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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국도(張國燾)의 홍콩세월

by 중은우시 2023. 1. 25.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장국도의 중국역사상 지위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그는 여전히 많은 밀리터리덕후와 역사애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인물이다. 그의 시비공과에 대하여는 후인들의 평가가 아마 더욱 적합할 것이다. 몇가지 점은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1. 장국도는 북경대학 학생으로서, 북경학생연합회 강연부장과 북경학생연합회 총간사를 맡았다. 그는 "5.4"운동의 가장 중요한 학생지도자중 한명이다.

 

2. 장국도는 중국공산당의 주요창시자중 한명이다. 100년전 가흥남호(嘉興南湖)의 작은 배 위에서 강서(江西) 평향(萍鄕) 상률(上栗) 방언을 하는 그는 "제1차대표대회의 폐막선언"을 했다.

 

3. 장국도는 "8.1" 남창의거의 주요발기인중 한명이고 홍군(紅軍)의 주요창시자중 한명이다.

 

4. 장국도는 모택동의 일생에서 가장 위협적인 적수였다. 모택동은 1960년 10월 그를 찾아온 미국작가 에드가 스노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는 1935년의 장정도중 초지(草地)에서 장국도와 투쟁하던 때라고.

 

5. 장국도의 회고록 <나의 회고(我的回憶)>는 내용에 모택동에 대한 여러 불경한 점이 있지만, 여전히 가장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공인되고 있다. 그리고 대륙에서도 이미 출판되고 공개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본인은 1990년대에 북경 부성문(阜成門) 북쪽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했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지수(李志綏) 선생의 책에는 동의할 수 없다.

 

6. 장국토가 장개석에게 투항한 것은 그의 일생에서 최대의 멍청한 결정이었다. 그후 그는 실질적으로 중국의 역사무대에서 물러난다. 중립적으로 얘기한다면 장국도는 이런 점에서 확실히 진독수(陳獨秀)만 못하다. 진독수는 출옥후, 국민당의 부장 자리를 끝까지 거절하고 죽어도 고개는 숙이지 않겠다고 한다. 진독수가 당적을 박탈당한 것은 당내에서 별도로 '트로츠키파'를 결성했기 때문이고, 장국도와 다르다. 그래서 장국도는 확실히 반당(叛黨)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장국도의 반당은 반국(叛國)과는 다르다. 이 점에서 그는 왕정위(汪精衛)와 전혀 다르다. 왕정위는 장개석과의 권력투쟁에서 실패하자, 일본인에게 투항하여, 남경정부를 조직한다. 이것은 매국노의 행위이다. 그러나 장국도가 장개석에 투항할 때는 2차국공합작으로 항일할 때였고, 그때 양당은 우당(友黨)이었다.

 

장국도가 장개석에 투항한 것과 캐나다에서 병사한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기실 장국도는 캐나다로 가기 전에 홍콩에서 오랜 세월동안 배회했었다. 그는 대만과 대륙의 사이를 오갔고, 또한 미국측과도 여러가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비교적 평화로운 캐나다였다. 태평양의 저편에서 밀물과 썰물을 보면서 편안하게 마지막을 보낸 것이다.

 

장국도는 장개석에게 투항한 후, 비록 반공의 방면에서 힘을 쏟기는 했지만, 국민당에서는 항상 그에게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 게다가 사람이 떠나면 차는 식는다. 그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했고, 실적도 전혀 두드러지지 않았다. 장국도는 대만으로 간 후, 잘 지내지 못했다. 오갈 곳이 없어지자 그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9년 겨울, 장국도는 처와 세 아들을 데리고 타이페이를 떠나 홍콩으로 간다. 1951년, 그는 청년당 지도자 사징평(謝澄平) 및 정사원(程思遠)과의 정기적인 좌담회에 가입한다. 나머지 좌담회 성원들은 나몽책(羅夢冊), 동시진(董時進), 오조지(伍藻池), 황여금(黃如今)이다. 얼마 후, 장발규(張發奎), 고맹여(顧孟餘)는 다시 장국도를 끌어들여 <중국지성(中國之聲)> 잡지를 창간하여, 장국도가 사장이 되고, 이미진(李微塵)이 편집장이 된다. <중국지성>은 반장개석의 간행물이다. 1952년 10월 장국도의 <중국지성> 사장직은 장발규의 심복인 임백아(林伯雅)에게 넘어간다. 장국도는 실업자가 된다. 가진 돈이 나날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장국도 부부는 매우 초조해 한다.

 

1952년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그 영향을 받아, 국제황금시장의 가격이 점차 오르고 있었다. 원래 '황금투자'를 전혀 모르는 장국도가 많은 사람들이 황금투자로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역시 마음이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전재산 5000달러를 본전으로 금융시장으로 가서 황금에 투자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고 본전까지 잃게 되어, 한푼도 남지 않는다. 이때부터 일가족은 교사로 있는 장남 장해위(張海威)의 얼마 되지 않는 봉급으로 살게 된다. 일가족이 매일 질낮은 차와 형편없는 식사를 하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외에 다른 두 아들 장상초(張湘楚), 장투천(張渝川)이 공부하는 비용도 들어서, 집안이 얼마나 곤란했을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장국도는 가난뱅이였다. 그리고 이 때의 대륙은 적수인 모택동이 잘나가고 있었고, 천번복지(天飜覆地)의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장국도는 그리하여 대륙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갖게 된다.

 

1953년 봄의 어느 날, 당시 신화사 홍콩분사에서 신문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김요여(金堯如)는 진씨성의 인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진선생은 스스로 진학년(陳鶴年)이라고 했고, 진독수의 아들이라고 했다.

 

쌍방이 만났을 때, 진학년은 이렇게 말한다: "장국도 백부가 최근 몇번 나에게 얘기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조국대지를 해방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주 흥분되었다. 현재 그는 홍콩에 할일없이 머물고 있는데, 실로 너무 적막하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는 북경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다시 당의 영도하에 당과 인민을 위해 건설사업을 하고 싶어한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단지 신화사의 김선생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자 그는 아주 기뻐하면서 당신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북경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지, 모주석에게 그의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김요여는 홍콩분사로 돌아온 후 이 일을 사장 황작매(黃作梅)에게 사실대로 보고한다. 황작매는 북경에 보고한다. 장국도는 밤을 새워 모택동주석에게 보내는 서신을 한통 쓴다. 봉투는 봉하지 않아서, 전달하는 사람들도 읽어볼 수 있도록 했다. 서신의 앞머리에는 "모택동주석 및 유소기 서기, 주은래 총리"라고 적었다. 서신의 내용은 길지 않았고, 대강의 뜻은 이러했다: "당신들과 당중앙의 영도하에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혁명과 신중국건립의 승리를 거두었다. 나는 아주 크게 고무되었고, 깊이 부끄럽게 여긴다. 최근 2,3년간 생각한 후 당의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당신들의 영도하에 당과 인민의 사업에 나의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고, 국궁진췌하여 이전의 잘못을 속죄하고 싶다."

 

10여일이 지난 후, 유소기는 중앙서기처 서기의 명의로 그에게 말을 전한다: "장국도가 돌아오겠다고 하는 것은 좋다. 중앙은 환영한다. 다만, 그는 반드시 중앙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가 역사상 자신의 잘못된 노선을 견지하고, 당중앙에 반대하고, 당중앙을 분열시키고 결국 당과 인민을 배반한 엄중한 잘못에 대하여 깊이 반성해야 한다. 개과천선했다는 보증을 제출하여 자신의 결심을 표시해야 한다." 

 

김요여는 그 말을 전해듣고 바로 사실대로 유소기의 말을 진학년에게 전달한다. 다음 날, 진사공자(陳四公子, 진학년)은 전화를 걸어 김요여에게 말한다: "장백부는 요 며칠 건강이 좋지 못하다. 그는 이 일은 잠시 놔두고 천천히 얘기하자고 했다. 그는 나에게 당신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1953년,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빈곤에 빠진 장국도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에서 찾아온 것이다. 그에게 중국의 당정군지도자의 상황을 알려달라고 하기 위해서.

 

장국도가 중공을 떠난지 15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그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15년전의 상황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중공지도자의 과거를 통하여 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추측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의 관적, 성격, 기호, 교우관계등을 통해 그들의 당과 정부에서의 지위, 관계 내지 그들이 채택할 내외정책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장국도는 건국후에 지도자가 된 절대다수의 고위간부들과 접촉한 바 있고, 오랫동안 함께 일했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부하였었다. 그는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내막과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다. 1953년 7월 15일부터 미국 주홍콩총영사관은 미국 국무부와 중앙정보국의 지시를 받아 전후로 장국도를 20여차례 방문하여, 중국공산당지도자들에 대하여 물어본다.

 

1958년, 중국대륙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시작된다. 일찌기 급진과격파였던 장국도는 이에 고무되어 다시 이 운동에 투신할 생각을 하고, 중국정부와 연결할 생각을 한다. 그해 10월, 그는 사람을 보내 중공당국에 중국정부를 위하여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그리고 그에게 생활보조금을 줄 것도 요청한다. 장국도의 요구사항은 내부정황간보로 <장국도최근상황에 관한 간보(簡報)>의 형식으로 모택동에 보고된다. 모택동은 이렇게 지시한다: "장국도에게 그와 미국인의 관계를 끊도록 권해야 한다. 이 것을 할 수 있다면, 개인생활방면의 보조도 고려할 수 있다. 모주(毛注)" 장국도가 대륙으로 돌아가는 일은 다시 한번 흐지부지된다.

 

1961년경, 미국캔자스대학은 사람을 장국도에게 보내어 그에게 회고록을 쓰도록 권한다. 장국도는 기꺼이 응한다. 4년후, 장국도는 마침내 그의 회고록 <나의 회고>를 완성한다. 전체 책은 3권으로 약 100만자였다. 이 4년의 기간동안, 캔자스대학은 매월 그에게 2000홍콩달러의 비용을 제공했고, 이 책의 영문판권을 획득한다. 다만, 실제로 장국도가 원고를 완성했을 때, 비용이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홍콩의 <명보월간>이 중문판권을 구매한다. 장국도는 비로소 상당한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다.

 

1966년, 대륙에서 '문화대혁명'이 발발한다. 나중에 홍콩에까지 혁명의 불길이 파급된다. 옛날의 전우와 부하들의 참상을 보면서 장국도는 경궁지조(驚弓之鳥)처럼 하루종일 불안 속에서 지낸다. 안전을 위하여 그는 처와 상의하여 다시 일가족이 홍콩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낯선 나라 캐나다로 간 것이다.

 

1974년 76세의 장국도는 캐나다국적을 정식으로 신청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캐나다는 나의 제2의 고향이다. 나는 이 토지를 깊이 사랑한다. 아주 깊이, 아주 깊이." 이어서 그는 담담하게 보충했다. "정치는 일찌감치 내가 손을 씻었다. 현재 나는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장국도이다. 그의 이 말은 분명히 마음 속으로부터 나온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