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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孫中山)이 청왕조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by 중은우시 2025. 5. 12.

글: 풍희건(馮睎乾)

얼마전에 한 독자가 서신을 보내, 아주 재미있는 이슈를 물어보았다: "최근 Threads에 많은 타이완사람들이 말하기를, 청왕조를 무너뜨린 사람은 손중산이 아니라 원세개(袁世凱)라고 했다. 그들이 내놓은 증거는 청왕조의 퇴위조서는 원세개에게 주는 것이었지, 손중산에게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손중산은 194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국민당에 의해 '국부'로 받들어졌으며, 그 이전까지는 '국부'라는 말이 없었다.

청왕조를 무너뜨린 사람에 대하여 나는 어려서부터 손중산선생이라고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학교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도 거기에 이의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청왕조이후, 원세개가 확실히 잠시동안 황제를 지냈다. 현재 이런 주장이 나오니 나의 생각도 약간 동요된다. 설마 나는 정말 오랫동안 '세뇌'당해온 것이란 말인가?"

"누가 진정 청왕조를 무너뜨린 사람인가?"라는 점을 검토하자면 "무너뜨리다(推飜)"의 뜻부터 정의해야할 것같다. 무창의거(武昌義擧)는 손중산이 기획한 것이 아니고, 사건발생당시 그는 중국에 있지 않았고, 미국의 Denver에 있었다. 그는 이틀 후에 신문을 보았고, 비로소 "무창을 혁명당이 점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상세한 내용은 손문의 <건국방략지일:심리건설>을 보라). 만일 '무너뜨리다'는 것의 의미를, "직접 지휘하고, 직접 배치하고, 직접 독전한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손중산은 확실히 직접 청왕조를 무너뜨린 사람이 아니다.

당시의 국면을 보면, 진정 위기에 빠진 만청왕조를 무너뜨릴 실력이 있던 사람은 바로 노모심산(老謀深算)의 원세개였다. 그의 수하에는 아주 강력한 북양군(北洋軍)이 있었고, 내각총리대신으로 있었으며, 북방의 정권은 거의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다. 청나라조정은 그로 하여금 국면을 수습하도록 하였는데, 그는 암중으로 혁명당과 연락했다. 혁명당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역량만으로는 북양군을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하여 갖은 방법으로 원세개를 회유하고자 했다. 노간거활(老奸巨闊)의 원세개도 공화(共和)에 찬성한다. 다만 내놓은 조건은 자신이 총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손중산이 중국으로 돌아오고, 임시대총통에 선출된다. 청나라조정은 원세개가 이미 마음을 바꾸었고, 대세는 기울었다는 걳을 알았다. 그리하여 퇴위조서를 반포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가 전권을 가지고 임시공화정부를 조직하고, 민군과 통일방법을 협상한다." 손중산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실제로 그는 타협할만한 실력이 충분치 못했다), 고분고분 임시대총통의 자리를 원세개에게 넘긴다.

엄격하게 말해서, 청나라조정의 퇴위조서는 원세개에게 퇴위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로 하여금 임시공화정부를 조직하여 혁명당과 협상하라고 했을 뿐이다. 나중에 그는 시류를 역행하여 황제를 칭하기까지 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의 호칭은 청나라황실로부터 넘겨받은 것이지, 민국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라고 자랑했다.(그 말은 유성옹(劉成禺)의 <홍헌기사시(洪憲紀事詩)>를 보라). 이런 말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청왕조를 무너뜨린 것이 오로지 원세개의 공로인가? 손중산은 그저 무임승차한 사람일 뿐인 것인가? 확실히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본다. 그러나 실제로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해혁명은 원세개가 없었으면 성사될 수 없었다. 다만 손중산이 없었더라면 아마 신해혁명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손중산이 십여년, 이십년동안 혁명을 선전하고, 흥중회(興中會), 동맹회(同盟會)를 조직하고 도처에서 강연하고 모금하고 다니면서(비록 아주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하루종일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쳤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격려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신해혁명이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어 수도거성(水到渠成)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중산은 나팔을 분 정신적 지도자이다. 도처를 다니면서 호소했고, 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그러나 진정 혁명의 과실을 거둔 사람은 등뒤에서 청왕조에 칼을 꽂은 원세개였다. 그래서 만일 "누가 진정으로 청왕조를 무너뜨린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할 수 밖에 없다: 한명은 몽상가이고, 한명은 실력파이다. 이 두 사람중 그 어느 한 명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화민국국부"라는 칭호에 관하여 확실히 1940년에 정식으로 국민정부가 확립했다. 다만 이전에는 '국부'라는 칭호가 없었는지에 관해서 보자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손중산이 1925년 사망했을 때, 예군총사령(豫軍總司令) 번종수(樊鍾秀)가 일찌기 거대한 소화횡액(素花橫額)을 보냈고, 거기에는 "국부(國父)"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를 보면, "국부"라는 존칭은 민간에서 이미 나타났다. 단지 1940년에 바로소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간단하게 이 독자가 스스로 '세뇌'당하지 않았는지 의심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해보겠다. 왜 우리는 어려서 배운 역사과목에서 모두 청나라를 무너뜨린 공로를 거의 모두 손중산 한 사람에게 귀속시켰을까? 이 현상의 배후에는 기실 역사교육의 한계과 정치선전이 교차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국민정부는 손중산을 "국부"로 모셨다. 당연히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동일성인식을 건립하려 할 뿐아니라, 자신의 집권권위도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학교는 교육의 편의를 위해, 최대한 역사서술을 간략화한다. 신해혁명을 언급할 때, 손중산이라는 '주인공'을 강조하고, 원세개등 나머지 사람들은 담화(淡化)시킨다. 심지어 일부 우발적사건(예를 들어 서징(瑞徵)의 도망)의 실제영향은 학생들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만든다.

이는 고의적인 '세뇌'는 아니라고 할 것이고, 단지 역사교육의 기초단계에는 비교적 간략하게 언급할 수밖에 없고, 심도있게 각종 세부사항은 논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단 왕정위(汪精衛)를 얘기하면 "한간(漢奸)"이라고 하게 되고, 손문을 얘기하면 "국부"라고 얘기하여 마치 무대 위에서의 고착된 이미지와 같게 되었다.

장애령(張愛玲)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역사를 쓸 생각이 없다. 또한 역사학자들이 어떤 태도를 지녀야할 것인지에 대해 평론할 자격도 없다. 단지 개인적으로는 항상 그들이 별로 관련없는 일들도 더 많이 얘기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도 어렸을 때 역사과목을 들을 때, "상관없는 일"을 더 많이 듣고, 로리타컴플렉스의 손중산과 오스카 가오루(大月薰)의 사랑, 강유위(康有爲)가 회춘을 위하여 고환을 잘라버린 일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더욱 진실하게 근대역사명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쉬운 일은 이런 '상관없는 일'들을 초중고등학생들 앞에서 얘기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라는 것은 평생 배워야 하고, 심지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갱신'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나이에 아마도 당신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역사는 영원히 불변하는 상식이 아니다. 역사는 단순한 당대사가 아니다. 더더욱 당신 개인의 사상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