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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1402

장헌충(張獻忠)의 말로비가(末路悲歌) 글: 장위국(張偉國)​1​숭정14년(1641년) 장헌충은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양왕(襄王) 주익명(朱翊銘)을 포로로 잡아 죽인 후, 그는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를 돌아다니며 3개성의 많은 부현(府縣)을 점령하고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장헌충은 강남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고자 하지 않고, 천부지국(天府之國) 사천(四川)으로 가서 패업을 이루고자 하여, 사천으로 들어갈 것을 결정한다. 숭정17년(1644년) 봄, 장헌충은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육로와 수로로 진격하며 사천으로 향한다. 사천의 명군은 실력이 약했고, 게다가 이때는 천하가 대란에 빠져 있어서, 장헌충의 부대는 무인지경으로 진격한다. ​이월에는 만현(萬縣)을 점령하고, 육월에는 부릉(涪陵)을 점령한다... 2024. 11. 24.
주원장(朱元璋)은 황제에 오른 후 형제자매와 그 자녀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글: 소도지풍(小島知風)​주원장은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거지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주원장을 얘기하게 되면 그가 공신들에게 아주 잔혹하게 대했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친척들에게는 아주 잘 대해주었다. 특히 그의 형제자매와 그 후손들에 대해서는 아주 잘 대해주었다. ​기실 주원장의 원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이다. 가족은 안휘 호주(濠州, 지금의 봉양)의 빈민가정에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은 원래 이름이 주오사(朱五四)이다. 나중에 주원장이 명나라황제에 오른 후, 주오사를 인조순황제(仁祖淳皇帝)로 추존한다. 그리고 부친의 이름 주오사가 문아하지 못하다고 여겨 주세진(朱世珍)으로 개명한다.​주원장의 가족은 경제적 여건이 열악했다. 그러나 주원장의 부모는 자식을 많이 낳았다.다자다복의 이념하에 .. 2024. 11. 24.
황위계승전: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글: 애역사(愛歷史)​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은 표준적인 정치기기이다. 그의 모든 동작은 대수강산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후계자의 선정을 포함해서. 양광(楊廣)이 후계다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군공(軍功)이 컸기 때문이다.​581년 이월 십사일, 양건은 북주정제(北周靜帝) 우문천(宇文闡)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대수왕조(大隋王朝)를 건립한다. 다음 날 양견은 독고가라(獨孤伽羅)를 황후로 앉히고, 적장자(嫡長子) 양용(楊勇)을 황태자(皇太子)로 세운다. 대수의 통치질서와 후계구도가 신속히 확정된 것이다.​이십오일, 양견은 종실을 왕에 봉한다: 동생 양혜(楊惠)를 등왕(滕王)으로, 양상(楊爽)을 위왕(衛王)으로 봉하고, 아들 양광(楊廣)은 진왕(晋王)으로, 양준(楊俊)은 진왕(秦王)으로, 양.. 2024. 11. 24.
누르하치의 아들 16명의 서로 다른 삶... 글: 한래독사서(閑來讀史書)​누르하치는 후금정권의 건립자이고, 청왕조의 창업자이다. 그는 일생동안 16명의 아들을 두었다(기록상). 황팔자 홍타이시(皇太極)가 황제에 오른 외에 3명은 철모자왕(鐵帽子王)이 되었고, 4명은 선종(善終)하지 못했다.​황장자(皇長子) 추잉(褚英, 1580-1615)​원비(元妃) 퉁자씨(佟佳氏) 소생이며, 19살때, "홍바투루(洪巴圖魯)"의 칭호를 얻고, 패륵(貝勒)에 봉해진다. 나중에 다시 "아르하투투먼(阿爾哈圖土門)"에 봉해지고, 명을 받아 국정을 관장한다.​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즉위후, 나와 사이가 나쁜 동생들과 대신들을 주살해버리겠다." 그리하여 형제와 "개국오대신(開國五大臣)"으로부터 원한을 산다.​1613년 향을 사르고 대신과 형제를 저주했다고 .. 2024. 11. 21.
당현종(唐玄宗)의 말년은 얼마나 비참했는가? 글: 연곽(煙郭)​757년, 안록산(安祿山)은 대당제국의 장안을 점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당한다; 반군내에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당숙종(唐肅宗) 이형(李亨)은 병력을 모아 일거에 장안과 낙양을 수복한다.​이는 이형에 있어서 당연히 아주 큰 기쁜 일이다. 양경을 수복하였으므로 대당중흥의 혁혁한 공로는 '임의로' 칭제한 황제인 그에게 무상의 위망을 수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외병변(馬嵬兵變)이후 이형이 이융기를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무(靈武)에서 황제에 오른 것이다. 당현종 이융기는 '퇴위당하여' 태상황이 된다.​비록 사후 이융기가 이형이 '임의로 칭제한' 위법행위를 따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이형의 황제승계의 합법성을 인정해주었지만, 이.. 2024. 11. 17.
원세개(袁世凱) 칭제(稱帝) 막후의 몇몇 추동자들... 글: 소전유(蘇全有)​1915년 12월 12일, 원세개는 소위 민중권진서(民衆勸進書)를 받아들여, 등극을 선포한다. 역사에서 홍헌황제(洪憲皇帝)라고 불리게 된다. 1916년 3월 22일, 원세개는 어쩔 수 없이 하야한다. 이렇게 83일간의 황제생활은 끝이 난다. 그리고 6월 6일 요독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원세개는 모략이 비범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왜 그가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역사의 조류를 거슬러 황제에 올랐을까? 여기에는 원세개 본인의 원인외에 나머지 몇 사람이 막후에서 부추긴 것도 있었다. 그 요소를 분석해보지 않을 수 없다. ​원세개는 임종전에 힘들여 네 글자를 내뱉는다: "그가 나를 해쳤다(他害了我)". 그렇다면 여기의 "그(他)"는 도대체 누구일까?​원씨가족들은 원세개가 죽기 전에 말한 "그가 .. 2024.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