 않았고, 권력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군사권력을 중시하는 국민당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야 어떻게 덕선생과 새선생, 중국의 신문화운동이 실현될 수 있겠는가?

 

전체국면을 고려한다면, 중공이 섬북(陝北)에 자리잡은 후, 마땅히 진독수를 다시 불러들여야 했고, 그로 하여금 계속하여 그가 잘하는 신문화와 현대교육활동을 하도록 했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이후 중국에 좋은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공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직상의 통제를 받고 있었고, 코민테른이 1943년에 해체되기 전까지 중공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모택동은 권력 자체를 중시하여 자신의 전임지도자를 배척하는 심리가 있었다. 이는 모택동이 나중에 노신(魯迅)을 극력 떠받든 것에서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중국의 신문화운동에서 진독수의 역할은 노신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말살될 수 없는 것이다.

 

모택동이 나중에 전개한 문화대혁명은 실제로 권력이 몸부림이고, 큰 실패로 끝났다. 모택동은 중국에서 문화혁명을 진행해야 한다고 느꼈다. 다만 진정 그런 혁명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은 모택동이 아니라 진독수였다. 왜냐하면 그 방면에서는 진독수가 모택동보다 낫고, 더욱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