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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최후의 귀족: 강동벽(康同璧) 모녀의 인상 (1)

by 중은우시 2023. 4. 16.

글: 장이화(章詒和)

 

강동벽(康同璧). 여, 자(字)는 문패(文佩). 호는 화만(華鬘), 광동 남해 사람. 1886년 2월생. 강유위(康有爲)의 차녀. 일찌기 미국유학을 떠남. 전후로 Radcliffe College와 Barnard College를 졸업했고, 졸업후 귀국한다. 만국부녀회 부회장, 산동도덕회 회장, 중국부녀회 회장을 지낸다. 일찌기 부작의(傅作義)가 소집한 화북7성참의회에 대표로 추천되고, 인민해방군과 북경을 평화적으로 해방하는 협상에 참여했다. 1951년 7월 중앙문사관 관원이 되고, 북경시 인민대표가 된다. 제2,3,4기 전국정협위원이었다. 1969년 8월 17일 병사하니, 향년 83세였다.

 ---<중앙문사연구관 관원 약력>에서  

강동벽(왼쪽첫번째), 나창(강동벽남편, 왼쪽두번쨰, 당시 옥스포드유학),            강유위(가운데)

내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 동창중에 도시평민출신이 한명 있었는데, 그 시대에는 계급성분이 좋아서 조직의 신임을 받았다. 나는 졸업후 변방으로 배치되었지만, 그녀는 학교에 남아 연구원이 된다. '문혁'때가 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조반파(造反派)'의 구성원이 된다. '개혁개방'이후에 그녀는 돌연 자신이 원래 마지막 황제 선통제(즉, 부의)의 한 비(妃)의 근친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 신데렐라가 공주가 되었구나!" 그 소식이 알려지자, 그녀와 수십년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마침 직장에서 복지로 주택을 분배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통전부에 보고하여, 자신은 황실인척의 귀족신분이니, 통전대상이라고 주장했다. 보고서가 문화부(내가 일하던 중국예술연구원은 문화부 직속이었다)로 보내어진다. 그결과 '통전'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었고, 주택을 분배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신문을 아무렇게나 뒤져보아도 '귀족'이라는 두 글자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무슨 세습귀족, 동방귀족, 화이트칼라귀족, 단신귀족, 골드카드귀족, 정신귀족. 그것에 상응하게 배치된 사진은 호화빌라, 고급승용차와 화려한 의복, 멋진 술과 요리들이다. 이것들을 다 모으면 말그대로 유행상품전이 될 것이다. 보는 사람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고, 뭐가뭔지 모를 정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귀족생활, 귀족스타일, 귀족기질은 이미 당금 많은 남자들의 이상이 되었고, 많은 소녀들의 꿈이 되었다고.

 

결론적으로 해방후에 일찌기 "지부반괴우(地富反壞右,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우파 黑五類를 가리킴)'와 함께 버린 신발취급을 받던 '귀족'이라는 두 글자가 1980년대이후에는 돌연 유행하기 시작하고 몸값이 엄청나게 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이 '귀족'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 것은 강동벽 모녀를 만난 이후이다. 기실, 귀족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다. 각종 이익으로 교환될 수 있는 명함도 아니다. 향거보마(香車寶馬), 능라주단(綾羅綢緞), 등홍주록(燈紅酒綠)의 호화사치스러운 생활도 아니다.

 

우리 일가가 강동벽을 알게 된 것은 반우(反友)이후의 일이다.

 

1958년초, 반우운동이 끝난다. 1호우파라는 모자를 쓴 아버지(성은 章이고 이름은 伯鈞이다)는 여러번 친척들에게 신고당하고, 친구들에게 배신당하고, 동료에게 고발당하는 교훈을 얻은 이후,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대하는 측면에서 지혜를 얻었고, 예전보다 많이 겸손해졌다. 예를 들어,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는 일반적으로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 설사 그 사람이 옛날 자신의 부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비공개적인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모임에 초청하지 않았다. 설사 그 다른 사람이 옛날의 아주 가까웠던 친구라고 하더라도.

 

남들이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 놀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마후 우파의 소집단 혹은 써클이 형성된다. 부친은 우파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일가족은 손님맞이하는 것을 좋아했고, 게다가 상부에서 아버지에게 큰 사합원과 작은 승용차 그리고 요리사는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무리의 '오합지중'이 모이는 장소는 대부분 동길상후통(東吉祥胡同) 10호가 된다. 그곳은 우리 집 주소이다. 지금은 이미 둘로 나뉘어져서 정원(正院)에는 중공고관이 산다. 먼저 이사들어온 사람은 만리(萬里, 국무원 부총리, 전인대상무위원장을 지냄)였고, 그후에는 단군의(段君毅, 철도부장, 북경시위제1서기를 지냄)였다. 나머지 집부분은 예술계의 지도자인 고점상(高占祥, 공청단서기, 하북성위부서기, 문화부상무부부장을 지냄)이 살게 된다. 

 

우파권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시끄러웠다. 차 한잔을 마시면서 얘기도 나누고 웃기도 했다. 국제정치를 얘기하던 나륭기(羅隆基), 불학과 고시사를 얘기하던 진명추(陳銘樞), 사회뉴스도 얘기하면서 요리에 대하여도 얘기하던 진명덕(陳銘德), 등계성(鄧季惺) 부부. 서로 내왕하면서 서로 존경했고, 서로 관심을 나타냈다. 한 사람이 병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동으로 전해져서 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병문안을 하러 방문하기도 했다. 할 일이 없는 나날 속에서 이런 교류는 그들의 생활내용 그 자체가 된다. 고립되고 억압된 환경 속에서 이런 모임은 그들에게 경사이고 명절이었다. 일반인들은 이 우파권을 무서워했다. 거기서 유일하게 우파모자를 쓰지 않았으면서 가입한 사람이 바로 강동벽과 그녀의 딸 나의봉(羅儀鳳)이었다. 

 

기억하기로 1959년 봄이었다. 부모가 함께 전국정협에 가서 차를 마셨다. 저녁에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기쁜 얼굴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왜 저렇게 즐거우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가 우파모자를 쓴 이후, 오늘 처음으로 누군가 먼저 찾아와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네 아버지와 알고 지내고 싶다고 하더구나."

"설마 그 사람은 아버지가 우파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요."

"당연히 알지. 다만 그녀는 장선생과 알고 지낼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말했다."

"누구인데요"

"그녀는 바로 강유위의 둘째딸이고 이름은 강동벽이다."

"그녀는 몇살이나 되었나요?"

"개략 칠십일 것이다." 그리고 모친은 보충하여 말한다: "강할머니와 그녀의 딸이 말하기를 모레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는구나."

아버지는 오랫동안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간 적이 없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나도 기뻤다.

 

삼일째 되는 날, 부모님은 강동벽의 집으로 갔다. 강씨모녀는 환대해주었고, 부모님은 감동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상상이상이었다. 강할머니는 동사십조(東四十條) 하가구(何家口)의 한 큰 집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잠시 방문해서 차나 마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보니, 우리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내놓은 음식은 그녀의 딸인 나의봉이 직접 주방에 들어가서 만든 것이었다. 비록 월채(粤菜, 광동요리)이지만, 맛은 길거리의 식당에서와는 달랐다. 그 쫄깃하면서도 향기로운 광동나복고(羅卜糕)만 해도 네 아버지가 여러 개를 집어 먹었다."

 

아버지는 강동벽의 개인적인 소양과 예술적인 재능을 칭찬했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역시 강유위가 그녀를 그렇게 예뻐한 것이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영어도 잘하고, 시사도 잘하고, 회화도 잘했다. 오늘 그녀가 꺼내서 보여준 몇 폭의 산수화는 자신이 그린 것이었는데, 창고청준(蒼古淸雋)했고, 정취가 자연스러웠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그림은 전문화가들과도 맞먹을 정도이더라."

 

기실 나는 마음 속으로 잘 알았다: 부모님이 가장 찬탄한 것은 강동벽 모녀가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였다는 것을.

 

1주일이 지난 후, 아버지는 집으로 강씨모녀를 초대하자고 말한다.

어머니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저는 좋아요. 찬성입니다!'

부친도 손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면서 말했다: "2대1이니, 통과!'

우리 셋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맛있는 것이 먹고 싶은거지?"

"아니예요" 나는 변명했다. "나도 그녀들을 보고 싶어요."

 

긴장된 준비를 마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아버니는 강동벽을 귀빈으로 여겼고, 또한 처음 내방하는 것이므로 아이는 자리에 앉히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그다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어쨌든 유리창 사이로 뒤에서 몰래 보고, 몰래 들을 수 있으니까.

 

나무에 꽃들이 피고, 숲으로 새가 날아들었다. 날씨가 좋은 늦봄이었다. 오후 3시, 부친은 운전기사에게 뷰익승용차를 몰고 손님을 모셔오도록 시킨다.

 

강동벽 모녀는 우리집의 넓은 정원으로 들어서자, 바로 걸음을 멈추고 우리집의 영련(楹聯, 기둥에 붙인 글), 화단, 어항과 수목을 감상했다. 그녀는 정방(正房) 앞의 복도에 한줄로 늘어선 8개의 납매(臘梅)화분을 보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 매화는 너무 좋습니다. 가지가 힘있고, 종횡으로 잘 배열되어서, 그림으로 그려도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강어르신, 당신은 이 여덟개의 납매가 왜 이렇게 좋은지 아시겠습니까?"

"당연히 잘 보살펴서 그렇겠지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꽃을 보내준 사람이 매란방(梅蘭芳, 경극배우로 가장 유명함)이기 때문입니다."

 

강동벽은 그 말을 듣고나서 한참동안 그 앞에서서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기려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유리창 뒤에서 그녀를 살펴보았다. 마땅히, 얼굴은 노인의 온몸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그 편평한 이마, 단정한 코, 하얀 이빨, 약간 굽은 가는 허리, 맑은 눈동자. 사람으로 하여금 세월의 흐름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그녀는 청색 암화연단통수치파오(暗花軟緞通袖旗袍)를 입고 있었는데, 그 허리옆, 목둘레, 소매끝단에 3푼 너비의 곤화금변(滚花金邊)이 새겨져 있었다. 치파오의 위에는 다른 청주배심(靑紬背心)을 걸쳤다. 발에는 흑색의 연저수화혜(軟底繡花鞋)를 신었다. 일종의 청허소랑(淸虛疏朗)한 분위기여서 노인에게 자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목에는 담자갈색의 비단목도리를 매고 있었고, 가슴앞에는 살색의 산호별침이 있었다. 햇변아래에서는 마치 한줄기 흐르는 파도처럼 생동의 기운을 더해주었다. 흑옥같이 염색한 머리카락은 뒷목쪽에 틀어서 원계(圓髻)를 이루었다. 성긴 머리카락과 옛날식 머리모양은 옛날의 창상을 엿볼 수 있었다.

 

강동벽을 뒤따라오는 사람은 딸인 나의봉이었다. 겉모습으로 보아서 40세가량이었다. 그녀는 온몸이 파란색이었다. 파란치파오, 파란핸드백, 파란목도리, 그리고 커다란 회람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홍콩식으로 만든 치파오는 소녀같은 몸에 꽉 맞았다. 그리하여 모든 선에서 지적할만한 부분이 없었다. 비록 단색이지만, 모든 것은 상등분위기의 전아한 기질을 엿볼 수 있었다. 거실로 걸어들어가자, 나의봉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용모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교소영롱(嬌小玲瓏)한 그녀는 젊었을 때라고 하더라도 예쁜 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에는 얇은 분을 발랐지만, 빈혈의 창백함은 감추기 어려웠다. 입은 넓고 컸으며 입술에는 혈색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특히 검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었으며 푸른 색의 눈주위로 인하여 아주 유심(幽深)해 보였다. 그런 고귀한 자태의 뒤에는 마치 여성의 상감(傷感)의 기질이 있는 것같았다.

 

크고 둥근 차탁 위에는 모친이 북경에서 가장 좋은 식품점에서 사온 각종 서양과자와 과일이 놓여 있었다. 부모는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강씨모녀가 말하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반시간 후, 거실에는 부친의 목소리만 들렸다. 나는 거실로 통하는 유리격선(隔扇) 뒤에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돌연 나는 나의봉이 신발을 잘못 신은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하나는 파란색 가죽신인데, 다른 하나는 흰색일까? 그리하여 부친이 하는 말을 나는 전혀 듣지 못했고, 그저 그녀의 두 발을 응시하면서 그 신발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나는 나의봉이 황급히 나오다가 한쪽 신발을 잘못 신었다는 결론을 내린 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마치 아버지가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반드시 들고 일어나서 의견을 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크게 소리쳤다: "엄마!"

어머니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에게 왔다: "너는 여기 숨어서 뭐하는 거냐?"

나는 얼굴에 초조하고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면서 말했다: "나의봉 아주머니에게 말해주세요. 그녀가 신발을 잘못 신었다고."

 

어머니는 나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거실로 다시 걸어들어갔다. 나의봉에게 귓속말로 몇마디 했다. 나의봉은 유리격선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장아가씨 와서 제 신발을 보실래요."

 

나의봉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어린 아가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건 이탈리아의 새로운 유행입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보기 드물지요."

 

아버지도 웃었다. 나는 알았다: 그의 웃는 얼굴에는 내 대신 난감해하는 성분이 있다는 것을

 

강동벽이 나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니?"

 

"소우(小愚)."

 

"어느 우(愚)자인데?" 노인이 다시 물었다.

 

"멍청하다는 우(愚)입니다."

 

"아, 대지약우(大智若愚,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멍청한 것같다)이구나!"

 

다시 물었다: "그럼 대명(大名)은?" 

 

"장이화입니다."

 

"이락화평(詒樂和平)이구나. 부친께서 좋은 이름을 지어주었구나." 강동벽은 '이(詒)'자라는 것을 알고난 후에 바로 이렇게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그녀의 옆에 앉도록 했다.

 

나는 그렇게 난감한 모습으로 강유위의 후손들과 만났다. 부친은 나에게 강동벽을 "강어르신(康老)"라고 부르라고 했고, 나의봉은 "나이모님(羅姨)"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나중에 강동벽이 그녀가 그린 두 폭의 그림을 보내주었다. 큰 폭의 산수화는 부친에게 보냈고, 작은 폭은 모친에게 보낸 것이다. 작품의 기세, 용필과 제관은 어떻게 보더라도 여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것도 70세의 노인여자의 손에서. 이렇게 장씨, 강씨집안은 자주 왕래하게 되었고, 강동벽은 부친이 우파라는 모자를 쓴 후, 알게된 새 친구였다. 부친은 그녀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고, 그녀의 견식에 더욱 탄복했다.

 

강유의의 후손은 인원이 많지 않다. 그중 절대다수는 해외에 산다. 강동벽은 레드클리프에서 공부했고, 남편의 성은 나(羅)이고 이름은 창(昌)이다. 일찌기 민국정부에서 런던에 파견된 총영사였다. 1950년대, 노인의 유일한 아들은 미국에 정착했고, 자신은 유일한 딸을 데리고 사회주의중국에 살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일찌기 이렇게 물은 바 있다. "강어르신, 왜 대륙에 남으셨습니까?"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선부(先父)를 위해 연보(年譜)를 정리하고, 유서, 유고를 정리해야 합니다."

 

"정협위원이라는 명예직말고 정부에서 또 어떻게 안배해주었습니까?

 

"중앙문사관이 관원입니다." 강동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건국초기, 우리의 지도자는 그래도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고,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었습니다. 모주석과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내가 지나제일인(支那第一人)이다!"라고 말해서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즉시 내가 19살때 인도의 다르질린에 올랐을 때 쓴 싯구를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 태도와 풍채는 당연히 많은 해외에 살던 중국인들이 돌아오도록 했지요."

 

노인이 하는 말은 절대로 허언이 아니었다. 한번은 전인대 3층의 소강당에서 문예만회(晩會)를 열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가서 뒷자리에 앉았다. 공연을 잘 보기 위하여 강동석은 첫째줄에 앉았다. 공연이 시작되기 3분전에, 모택동이 들어왔다. 그가 이 '지나제일인'을 만나자, 먼저 그녀에게 걸어가서 몸을 숙이고 악수를 했다. 당시 강동벽은 안경을 쓰고 프로그램목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바로 일어섰다. 미소짓는 모택동은 바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면서 자리에 그냥 앉아계시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았다.

 

내 곁에 있던 관리모습의 중연인이 그의 옆에 앉아있던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할머니는 도대체 어느 장군이나 열사의 어머니인지 모르겠다. 정말 대단한 것같다. 우리의 모주석께서 직접 다가가서 그녀에게 인사하다니."

 

나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녀는 누구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녀는 강유위의 딸입니다."

 

"강유위가 누구지?" 그 관리의 부인이 물었다.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매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느 날 오후, 부모가 차를 타고 외출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동사십조를 지나게 되었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아서, 강동벽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대문을 들어서자 강동벽과 용모가 창로한 사람들 몇명이 여유있게 정원에 앉아 있었다. 큰 원탁이 있고, 그 위에 차도구가 놓여 있으며, 과자와 견과류가 놓여 있었다. 늦여름,초가을이 바뀌는 계절이어서 정원에는 짙은 풀과 나무냄새가 났다. 몇 그루의 가지를 뻗은 노수는 햐안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곳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또한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불시에 찾아온 손님인 아버지는 일시에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얼굴에는 일시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강어르신은 아주 기뻐하면서, 계속 부모님을 앉아서 같이 정원의 가을색을 감상하자고 권했다. 여러 손님들 중에서 부친은 단지 한명 재도(載濤)뿐이었다. 

 

강동벽은 손가락으로 흰색 꽃을 피운 나무를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건 황제가 하사한 태평화(太平花)입니다. 당시 황상(광서제)이 선부(강유위)에게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꽃이 필 때가 되면 나는 의봉에게 차와 먹을거리를 준비하게 해서 여기에서 꽃구경을 한답니다. 모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노인들이지요." 이어서, 나의봉은 장지동(張之洞), 장훈(張勛), 임칙서(林則徐)의 후손과 애신각라가족의 후손을 한명한명 나의 부모님에게 소개했다. 정원은 옛날의 풍경이었다. 확실히 이건 고정된 멤버가 있고, 특수한 의미를 지닌 모임이었다. 강동벽이 안배한 관유유연(寬裕悠然)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일거일동은 모두 역사의 중온(重溫)이며 회념(懷念)이었다. 주인과 손님들이 얘기하는 내용은 시(詩)였다. 그중 용모가 청수한 중년여성도 있었는데, 문장이 술술 나왔다. 그건 아버지가 가장 잘알지 못하는 화제여서, 부모님은 금방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는 그 일을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그가 말하는 속에 탄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친의 느낌으로, 강씨집안의 거동은 예의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일종의 미덕이었다. 그런 예의와 미덕은 사람에게 정신적인 위안와 심령의 온난을 가져다 준다. 강동벽은 친구들을 은근하고 돈후하게 대했다. 전왕조의 옛친구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모든 것에 '충의(忠義)'를 가장 중시했다. 노인이 신조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 구도덕에 속하고, 완전히 구식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때, 정부에서는 전사회에서 강력하게 '계급, 계급투쟁'학설을 내세우고 있었고, '정치우선'의 사상노선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강동벽이 부친을 알고난 후, 다시 나융기(羅隆基)를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부친은 당연히 기뻐하면서, 금방 서로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모두 나(羅)씨성이므로 강씨모녀와 나융기는 만나자마자 서로 잘 알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대했다. 

 

"오백년전에는 한집안입니다." 나융기가 기뻐하면서 강동벽에게 말했다. "나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 여동생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힘들어지거나, 병들면, 누이가 보살펴줄테니 나는 겁날 것이 없습니다."

 

나의봉도 말한다: "저는 오빠가 한분 있는데, 나를 아주 사랑합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국외에 있습니다. 이제 괜찮네요. 또 한명이 왔으니."

 

강씨모녀는 나융기를 아주 좋아했다. 나중에 부친은 장내기(章乃器), 진명덕, 등계성등을 강씨모녀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이들은자주 모임을 가졌고, 모임은 많은 경우 우리 집이었다. 우리집의 모임에 나융기만 참가하면, 살롱으로 바뀌었다. 나융기의 곁에 미혼여성이 있으니, 그는 아주 기운이 넘쳐 보였다. 조금만 틈이 나면 줄줄이 말을 하면서 자신의 학문이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부친은 매번 속으로 웃었다. 나의봉은 그러나 말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다만 나융기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설사 그와 부친이 민맹(民盟)의 옛 일을 얘기하더라도, 강동벽의 이 딸은 유심히 들었다. 눈길을 돌리지 않는 모습은 의미심장했다. 어떤 때는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기운이 감돌기도 했다. 

 

나중에 나융기는 우리 집에서 강씨모녀를 만나는 외에, 자신이 직접 동사십조의 강씨모녀의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가 단독으로 자신의 집에 강씨모녀를 초청해서 차를 마시고 커피도 마시곤 했다.

 

3년재해가 왔다. 국가원수조차도 "바쁠 때는 마른 걸 먹고, 쉴 때는 죽을 먹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 량의 기름, 두량의 깨장, 세 량의 과자, 반근의 땅콩이 시민백성들이 명절을 지낼 때 특별히 공급받는 양이었다. 그것들은 금가루처럼 진귀했다. 밥을 한숟가락 더 먹기 위해, 한 조각의 고기를 더 차지하려고 형제간에 싸우고, 자매간이 말다툼을 벌이며, 부부가 반목하고, 부자간에 안면을 바꾸는 일까지 심심치않게 생겼다. 바로 이 시기에 강씨모녀는 우리 집에 올 때면 나의봉이 반드시 당과(糖果) 혹은 점심(點心)을 가지고 왔다.

 

물질이 극도로 결핍된 긴장된 단계에 이르자, 나의봉도 더 이상 당과와 과자를 보내주지 못했다. 한번은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오차(午茶)를 마시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모친의 손에 2치길이, 1치너비의 작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입에 대고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라는 표시를 했다. 손님들이 떠난 후, 어머니가 봉투를 열자, 온가족이 깜짝 놀란다. 바로 북경시정부가 해외교민들이 송금한 돈의 다과에 따라 북경의 교민가족들에게 나누어주는 전용고점표(糕點票), 당표(糖票), 포표(布票)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액수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격동하여 말했다: "이건 강어르신의 아들이 해외에서 노인들에게 보내준 것인데, 우리가 받을 수는 없다."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 나의봉에게 말했다: "백균과 우리 일가족은 이런 큰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강어르신은 나이도 많으시고 영양보충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생활은 그래도 일반백성들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저쪽에서 강동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생활은 아주 괜찮으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나의 생활원칙은 힘든 일이 있으면 함께 견디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나누자는 겁니다."

 

그후 3년동안, 어머니는 계속하여 나의봉이 전해주는 교포가족의 전용표가 든 봉투를 받았다. 어머니는 그 봉투를 들고 나와 함께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의 "교회상점(僑匯商店)"으로 가서 점심을 사고, 백당을 사고, 화포를 샀다. 그 상점에는 항상 사람이 가득했고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래도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나와 어머니는 이들 귀한 식품과 물품을 받아들고 돌아오는 길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놓자, 아버지는 그것을 본 후에 이렇게 말했다: "강동벽은 전인류를 해방시키는 것은 한 사람을 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머니는 이들 귀한 물건을 가지고 사람들을 접대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다시 보내주었다. 예를 들어 저안평(儲安平, 광명일보 편집인 출신의 언론인), 풍역대(馮亦代, 작가,번역가,출판가)같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처지는 우리 집보다 훨씬 나빴다.

 

구정 전날, 강씨모녀가 꽃망울이 가득한 수선화 화분을 보내주었다. 나의봉은 모든 화경(花莖, 꽃줄기)에 5푼너비의 붉은종이를 붙여서 보냈다. 만일 꽃망울이 4개면 나란히 4개의 붉은 종이가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수선은 원래 봄을 뜻했고, 하나하나 붉은 것은 기쁜 분위기를 나타냈다.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연이어 찬탄을 보낸다: "뭐든지 강씨집안에 들어가면, 남들과 달라지는구나."

 

설사 문화대혁명기간에 강씨모녀가 근검절약하면서 보내던 시절에도 나의봉은 창가에 귤껍질을 말려서, 모두 장으로 담그고, 그 귤껍질장을 나의 책가방에 넣어주면서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 과일장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의봉을 봐라. 그러면 네가 협골유장(俠骨柔腸)이 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연탄난로로 겨울에 난방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나의봉은 나에게 '아이젠하워탕'이라는 미국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개했다: "이건 아이젠하워장군이 2차대전때 군영에서 발명한 것이다."

 

강할머니는 다시 보충해서 말해주었다: "이 탕은 값싸면서도 영양이 풍부하다. 단지 불이 필요하다. 너는 아빠엄마에게 여러번 만들어 드려라. 그들이 이 탕을 많이 먹으면 몸에 좋을 것이다."

 

강동벽 모녀와 몇년간 교류하면서, 나는 귀족신사와 물질금전의 이중관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녀(그)들은 상류사회에 산다. 반드시 수중에 돈이 있어야 고귀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진정한 귀족신사정신을 가진 사람은 돈을 경시한다. 물질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그)의 마음 속에 상인, 사장, 브로커는 절대로 gentleman이 아니다. 저안평은 그의 그 유명한 <영국풍채록>에서 1개의 장을 들여 귀족과 귀족사회를 분석하고 묘사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영국교육의 최대목적은 모든 사람을 군자, 신사로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부친은 아들이 man이 되기도 전에, 그가 gentleman이 되기를 바란다. 영국인들은 진정한 군자는 진정으로 고귀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정직하고, 편파적이지 않으며, 어려움을 겁내지 않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그녀(그)는 영예로운 사람일 뿐아니라, 양식있는 사람이다." 만일, 강씨모녀는 나에게 무엇이 귀족인지를 알게 해주었다면, 저안평의 그 말은 나에게 어떻게 진짜와 가짜귀족을 구별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바로 그 곤란한 시기에, 우파들의 모임에서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더치페이를 했다. 매번 모일 때마다,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갔다. 그 때, 나는 점점 나의봉의 의복이 예뻐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과거에는 입지 않던 취록색까지도 입었다. 머리카락도 매끄러워졌다. 머리모양도 정성껏 빗어서 만들었고, 갈수록 서양식이 되었다. 더욱 큰 변화는 모임에서 그녀와 나융기가 따로 소모임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한번은 우리가 서단(西單) 융선후통(絨線胡同)의 사천반점(四川飯店)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들은 옛날의 왕부(王府)였던 곳을 산책했다. 우리가 모두 대문에 이르렀는데, 그들 둘(나의봉과 나융기)은 한참 뒤에 처져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그 둘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려 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를 막으면서 책망했다: "멍청하기는."

 

달빛아래, 정원에 늦게 핀 꼿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들 둘은 영어로 얘기했다. 나의봉은 어조가 부드러웠고, 두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융기의 심신은 마치 그 검은 눈동자에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나의봉은 나융기의 애정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나융기의 개인적인 매력을 막지 못했다. 그리하여 오누이로 칭하던 이 한쌍은 수년에 걸친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단독으로 데이트하고, 전화하고 편지를 쓰는 것이 그들의 주요 내왕방식이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아버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노생(努生, 나융기의 字)의 고질병이 다시 도졌군. 여자만 만나면 찝적댄다. 가련하게도 강유위의 이 외손녀는 정말 사랑에 빠진 것같다."

 

한번은 강씨모녀가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왔다. 자리에 막 앉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나융기가 건 것이었다: "의봉이 도착했습니까?"

 

영어로 대화하는 전화는 거의 반시간동안 진행되었다. 부친은 기분나빠하면서 입으로 중얼거렸다: "이 노생, 연애를 하면서도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군."

 

전화를 마치고 나의봉이 거실로 돌아왔다. 역간은 계면쩍은 눈빛이었다. 나는 발견했다. 그녀의 원래 그다지 예쁘지 않은 얼굴이 흥분으로 생동감이 나타났고, 생동감이 나타나자 예뻐진 것이다.

 

얼마 후, 나융기의 친구인 조군매(趙君邁)가 우리 집으로 와서 한담을 나누었다. 부친이 관심을 나타내며 물었다: "노조(老趙), 도대체 노생과 의봉의 관계는 어떤가?"

 

조군매가 말했다: "당신들도 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관계입니다."

 

부친은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노생의 입장을 알고 싶다. 그가 또 그저 한때의 바람기가 아닌지."

 

조군매는 즉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거실중앙으로 가더니 팔과 다리를 들어 태극권을 시전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한다: "백로(伯老, 장백균을 가리킴), 나에게 그런 어려운 문제를 냅니까. 노생이라는 사람의 성격과 문제를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가 지금은 의봉에 대해서 열렬하지만, 앞으로 식을지 아닐지 아무도 보증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나의봉은 나융기가 우파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신성한 감정을 바쳤다. 이는 부친이 그녀를 아주 존중하고 아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애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다. 나융기가 처인 왕우가(王右家)와 헤어진 후, 적지 않은 여자들과 연애를 했으나, 한 사람과도 해로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친은 항상 말했다: "방법이 없다. 믿지 못할 사람은 항상 노생인데, 또 항상 여자들은 스스로 걸려든다."

 

좋은 일을 성사시키려고 생각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들이 정말 쌍을 이룬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노라(老羅, 나융기)는 생활을 보살펴주는 사람이 생기고, 의봉은 앞으로 의지할 사람이 생기니까.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잘 어울립니다. 의봉의 출신, 학식, 교양, 성격 그 어느 하나도 노라에 못지 않지 않습니까."

 

"이대저(李大姐, 어머니의 성은 李이고 이름은 健生이다)의 말이 맞습니다." 조군매도 호응해서 말했다: "나는 나의봉이 노생에게 보낸 편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 영어로 썼더군요. 문법, 수사, 어조까지 포함해서 모두 간결하고 깔끔하며 함축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일반적인 영국인도 그렇게 멋진 서면언어를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노생은 항상 자신의 영어가 얼마나 뛰어난지 자랑하지만, 내가 보기에 말하는 것이나 쓰는 것이나 나의봉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노라는 왜 연애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줍니까?" 어머니의 물음에서 나융기의 그런 거동에 대한 불만이 나타났다.

 

"이대저, 오해하지 마십시오." 조군매가 급히 해명했다. "그건 노생이 고의로 연애편지를 공개한 것이 아니라, 나의봉의 문자표현수준이 놀라서 나에게 보여주면서 감상하게 했습니다. 내가 서신을 읽는 동안 그는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이 누이가 쓴 편지의 말투는 철저하게 서양화되었을 뿐아니라, 귀족화된 것이다. 나는 도대체 그녀가 어디에서 이런 걸 배웠는지 모르겠다."

 

부친의 결론은 이러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연애에 빠졌다. 그러나 나융기는 정(情)으로 하는 것이고, 나의봉은 마음(心)으로 하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노생에게 달린 것같다."

 

제1차로 우파의 모자를 벗겨주면서, 부친과 나융기를 위로하기 위해, 상부에서는 그들에게 남하하여 참관하도록 해준다. 부친이 참관한 노선은 강소,절강이고, 나융기가 참관한 노선은 호남, 강서였다. 그리고 나융기와 함께 간 사람은 강씨모녀였다.

 

기차칸에서 아버지는 조용히 어머니에게 말했다: "보기에, 중앙통전부는 이미 알고 있는 것같다. 나융기와 강씨모녀의 특수한 관계를 이용하는 것을 보니."

 

이번 여행은 즐겁고 편안했다. 게다가 애정이 포함되니, 나융기이건 나의봉이건 둘다 넘치는 힘을 발휘했다. 그들이 북경으로 돌아온 후 우리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부모님은 원래 말랐던 나의봉이 살이 붙은 것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나의봉은 애정을 수확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 그녀는 나융기에게 생일케이크를 보내면서, 직접 크림으로 두 개의 나란한 하트를 그렸다. 하트는 붉은 색이고, 큐피트의 화살이 관통하고 있었다. 그외에 꽃도 있고, 서신도 있었다. 나융기는 생일선물을 받고, 대경실색한다. 이건 그가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를 몰라서 부친에게 자문을 구했다.

 

부친은 나융기에게 찝적대지 말았어야 한다고 질책했다: "너는 반평생 로맨틱했고, 그것만으로 두꺼운 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 너는 우파이고, 그녀는 명문출신이다.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고, 이제 마음을 표시했는데, 그것만해도 아주 과감하고 아주 엄숙한 거동이다. 만일 어울리는지를 묻는다면, 나의봉은 너에게 과분하다. 네가 성의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처를 고를 때는 주로 마음이 좋은지를 봐야 한다. 다른 건 모두 중요하지 않다."

 

나융기는 말했다: "우리는 단지 오누이로 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부부로 맺어질 수는 없습니다."

 

부친이 물었다: "네가 먼저 그녀에게 접근해놓고, 이제 그녀를 거절하겠다는 것이댜. 노생,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나융기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이유를 하나도 대지 못했다.

 

"너는 그녀가 나이가 들었고,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냐?" 부친의 말에, 나융기는 유구무언이었다.

 

나중에, 그들 둘의 관계는 혼인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의봉은 강유위의 후손이고, 나융기에 대하여 예의로 대했다. 매번 단오, 중추 혹은 중양절을 맞으면 부모님은 나의봉이 직접 만든 케이크를 받았다. 어떤 때는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나융기는 어떻게 명절을 보내는지 물어보곤 했다.

 

나융기는 대답한다: "다행히 누이가 먹을 것을 보내주어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곤 합니다."

 

만일 연애가 나융기에게는 즐기는 것이었다면, 연애가 나의봉에게는 소모였다.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많은 마음을 쓰고, 많은 감정을 소모했다. 중년에 든 여인에게 겁나는 것은 소모이다. 얼마 후, 나의봉은 나융기가 자신과 왕래를 유지하는 동시에 다른 여자와 연애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비록 연경대학을 졸업한 것이 아니지만, 영어에 정통했고, 카드놀이도 잘하고, 춤도 잘 추며 활발하고 예뻤다.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는 나융기와 카드놀이를 같이 하고, 같이 춤을 추다가 만나서, 연애로 발전한 것이다. 그녀를 위하여 나융기는 그의 형(당시 중국과학원 부원장)과 한바탕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주은래(周恩來)까지도 알게 되었다. 이건 나의봉에게 치명적인 일격이다. 나는 랄았다. 나의봉이 아무리 나융기에게 마음을 쏟더라도, 절대로 공공장소에서 카드놀이를 같이 하거나, 춤을 같이 추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1963년 가을, 나는 사천성 천극단(川劇團) 예술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의봉은 전국정협위원인 강동벽을 모시고 성도로 시찰을 왔다. 금강빈관(錦江賓館, 당시 성도의 최고급 호텔)에서 강동벽이 잠을 자는 틈을 타서, 그녀는 몇시간동안 그 일을 얘기해주었다.

 

"소우, 만일 그가 나에게 청혼했다면 나는 절대로 시집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라이(羅姨). 왜요?"

 

"나는 그가 더러워서 싫어. 더러워." 그녀의 어조는 담담했으나, 입술 끝은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의 담담한 말투 속에는 엄천난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졸지에 나이든 것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의봉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다. 나융기의 낭만적인 천성과 과거의 일들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거기에 몸을 던졌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날로 메말라가는 인생에서 마지막 환상을 그린 것이 아닌가 싶다. 행복하고 기이한 환상을. 나의봉은 일찌기 이번에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한 일을 글로 썼고, 내심의 고통과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글을 다 쓰고 나서, 시종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세상에 묻는데, 사랑이란 무엇이길래 생사까지도 허락하게 만드는가. 천지간을 남북으로 날아가는 한쌍의 새는 얼마나 많은 추위와 더위를 견뎠을까"라는 원호문(元好問)의 <모어아(摸魚兒)>는 천하의 애정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영원한 질문이다. 보기에 죽음보다 신비한 것이 사랑이다. 감정생활에서 오랫동안 똑같은 마음, 의지, 은인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일반적인 여성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안평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량(賢良), 관서(寬恕)와 자애(自愛) 중에서 진심(盡心)과 극제(克制)른 하는 것이 당금세계에서 가장 좋은 처로서의 품행이다." 나의봉에게는 그런 품행이 있다. 단지 아버지의 그 말처럼이다: "노생은 혜안도 없고, 복도 없구나!'

 

2년후 나융기는 심장병으로 집에서 죽는다.

 

그 소식을 듣자, 강동벽은 즉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선생이 돌연 가시다니, 나와 딸은 밤에 잠도 못이루고 비통하고 놀랐습니다. 나는 만련을 써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은데, 다 쓴 후에 어디로 보내면 될까요."

 

아버지는 말했다: "어르신, 당신은 한글자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노생은 우파입니다. 내가 알기로, 그의 죽음에 대하여 민맹중앙(民盟中央)은 아무런 의식도 치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보통사람이 죽어도 장례는 치러야 하는데. 장선생, 우리가 통전부에 물어봐도 될까요." 강동벽은 감정이 격해졌다.

 

어떻게 대답해야좋을지 몰랐던 부친은 전화를 끊었다.

 

강동벽이 어찌 알았으랴: 민맹중앙에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 바로 통전부라는 것을.

 

나는 사천성 천극단에서 몇년간 있으면서 온갖 타격과 차별을 받았다. 말이 예술실에서 일하는 것이지, 실제로 나에게 맡겨진 일은 낮에는 슬라이드영사기를 손보고 저녁에는 자막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일하는 진실된 상황을 집에는 얘기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상심하고 어머니가 눈물흘릴까봐. 그래서 자연스럽게 강씨모녀를 떠올렸고,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억울하고 분노한 내용을 모조리 담아서. 왜냐하면 나의 직감으로 그녀 두 사람은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혁' 전날, 우리는 시종 편지를 주고 받았다. 강씨모녀의 회신은 확실히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이지만, 서신에 나타난 연민, 따스함, 사랑은 강씨모녀의 내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1964년말,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을 때, 나의봉이 편지를 보내면서 아주 아름다운 금붕어서첨(書簽, 책갈피)를 보내주었다. 가는 붓으로 그려서 만든 것이고, 모양이 예쁘며 색깔도 고왔다. 서신에는 이렇게 썼다: "이 금붕어는 영기도 있고 즐겁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너이다." 나는 그것을 받쳐들고, 그것을 보았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손에서 떼어놓지를 못했다. 그리고 돌연 울고 싶어졌다.

 

문화대혁명기간, 나는 오랫동안 강동벽의 집에서 지냈다. 이는 나로 하여금 강동벽 모녀에 대하여 더욱 깊이있게 왕래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66년 8월부터, 우리집은 밤낮이 없이 가산을 차압하고(抄家), 집안의 물건을 털리는 일들을 겪어야 했다. 전체 사합원을 홍위병, 조반파에게 점령당했고, 일가족은 대문에 붙어 있는 문서수발실과 경비실로 쫓겨났다.

 

1967년 봄의 어느 깊은 밤, 부모님과 나는 이미 잠이 들었다. 돌연 욕을 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는 깨어났다. 부모님과 나는 나무판으로 만든 침대에서 막 몸을 일으켰는데, 한 무리의 홍위병이 발로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앞장선 사람은 16,7살 정도 되어보였다. 만일 혁명을 부르짖지 않았다면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할 나이였다. 그들은 '누가 장백균인가?'라고 물었고, 이 한 마디 이후 온 집안을 뒤져서 가산을 몰수해갔다.

 

우리집은 여러번에 걸쳐서 그런 일들을 당하였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침대, 나무의자, 이불같은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그들은 수확이 너무 적었다. 가장 앞장섰던 자는 우리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았다. 그리하여 시계도 빼앗아갔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Movado', 부친이 언니에게 준 '롤렉스' 그리고 그 자신이 차고 있던 '오메가'까지. 그들이 떠난 후, 어머니는 저녁식사후에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얼음사탕까지도 가져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고, 엄숙한 얼굴을 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건생, 이 집은 너무 안전하지 못하니, 소우는 다른 곳에 보냅시다."

 

어머니도 동의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도 두 분과 같이 있겠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낮에는 우리와 같이 있고, 단지 집에서 밤을 보내지는 말아라. 너무 위험하다."

 

"아빠, 나보고 어디로 가라는 겁니까. 다시 말해서, 누가 장백균의 딸을 자기 집에 살도록 해줄 담량이 있단 말입니까."

 

부친은 한참을 생각해보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진정한 보황당(保皇黨)을 찾아갈 수밖에 없겠다."

 

어머니는 질책하는 투로 말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직도 농담이 나와요."

 

"그게 어디 농담인가. 내가 말하는 보황당은 강동벽을 말하는 것이다. 듣기로 그녀의 주소에는 지금까지 외인들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니까."

 

나는 정말 아버지에게 감탄했다. 어떤 험악한 지경에 처해서도 맑은 정신을 잃지는 않았으니까. 그날 오후, 아버지는 나에게 잠옷과 칫솔을 챙겨서 그와 함께 동사십조의 하가구로 가자고 했다.

 

나는 말했다: "내가 잠옷을 챙겨서 뭐하게요. 아직 그들이 동의할지 아닐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동의할 것이다. 너는 물건을 모두 챙겨라." 아버지의 어조는 반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와 아버지는 13번 시내버스를 타고, 지안문(地安門)에서 동사십조로 갔다. 나와 내 뒤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보자, 강동벽 모녀는 흥분하여 우리 둘을 끌어안았다.

 

강동벽은 부친의 두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이건 정말 악몽입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서로 생사를 모르다니."

 

나의봉은 말했다: "운동(문혁을 가리킴)이 시작되자, 우리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말을 마치고, 찻잎을 꺼내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부친은 급히 말했다: "그러실 것없습니다. 오늘 제가 소우를 데리고 온 것은 강어르신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강동벽은 말했다: "장선생, 무슨 일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와 딸이 힘껏 도우겠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이 여러번 '초가'를 당하고, 부수고 깨고 빼앗아가는 일을 당한 상황을 얘기한 후, "저는 나이가 들었으니, 홍위병도 나를 어떻게 하더라도 늙은 목숨 하나가 아닙니까. 그러나 소우가 그런 위험한 환경에 지내니, 저와 건생이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이곳이 좀 더 안전할 것같아서, 강어르신이 동의하실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매일 저녁에 이 집에서 잘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동벽은 말했다: "당연히 되지요. 그리고 나는 소우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아주 환영합니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감격했다.

 

강동벽은 아버지를 살펴보더니, 마음아파 하면서 말했다: "장선생, 말랐군요. 절대로 몸을 보중하세요. 나는 지금 집을 나서기가 불편하니, 가서 건생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나 대신 말을 전해주시지요. 그녀에게 소우가 우리 집에 있으면 가장 안전할테니, 안심하라고."

 

아버지는 바로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정거장까지 바래다 주었다. 아버지는 당부했다: "이런 집안은 법도가 있다. 너는 그 집의 법도를 잘 지켜야 한다. 조금만 소홀하면 실례가 되는 것이다.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데, 지금 강동벽을 제외하고, 아무도 감히 우리 집안 사람을 거두어주지 않을 것이다!"

 

가는 동안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서 말이 많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강동벽은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 집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유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서비홍(徐悲鴻)의 그림이 좋다는 것만 알 뿐이고, 그가 어떻게 그런 성취를 이루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당시 서비홍은 의흥(宜興)의 고향집에서 서당선생이었다. 상해로 가서는 가난해서 밥도 제대록 먹지 못했는데, 무슨 그림이냐. 그때 합동화원(哈同花園)의 총관(總管)을 만났고, 그는 서비홍의 모든 생활비용을 부담해 주었다. 나중에 서비홍이 프랑스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떠날 때, 강유위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강유위는 서비홍에게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국비유학으로 갈 수 있는 T/O를 마련해주었다. 그리하여 서비홍이 외국에서 장벽미(蔣碧薇)와 비교적 넉넉하게 지낼 수 있었고 그림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바로 강유위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교육총장 부증상(傅增湘)을 통해 그 일을 성사시켰다. 그래서 서비홍은 명성을 얻은 후, 어느  때, 어느 경우라도 강유위에 대해서는 존경과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나중에 한번은 우연한 기회에 서비홍이 강유위 일가를 위해 그려준 '전가복(全家福, 가족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 그림을 어느 부유한 온주(溫州)사람이 프랑스에서 구매해서 얻었다. 누군가 그림의 진위에 의문을 나타냈는데, 나는 한 마디로 잘라서 말했다: 그건 진짜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나 자세한 것이나 공을 들인 것이 모두 서비홍의 강유위에 대한 존경하고 감사하는 뜻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떠나자마자, 나의봉은 나를 위해 급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에게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휴지, 비누, 칫솔, 수건은 어디에 놓아두었는지였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은 나를 내 침실로 데려가서 나에게 스스로 침대, 침대보, 이불, 베개, 슬리퍼 그리고 침대등을 켜고 끄는 것, 자명종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세번째로 한 일은 서랍 하나를 비워서, 나에게 내 속옷과 자잘한 물건을 넣어두도록 해준 것이다. 네번째로 한 일은 집안의 두 남자일꾼인 노곽(老郭)과 이진(二陳)을 소개시켜 준 것이다. 다섯번째로 한 일은 나에게 일과 휴식시간을 알려준 것이다. 예를 들어 세끼를 언제 먹는지.

 

나는 말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잠만 자고 먹는 것은 하지 말라고."

 

옆에 앉아 있던 강동벽의 눈이 동그래진다: "소우가 어떻게 잠만 자고 먹질 않는단 말인가. 우리집에 왔느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나는 아침만 먹는다."

 

이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므로 나는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 되어 이 집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강동벽은 나에게 말했다: 집의 설계자는 나의 남편인 나선생이다. 스타일은 외중내서(外中內西)이다. 소위 외중(外中)이라는 것은 중국식 벽돌, 나무 건축이고, 담장은 칠하고, 기와는 검은 것을 썼으며, 사합원의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오면 원목,나무줄기 및 나무가지로 만든 사립문이 있다. 대충 만든 것같고 아주 원시적으로 보이며, 별로 신경쓰지 않은 것같았다. 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신경써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당에는 아무런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풀과 나무가 있었다. 사립문을 지나면 정문으로 들어간다. 그때 "갈지자(之)"형의 석판로(石板路)가 있다. 석판의 색깔은 벼루같았고, 발로 밟으면 서늘하고 매끄러웠다. 이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골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러나 분명히 모두 문화의 훈도를 받은 것이다. 문인사대부식의 정치하고 풍아(風雅)했다. 소위 '내서(內西)'라는 것은 방의 사용과 배치이다. 문을 들어서면 자그마한 접대실이 나온다. 베를 깔아놓은 쇼파와 자수를 놓은 방석, 마름모모양의 화전(花塼)을 깔아놓은 바닥이 있었다. 거실은 아주 넓었다. 붉은색나무판을 깔았고, 사용기능에 따라 3부분으로 나누었다. 한쪽은 식사하는 곳이고, 한쪽은 손님을 만나는 곳이며, 다른 한쪽은 서가와 책상을 놓아두었다.

 

거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예쁜 영국식 벽난로와 그에 상응하는 화구(火具)였다. 그리고 구리로 만든 바닥등, 재떨이와 촛대등도 있었다.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모택동의 수목화상을 제외하고, 모든 것은 강동벽의 옛 시절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거실과 이어진 것은 강씨모녀의 침실이다. 하얀 벽, 하얀 가구, 하얀 커튼 조금도 다른 색은 들어가지 않았다. 모녀의 침대가 각각 옅은 남색과 옅은 분홍색이 아니었다면 그 하얀색의 깔끔함은 사람들에게 한기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나중에 나의봉은 나를 데리고 화장실과 연결된 방을 보여주었는데, 그 안에는 여러 서적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가구들이 있었다. 그 방은 한눈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위는 비어있고 아래는 차있는 팔병조화락지격선(八屛雕花落地隔扇)이었다. 나무도 고급이고, 조각도 일류였다. 그것은 거실에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큰 방은 도대체 무엇에 썼던 겁니까?" 나는 나의봉에게 물었다.

 

"춤추고, 칵테일파티를 했다. 봐라. 저 유리격선은 움직인다. 이동할 수 있다. 이동하는 위치는 오는 손님이 몇명인지에 따라서 정했다."

 

그녀는 또 말한다: "네가 지금 본 것은 전원(前院)이다. 후원의 방은 더 크고 더 좋다."

 

"그럼 왜 두 분은 후원에 사시지 않는 겁니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외교부의 한 우두머리가 살고 있다."

 

"......"

 

그날 저녁, 나는 나의봉이 나를 위해 준비한 온통 백색인 침구를 열어 침대에 누웠다. 우리 집에서는 밤낮으로 놀라고 긴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곳은 조용하고 창량했다. 한줄기 한줄기 달과 별의 빛이 마음 속으로 들어와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세수를 마치고 거실로 갔다. 바로 흑갈색 필리핀목재로 만든 원형식탁 위에 이미 작은 접시, 작은 그릇등 찬구가 놓여 있었다. 반시간이 지나서 강동벽이 들어왔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어젯밤 잘 잤는지 물어보았다. 우리가 자리에 앉은 후, 나의봉이 아침을 내놓았다. 한 사람당 죽 한그릇이다. 탁자 위의 접시에는 작은 은어튀김, 두부유가 있었고, 양쪽을 노랗게 구운 만두조각도 있었다. 두 개의 기름떡(油糕)은 따로 작은 도자기접시 안에 놓여 있었다. 

 

강어르신은 나에게 말했다: "예전과 달라졌다. 지금 우리 집은 아주 간단하게 먹는단다. 그러나, 은어와 죽, 우유를 바른 만두는 아주 맛있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구운 만두 조각 하나를 나에게 건네준다. 얇은 만두조각을 먹은 후, 노인은 다시 기름떡 하나를 먹었다.

 

나의봉은 또 다른 기름떡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네 것이다."

 

나는 예의바르게 거절했다. 비록 은어와 죽, 만두이지만 정말 맛있었다. 나는 이 아침식사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의 부모는 비록 우귀사신을 했지만, 매일 아침에 우유를 먹고, 달걀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적으로 강동벽의 집에 기거하던 상해아가씨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강어르신은 왜 이렇게 간단하게 드시나요"

 

그녀는 말했다: "나의봉은 수입이 없다. 일가족이 모두 강동벽이 중앙문사관에서 받는 150위안의 급여와 후원에서 받는 약간의 임차료로 산다. 이전에는 어르신의 아들이 자주 외화를 부쳐주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보내는 돈이 갈수록 줄었고, 부치는 횟수도 줄었고, 나중에는 부쳐오는 것이 없게 되었다. 원래 그녀들 모녀는 아침에도 모든 것을 갖추었고, 계란도 있고, 우유도 있고, 빵에 바르는 황유도 있고, 과일과 고기말린 것도 있었다. 지금은 집안의 비용지출을 계속 줄이고 있는데, 노곽과 이진의 급여는 계속 올리간다."

 

"왜 급여를 올려주는 겁니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어보았다.

 

상해아가씨가 말했다: "그들이 거민위원회에 가서 헛소리를 하고 고발할까봐 그런 거죠. 혹은 사회의 홍위병과 결탁하여 조반파를 끌고 들어올 수도 있고. 지금은 보모나 일꾼들에게 밉보이면 안되는 때이다."

 

나는 강어르신의 아침식사를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들은 아주 불안해 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강어르신집의 아침도 아주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두부유는 첫날의 맛과 둘째날의 맛이 달랐고, 둘째날과 셋째날의 맛이 달랐다. 나는 그 미각의 느낌을 나의봉에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흥분했다.

 

어느 날 아침, 날씨가 아주 좋았다. 비록 초겨울이기는 하지만, 도시는 회색의 침침한 모습이었고, 나뭇잎도 모두 떨어졌다. 그러나 이 날은 날씨가 맑았다. 금색의 햇살이 맛있는 술같았다. 사람의 마음도 많이 편안해졌다. 아침식사후에 나의봉이 물었다: "소우. 너는 오늘 어디를 좀 다녀와줄 수 있겠니. 내가 물건을 사야 하는데."

 

"당연히 가능하지요. 뭘 사시려구요."

 

"두부유"

 

"좋습니다. 그건 간단하네요. 좀 있다가 내가 집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중간에 지안문 부식점에서 사면 됩니다."

 

나의봉은 나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장씨네 둘째아가씨! 너는 우리집의 두부유가 맛있다고 하지 않았어. 맛있는 건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게 아니지."

 

"라이, 어디로 가서 사야 하는 건데요?"

 

"전문로 동쪽에 전문적으로 두부유를 파는 상점이 있다. 지금은 향양부유상점(向陽腐乳商店)이라고 부르지."

 

"좋습니다.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몸을 돌려 바로 떠나려 했다.

 

나의봉은 나를 붙잡으며, "서두르지 말고."

 

나는 말했다. "돈은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돈이 아니라, 두부유를 담을 상자를 가져가라는 거다."

 

"무슨 상자요?"

 

"조금만 기다려보면 알 것이다." 말을 마치고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지나서 그녀는 두 손으로 예쁜 6개의 외국초콜릿철합을 들고 걸어나왔다.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자, 나의봉은 웃었다. 철합을 놓고, 그녀는 상의 주머니에서 한장의 메모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내가 받아들고 보다가 깜짝 놀랐다. 원래 그 위에는 각양각색, 형형색색의 두부유명칭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무슨 왕치화두부유, 광동부유, 소흥부유, 매괴부유, 하자(새우)부유....나의봉은 중요한 일을 당부하는 것처럼 나에게 말했다. 종류마다 20개씩을 사라. 1개종류는 하나의 철합에 담고, 절대로 섞어서는 안된다. 살때는 반드시 판매원에게 부유즙을 많이 달라고 해야 한다.

 

그녀는 다시 설명했다: "두부유의 탕즙을 만두에 바르면 가장 좋다. 이건 내가 초콜릿상자에 그것을 담아오라고 하는 이유이다."

 

나의봉은 10원을 꺼내서 나에게 받아가라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사양하자,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는 돈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말했다: "소우, 내가 말해주는데, 두부유를 산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가장 힘들다. 왜냐하면 6개의 철합을 반드시 똑바로 들어야 탕즙이 흘러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피곤한 느낌을 줄이기 위해서 오는 길에 즐거웠던 일을 떠올려아. 철합을 들고 길을 걸으려면 가슴을 쭉 펴야 한다. 만일 허리를 굽히고 길을 걸으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말을 마치고, 그녀는 철합을 담은 포대를 들고 머리를 꼿꼿이 들고 허리를 쭉 펴서 식탁의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그 모습 그 자세, 그 표정은 마치 은으로 만든 접시를 들고 파리호텔에서 서빙하는 웨이트리스의 모습같이 아주 멋졌다.

 

나는 나의봉이 그려준 전문가도 지도와 두부유세목표를 보면서 순조롭게 5종류의 두부유를 사올 수 있었다(1종류는 물건이 없었다). 그리고 친근한 인상의 판매원은 안에 탕즙을 많이 부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즐거운 일을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시종 기분이 좋았다. 겨울의 태양도 마찬가지로 따스했다. 이때의 나는 일거에 모두 알게 되었다. 비록 "좌소세월어유우곤울지하(坐銷歲月於幽憂困菀之下)"에 있었지만 흥취는 아직 남아 있었다. 최대한도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생태도와 정치한 생활예술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강씨집안의 간단한 아침이 그렇게 맛있었구나!

 

어느날 오후, 겨울비가 내렸다. 저녁에 나는 강동벽의 집으로 가지 않고, 식사후 일가족이 난로를 둘러싸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장내기(章乃器)를 얘기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1966년 8월 장내기가 홍위병무리에게 왕부정으로 끌려가서 '집체타인(集體打人, 집단구타)'대회에 참가했고, 그가 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아서, 태도가 악랄하다고, 엊어맞아 살가죽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홍위병은 그의 집을 모조리 털어갔고, 그의 앞에서 새로 얻은 부인 왕자향(王者香)을 때려죽였다고 한다. 삼륜차를 모는 차부(車夫)는 그에게 아직 숨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그를 억지로 삼륜차에 실어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누구든지 그의 모습을 보면 3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장내기는 강한 사나이였다. 평소에 닦은 기공과 의지로 살아남았다. 민건중앙(民建中央)과 전국공상련(全國工商聯)의 간부들중에 그를 챙겨주거나 동정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양식부의 한 운전기사가 며칠 후에 몰래 찾아가서  그의 집앞에 뜨거운 만두를 놓고 갔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친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약 십여분이 흐른 후에 비로소 느린 어조로 나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내기의 지금 상황이 어떠한가? 우리는 조그만치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나는 그를 아주 보고싶은데, 내가 그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나는 그 말을 듣고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를 몰랐다.

 

며칠 후, 나는 아버지가 장내기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나의봉에게 말했다.

 

나의봉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그런 만남은 당연히 좋지. 그러나 사실상 하기 어렵다."

 

강동벽은 우리 둘이 너무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자, 몸을 일으켜 우리 앞에 앉았다. "너희는 지금 무슨 말을 했느냐. 다시 한번 얘기해봐라. 나도 듣게."

 

나의봉은 광동말로 나의 말을 다시 한번 해주었다. 강동벽은 자세히 들은 후에 이렇게 물었다. "소우. 너의 부친이 장내기를 아주 보고 싶어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있던 나의봉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는 도처에 홍위병, 조반파이며, 가도의 사람들(거민위원회)도 모두 혁명정권의 이목과 발톱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같은 사람의 일거일동은 모두 감시받습니다. 듣기로 유평백(兪平伯, 홍학가)은 눈완두(嫩豌豆)가 먹고 싶은데, 이웃이 볼까봐 겁이 나서, 노부부가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저녁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완두를 까고, 저녁에 완두껍질을 손을 문질러 가루로 만든 다음에 난로잿속에 섞어서 다음 날 버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쓰레기를 검사하던 사람에게 발각되어 비투를 받았습니다. 이 반동학술권위자는 계속하여 자산계급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완두껍질조차도 그들의 눈을 벗어날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명의 살아있는 어른, 대우파가 만난다면. 일단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정말 큰 화를 입게 될 겁니다."

 

이때 강동벽은 얼굴을 딸에게 돌리고 거의 캐묻는 말투로 말했다: "넌 겁나니?"

 

"전 겁납니다. 저는 경궁지조(驚弓之鳥)이니, 당연히 겁나지요." 나의봉은 말을 마치고 두 팔을 교차하여 어깨에 대면서 무섭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동벽은 정색을 하고 말한다: "너는 겁난다지만, 나는 겁나지 않는다. 내가 두 장선생을 우리 집으로 불러서 만나게 하겠다."

 

나의봉은 멍해진다. 나도 일시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넌 뭐가 겁나느냐?" 노인은 계속 딸을 추궁했다.

 

"우리가 반혁명에 관련되었다는 죄명을 감당할 수 없을까봐 겁나지요."

 

"소우. 너도 겁나느냐?" 노인이 몸을 돌려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인 후에 대답했다: "저는 당신들 모녀에게 누를 끼칠까봐 겁납니다."

 

강동벽이 돌연 몸을 일으켜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중대한 결의를 선언하는 것처럼 소리높여 말했다: "다음 주, 나는 개인의 명의로 소우의 부친과 장내기선생을 우리집에 손남으로 청하겠다." 이에 나의봉은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고, 아주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강동벽은 자신이 졸지에 대담한 결정을 내린 것에 흥분하여,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나는 반혁명관련의 죄명을 받아도 겁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한 일을 한 사람이 책임지는 것이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만나는 장소는 바로 우리집, 바로 여기다."

 

"취지여일(就之如日), 망지여운(望之如雲)"(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찬란하다) 노인이 격동하여 발그레진 뺨을 보면서 나는 내심의 감동, 존경, 놀라움과 미안함의 복자한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강씨모녀 두 사람에게 한 사람은 리스크를 안게 만들고, 한 사람은 난감하게 만들었느니, 비록 노인이 "한 사람이 한 일을 한 사람이 책임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진정 책임을 지게될 사람은 그녀의 딸이라는 것을. 나의봉이 그걸 감당하려 할까. 그리고 그렇게 일처리를 해줄까.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라이, 어떡할까요?" 나는 우려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떡하긴. 그녀가 하자는대로 해야지, 만일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죽이려고 들텐데."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노인과 딸이 '목숨을 건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나는 단지 나의봉이 유명한 효녀로 명성이 자자하다는 것만 안다. 강동벽은 딸에게 바로 준비를 시작하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만나는 날짜를 확정하고, 어떻게 장내기에 통지할 것인지 방법을 확정하고, 만났을 때 어떤 차를 마실 것인지를 결정하고, 차마실때 어떤 점심을 살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강동벽은 딸에게 당부했다: "점심은 좋은 것으로 해야 한다."

 

나의봉은 몸을 돌려 나에게 얼굴을 찡그리는 표정을 짓고 몰래 말한다: "그녀가 먹고싶은가보다. 좋은 점심을 사오면 손님도 먹지만 자기도 먹을 수 있으니까."

 

"너희 둘이 또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 강동벽이 묻는다.

 

"강어르신 우리 아무 말도 안했어요" 내가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서 손으로 그녀의 얼마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져주었다.

 

"난 안다. 그녀가 또 나에 대해서 말했겠지. 그리고 좋은 말은 아닐 거고."

 

나는 웃었다. 노인이 아이처럼 귀여웠다.

 

나의봉도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귀를 먹었다고 하는데, 기실 거짓말같아."

 

"너희가 웃는 것은 분명 나에 대해 얘기한 것이 맞지 않아. 어때?" 노인은 득의양야한 표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했다. 강동벽은 그녀가 전용으로 먹는 기름떡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살펴본 후에 물었다: "의봉, 내 기름떡은? 노곽이 잊어버린 건가?"

"노곽은 잊지 않았어요. 엄마, 우리집에 소우의 아빠와 장내기를 불러서 차를 대접해야하잖아요. 그리고 특별히 그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준비하라고 했구요. 나는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드실 기름떡을 마침 다 먹었느니, 조금 기다렸다 살려고 합니다. 어때요."

 

노인은 "아.." 라고 한마디 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소우, 이번 만남을 위해서 나는 기름떡을 기꺼이 안먹겠다."

 

나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문혁이 시작된 후, 노인의 간식은 이미 서양식, 광동식에서 북경기름떡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지금 북경기름떡마저 취소되었다. 기름떡을 취소한 일을 나는 부모님께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말해도 가슴아플 것같고, 그들이 들으면 더 마음아파할 것같아서이다.

 

개략 근 10일이 지나서, 모든 것을 나의봉이 준비했다. 내가 장립범(章立凡, 장내기의 어린아들)에게 연락하여, 부친과 장내기가 강동벽의 집 거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건 그들이 '문혁'때 유일하게 한번 만난 것이고, 그들이 서로 사귀면서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다.

 

아버지는 낡은 중국식 사면의고(絲綿衣袴)를 걸쳤다. 어머니는 "강어르신과 내기를 만나러 가는데 옷을 바꾸어 입는게 어떤가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낡으면 낡을수록 좋다. 길거리를 걸어갈 때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장내기는 흰색의 서양식 와이셔츠, 회색털옷과 서양식 바지를 입었다. 겉에는 파란색 나이론외투를 걸쳤다. 나는 말했다: "장백백(章伯伯), 당신은 어떻게 수장(首長)의 모습입니까?"

 

장내기는 말을 하면서 일어서서 담뱃대를 들면서 말했다: "소우야, 이건 수장의 모습이 아니고, 사람의 모습이란다."

 

만날 때 함께 자리했던 강동벽은 옷을 입는데 신경을 썼다. 흑단암단화의 치파오로 목둘레와 소매끝에 아주 예쁜 두 갈래 조자(绦子)를 수놓았다. 수놓은 것은 화조봉접(花鳥蜂蝶)도안이다. 정교한 수공으로 나비가 꽃들 속에서 춤추는 것을 묘사했다. 왕성한 생명과 활발한 봄날이 소매끝과 목둘레에서 흘러나왔다. 발에는 수화혜(繡花鞋)를 신었는데 오색찬란했다. 나는 아래위로 거의 예술품같은 노인의 복장을 살펴보고는 스스로 돌연 기이하게 여겨졌다: 중국인은 왜 아름다운 수로 감동적인 주제를 효현할까. 그것도 하필 가장 쉽게 파손되고 찢어지는 곳에? 이건 말그대로 중국문인의 목숨과 똑같았다. 강동벽은 딸에게 자신의 얼굴에 연하게 화장을 해달라고 했고, 향수도 뿌렸다.

 

그녀가 옷을 갖춰입고 등장하자, 말그대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나는 앞으로 나가서 노인을 안고, 친근하게 말했다: "강어르신, 오늘 정말 예쁘세요! 여러 사람중에서 일등으로 꼽힐 대미인이십니다."

 

"나는 대미인이 아니다. 다만 나는 화장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은 귀빈이 오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의로 말했다: "그들이 무슨 귀빈입니까. 분명히 우파인데요. 그것도 대우파."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우파는 모두 좋은 사람이다. 대우파는 바로 크게 좋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슨 좌파, 우파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우리 집에 오면 나의 손님이다. 나는 모두 잘 대접해야 한다. 그리고 너의 부친과 장내기는 일반적인 손님이 아니다. 귀빈이다." 여기까지 얘기하고서 모택동이 일으킨 정치운동을 원망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모택동화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팔십까지 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중국은 자고이래로 예의지국이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도시에 사는 친한 친구조차도 만날 수 없다니, 그것도 문화대혁명이라는 미명하에, 조그만치의 문화도 없는 것이다.' 말을 하면서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고, 정말 화가난 표정이었다.

 

나의봉은 이번 만남을 위해, 주머니를 다 털었다. 단순히 음료만도 커피, 인도홍차, 복건대홍포, 항주용정을 준비했다. 그외에 말린국화, 방당(方糖), 연유도 준비했다. 금색띠를 두른 유백색의 자기잔과 받침은 커피를 마시는 용이었다. 몇개의 유리컵은 용정차를 마시도록 준비했다. 홍차 혹은 대홍포를 맛볼 때는 의흥의 차구세트를 썼다. 그리고 2개의 청화개완(靑花蓋碗)을 준비했다. 차를 마실때 먹을 수 있도록 쿠키, 떡, 남당(南糖)을 준비했는데 동단(東單)의 한 유명한 음식점에서 사온 것이다. 나의봉은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수입 시가도 작은 목합 안에 놓아두었다.

 

아버지는 시가 하나를 들고는 냄새를 맡아보고는 원래 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러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에 앉아서, 시가냄새를 맡으니, 말그대로 지금이 문화대혁명인지도 잊을 정도입니다. 자신이 우귀사신인지도 잊을 정도입니다."

 

강동벽은 차를 권할 때 이렇게 말했다: "두분 장선생, 좀 드시지요. 이건 내 딸이 사람을 보내 어제 프랑스빵집에서 사온 겁니다. 맛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음식은 신선합니다."

 

나의봉이 그녀의 말을 시정해주었다: "어머니, 동단의 그 식품점은 프랑스빵집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정강산(井岡山)'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부릅니다."

 

"뭐라고? 정강산은 공산당이 혁명을 한 곳이 아니냐. 그게 빵집과 무슨 관계가 있지?" 강동벽은 놀라서 물었고, 우리는 모두 웃었다.

 

한동안 인사치레를 나눈 후, 강동벽 모녀가 배석한 상태로, 부친과 장내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친은 장내기에게 민건과 공상련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장내기가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제명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모릅니다. 아마도 중국의 자본가중에 모택동은 단지 영의인(榮毅仁) 한명만 지켜주고, 나머지는 모두 타격을 가하려는 것같습니다."

 

나의봉에 옆에서 바로잡아 주었다. "영의인도 기실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상해에 있는 공관(公館)은 유명하고 아주 멋집니다. 북경의 고위간부출신의 홍위병이 전체건물이 사구(四舊)에 속한다면서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불길이 1층에서 꼭대기층까지 번졌습니다. 그들은 영의인 부인을 가죽띠로 목을 묶어서 꼭대기층에서 1층까지 끌고갔습니다. 지금도 뇌진탕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이 홍위병을 검열할 때, 영의인을 천안문 위로 불렀고, 특별히 그와 악수했습니다. 그 의미는 우리 공산당의 민족자본계급에 대한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장내기가 말했다: "내말은 정식(定息, 민영기업을 국유화하고나서 지급한 돈)을 이십년 받았는데, 결국 공산당은 정식을 모두 취소해버렸습니다. 중국은 원래 정책만 있고 법률이 없었는데, 이제는 정책조차도 없어졌습니다."

 

나의봉은 장내기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당신의 정식 이십년은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삼오반(三五反), 공사합영으로 이미 자본가들은 참담해졌습니다. 이번 운동으로 그들은 완전히 끝장났습니다. 노동자 조반파는 모든 자본가의 내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얼마얼마의 돈을 내놓으라고 하고는 그 숫자를 채우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때립니다. 결과는 정말 대단합니다. 자본가들이 내놓은 개인재산금액과 그들이 계산한 금액이 기본적으로 같았으니까요. 우리의 은행도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개인의 기밀인 예금통장까지도 모조리 공개했습니다. 은행보관박스까지도 모두 열어보았습니다. 금은악세사리, 달러파운드, 모조리 몰수해갔습니다. 초가때 홍위병과 노동자조반파는 크게 활약합니다. 등나무의자를 도끼와 망치로 깨부숴서, 등나무가운데에서 달러를 꺼내갔습니다. 집안에서 난로를 때는데 쓰는 석탄을 산만큼 쌓아놓았더라도 모조리 훑어서 안에서 흑칠포로 꽁꽁싸맨 예금통장을 찾아냅니다. 당연히 이렇게 개인재산을 숨긴 자본가들은 맞아죽거나 반죽음이 되구요."

 

강동벽은 동인당의 주인 낙송생(樂松生)이 참사당한 상황을 장내기에게 말해주었다.

 

장내기는 부친에게 민맹의 일부 노인들은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았다. 그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나융기가 일찍 죽은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노생의 성격은 모순됩니다. 그는 성격이 고집스럽지만 본질을 취약합니다. 강한 사나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홍위병이 때리고 초가만 해도 그는 못견뎠을 겁니다. 분명 우리처럼 버텨내지 못했을 겁니다."

 

부친도 탄식하며 말했다: "설사 강한 사나이라 하더라도, 이 관문을 넘기는 어렵습니다. 황소굉(黃紹竤)이 좋은 예가 아닙니까."

 

거기까지 얘기하자, 거실의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나의봉은 급히 뜨거워진 구리주전자를 들고 그들 둘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강동벽은 약간 떨리는 손으로 유리접시를 들어 두 사람에게 과일을 드시라고 권했다.

 

그후의 화제는 자연히 문화대혁명에 대한 견해였다. 장내기는 이렇게 말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운동은 돌연 발생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도 돌연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중 사람들이 잘 모르는 원인이 있을 것이고, 아마도 여러 해동안 숙성되었을 겁니다. 모택동이 법률적으로 준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사전의 모든 준비는 충분했습니다."

 

아버지는 말했다: "내가 보기에, 모택동이 이런 생각을 품은 것은(문혁을 일으킨 것), 내부적인 원인이 그의 제왕사상에 있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빼앗아가는 것이 겁나는 거지요. 외부적인 요인은 소련의 현실을 느낀 겁니다. 스탈린의 사후에 후르시쵸프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는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는 거겠지요. 그래서 소련에 이름을 붙입니다. 수정주의라고. 그리하여, 반수정주의의 구호하에,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이용하여 먼저 중국의 후르시쵸프를 잘라버리는 겁니다. 그와 유소기의 갈등은 절대로 공산당신문에 쓰인 것같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문혁의 정치적 악영향을 얘기하면서 장내기는 두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한번의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은 두 개의 극단이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는 극단적인 개인숭배,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독재주의. 이 두 개는 자고이래로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그것을 최고조로 발휘한 겁니다. 그의 수하에서 소위 무산계급혁명가들은 영합하지 않으면 의부(依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말했다: "'풀과 나무를 집어 도병으로 삼고, 골육을 가리켜 원수로 만드는'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가 당시 형용한 혁명독재는 소수의 몇명 우두머리, 일부 기회주의자인 정치사기꾼, 그리고 일군의 동화된 약자들이 뒤를 따르는 겁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이 혁명에서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이 문화를 표방한 혁명은 영혼에 대하여 극히 나쁩니다. 사람을 모조리 겁쟁이로 만듭니다. 이는 정치노예에 다름없습니다. 운동이 지나가면, 병세가 중하게 되는 것은 인심과 인성입니다."

 

나의봉은 모택동의 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분노하여 말한다: "유소기를 처리하려면 유소기 한명을 처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는 왜 전국의 사람들을 운동에 동원하는 겁니까. 초가, 무투, 문화재훼손. <성경>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우리의 영웅은 그저 도적분자들보다 약간 강하다." 내가 보기에 이천년전의 유대인들이 한 말이 지금 중국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같습니다."

 

강어르신은 거기에서 끼어들었다: "오늘이 어디 두 대우파의 모임입니까. 내가 보기에 세 명 우파의 살롱입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 가가대소한다.

 

약간 흥분한 장내기가 살펴보면서 노인에게 말했다: "강어르신. 제가 최근에 쓴 대련(對聯)을 불러볼테니 들어보시겠습니까?"

 

"좋습니다." 노인은 기뻐했고, 흰색 손수건으로 귀를 닦고는,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시인이고, 저는 속인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두 구절을 지었습니다." 장내기는 거실 중앙에 서서 모택동화상을 쳐다보면서 한자 한자 말했다: "장비필뇌만(腸肥必腦滿, 내장에 살이 찌면 반드시 머리가 X로 꽉찬다)" 이어서 담뱃대를 돌려서 자신의 가슴을 향하게 하고는 말했다: "이득이심안(理得而心安, 인생의 이치를 깨달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 말이 나오자 일시에 정적이 흘렀다.

 

강동벽이 가볍게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잘 썼습니다."

 

나의봉은 혀를 내밀며 강동벽에게 말했다: "어머니, 이 대련은 그저 듣기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일단 말이 나가면 우리는 목이 달아날 겁니다."

 

강동벽은 딸이 침실로 들어가는 틈을 타서 우리들을 향해 혀를 내밀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겁먹었어. 나는 겁안나. 당시 홍위병이 초가할 때 나를 구타했지만, 나는 겁나지 않았어. 지금의 중국인들은 겨우 목숨 하나만 남았지. 하물며 나는 팔십인 걸."

 

아버지가 즉시 노인에게 말했다: "의봉의 말이 맞습니다. 두분 모녀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의봉은 생활을 모두 당신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니 더욱 조심하는 것이 맞습니다."

 

거의 두 시간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장내기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서 강씨모녀에게 말했다: "오늘 너무 유쾌했습니다. 강어르신과 의봉에게 감사드립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저와 백균은 각각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에게는 소우가 있어 모시고 갈 것이고 집도 멀지 않으니, 제가 한걸음 먼저 떠나겠습니다."

 

부친은 그의 손을 꽉잡았고, 서로 몸조심하라고 말했다. 나의봉은 그를 위해 거실의 커튼을 걷었다.

 

헤어지는 순간, 장내기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우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백균, 우리 또 만납시다."

 

모두 그가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했다. 석양은 이 조용한 집에 처량한 황금색을 칠했다. 장내기의 겉옷이 차가운 바람이 흔들렸다. 금방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가한상봉능기일(可恨相逢能幾日), 부지중회시하년(不知重會是何年)"(서로 만나는 게 며칠뿐이라는게 한탄스럽다. 어느 해에나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아버지도 몸을 일으켜 인사를 했다. 헤어질 때 강어르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계속하여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기준을 낮추어가면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시기에, 어르신께서는 여전히 군자의 풍모를 지니시고, 장부의 기개를 지니셨습니다. 이번 만남은 정말 어렵게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해서는 안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특히 당신과 의봉의 이 집이 너무 리스크가 큽니다."

 

강동벽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연이어 말했다: "겁안나, 겁안나. 우리 모두 겁낼 필요없어."

 

나의봉은 굳이 아버지를 대문까지 배웅했다. 석판로를 걸으면서 그녀는 거듭 아버지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만일 장선생께서 마지막에 다시 만나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으면, 어머니는 조금 시간이 흐른 뒤이 다시 두 분을 오시라고 청했을 겁니다."

 

부친은 해명하는 말투로 말했다: "사람이 나이가 드니 적막하신 거겠지요."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나의봉이 반박하여 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가 당신들을 특별히 존경한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마음 속으로 감동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오랫동안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