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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거정)

장거정(張居正)의 시대: 정치상의 대신(大神), 문화상의 거인(巨人)

by 중은우시 2025. 5. 12.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23살이 되는 해에 거인(擧人) 장거정은 과거(科擧) 회시(會試)에 참석하기 위해 경성으로 간다.

이번 시험에 대하여, 그는 자신만만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유명했던 그는 일찌기 12살때 고향인 호광(湖廣) 형주부(荊州府)에서 동시(童試)에 참가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6살때는 향시를 통과하여 소년거인이 되었다.

비록 3년전에 진사시험에 참가했다가 낙방하긴 했으나, 그러나 자신만만한 장거정의 내심에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

천하의 학자(學子)들이 같은 무대에서 실력을 겨루는데 있어서, 그는 항사 자신감이 넘쳤다.

과연 이번 과거시험에서 그는 이갑제구명진사(二甲第九名進士)로 합격한다.

이 해는 바로 가정(嘉靖) 26년(1547년)으로 송인종의 가우(嘉祐) 2년(1057년)과 나란히 과거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낸 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2월부터 시작하여, 천하에서 온 4,300명의 최고수준의 학자들이 경사에 모여서 회시에 참가한다. 3월에 이르러, 잔혹한 전시(殿試)의 선발을 거쳐, 모두 300명이 두각을 드러내 합격한다.

이어진 수십년동안 이 300명중에서 많은 경국대재(經國大才)가 배출된다. 그들은 정치, 경제와 문화에서 대명의 사회를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가정26년 진사방의 신화를 창조한다.

이들 중에서 일갑삼명(一甲三名)은 이러하다: 장원(狀元) 이춘방(李春芳), 방안(榜眼) 장춘(張春), 탐화(探花) 호정몽(胡正蒙). 이들 가장 성적이 좋았던 3명중에서 장원을 차지한 이춘방은 나중에 장거정과 함께 내각을 조직하여 대명의 수보(首輔)가 된다.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태평재왕(太平帝王)"이다.

함께 진사가 된 사람들 중에서 역사의 향방에 영향을 끼친 명인들이 많았다: 대명의 제일경한(第一硬漢, 경한은 사나이라는 의미임) 양계성(楊繼盛), 대명의 "후칠자(後七子)"의 영수 왕세정(王世貞), 항왜명장(抗倭名將) 왕도곤(汪道昆), 일대제사(一代帝師) 은사담(殷士儋)....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정26년은 명나라때 인재가 대폭발한 한 해였다.

1

지금 사람들이 가정26년의 용호방을 주목하는 이유는 대체로 장거정 때문이다. 다만 당시에 가장 먼저 천하에 이름을 떨친 인물은 "경한" 양계성이었다.

진사에 합격한 그해에 32살의 양계성은 나라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 결심한다.

그의 직업생애의 최전성기는 이 충신이 "노매엄숭(怒罵嚴嵩, 엄숭을 욕하다)"모델을 열었다.

그때는 진사에 합격한지 6년후이다. 가정32년(1553년), 양계성은 막 적도(狄道, 지금의 감숙성 임조)에서 북경으로 불려왔다. 그전에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인 그는 대장군(大將軍) 구란(仇鸞)의 마시(馬市)를 열자는 제안에 반대하다가, 그로부터 보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변방의 하급관리로 좌천당한다.

얼마 후, 득세한 구란이 당시 조야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육병(陸炳)과 엄숭에게 밉보여서, 권력투쟁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구란이 패망한 후, 그를 탄핵하는데 공로가 있던 양계성은 다시 기용된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양계성은 특별히 3일간 목욕재계한다. 반복하여 이점과 폐해를 생각한 후, 그는 가정제에게 <청주적신소(請誅賊臣疏)>를 올린다. 이는 언사가 격렬한 상소문이다. 양계성은 거기에서 엄숭의 "오간십대죄(五奸十大罪)"를 열거하며 황제에게 이런 간적을 엄중하게 처벌하도록 청한다.

양계성에 따르면, 엄숭은 조정에서 수십년간 있으면서, 전임 내각수보 하언(夏言)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외에, 황제의 사방주위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 놓았다. 원래 국가를 위하고, 황제를 위하는 입장에서 양계성은 기꺼이 대명의 열사가 되고자 한다. 그는 단지 황제가 영명하여 신하의 간언을 들어주기를 원할 뿐이라고 말한다.

양계성은 통쾌하게 엄숭을 욕했지만, 부주의로 가정제를 포함한 조정신하들에게도 미움을 사게 된다.

가정제의 눈에 이 <청주적신소>에서 욕한 것은 엄숭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혼군(昏君)만이 주변에 이런 간신배 소인을 두게 되기 때문이다.

양계성의 5천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다 읽은 후에, 가정제는 혈압이 치솟았다. 엄숭이 손을 쓰기도 전에, 가정제가 명을 내려, 양계성을 감옥에 가두고, 곤장 100대에 처한다.

황제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엄중하게 처벌하자, 조정은 난리가 난다.

금의위의 육병도 양계성이 열거한 "간녕(奸佞)"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형을 집행하기 전에, 육병은 부하에게 반드시 양대인의 목숨은 부지시키도록 명한다.

당시, 양계성의 친구가 염사담(蚺蛇膽, 비단뱀의 쓸개)를 구했다. 그에게 이것을 먹으면 치명적인 고문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계성은 바로 거절한다: "초산자유담(椒山自有膽), 하필염사재(何必蚺蛇哉)?(초산은 양계성의 호임. 나에게 쓸개가 있는데 왜 하필 비단뱀의 쓸개를 먹겠는가)"

역사기록에 따르면, 100대의 곤장을 맞은 후, 양계성은 "두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하나같이 되어 앞뒤로 갈 수가 없었고; 부은 곳이 단단하기가 나무와 같아 굽히거나 펼 수도 없었다. 손으로 두 사람이 부축하여 힘을 다해서 발을 땅에 닿지 않게 하면서 감옥에 집어넣었다."

감옥에서 그는 상처가 발작해서 고통으로 한밤중에 잠이 깬다. 그러나 그는 찾잔을 깨서 그 조각으로 썩은 살을 도려낸다. 살을 베어내니, 근육이 나타났고, 그는 다시 손을 잘랐다.

한켠에서 그를 감시하던 옥졸은 놀라서 혼비백산한다. 그러나 양계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2

그렇지만, 엄숭은 여전히 양계성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엄숭의 요구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왕학익(王學益)은 윗선의 지시를 날조하여 교형(絞刑)으로 양계성을 하루빨리 처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증거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양계성이 하옥된 동안, 그의 오랜친구, 동료들은 그를 구해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중 가장 크게 힘쓴 사람이 바로 양계성과 함께 과거에 합격한 왕세정이었다.

가정26년의 진사들 중에서, 22세의 왕세정은 나이가 가장 어렸고, 집안환경이 가장 좋았다. 그는 강남의 명문집안인 "태창왕씨(太倉王氏)"출신으로 조부인 왕탁(王倬), 부친인 왕여(王忬)는 모두 일대명신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운다.

왕씨부자는 양계성이 엄숭을 탄핵하다가 중벌을 받는 것을 보고, 내심으로 분개하고 비통해 한다. 양계성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왕세정은 같이 진사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그를 구해주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러나 왕세정의 노력으로도 그의 목숨을 구해낼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로 인하여 더욱 큰 댓가를 치르게 된다.

엄숭 부자는 손바닥으로 천하를 가릴 권세를 지녔다. 비록 육병이 양계성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양계성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한다. 형을 받기 전에, 그의 곁에는 처인 장씨외에 왕세정이 있었다.

왕세정을 위로하기 위해, 양계성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유언을 남긴다: "원미(元美, 왕세정의 자는 원미임), 이럴 필요없네, 죽어야할 곳에서 죽는 것이니, 죽는게 두려울게 뭐 있겠는가?"

말을 마치고 양계성은 목을 내밀어 죽음을 맞는다. 향년 40세이고, 가정34년(1555년)의 일이다.

친구가 떠나자, 왕세정은 그를 잊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큰 비통은 그 뒤에 찾아온다.

당초 양계성을 마음대로 죽여서 여러 신하들의 불만을 사자, 엄숭은 더 이상 서생의기(書生意氣)의 왕세정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러나 엄숭은 고개를 돌려 당시 조정에서 변방군무를 감독하던 왕세정의 부친 왕여를 노려, 심복들로 하여금 그를 모함하여 관직을 잃게 만든다.

왕세정

마침 타타르부(韃靼部)가 다시 장성을 넘어 경사를 위협하자, 소식을 들은 가정제는 직접 왕여에게 성지를 내린다: "여러 장수를 참했는데, 군령을 책임지는 자를 어찌 가볍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부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왕세정은 관직을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동생 왕세무(王世懋)를 데리고 엄숭의 대문앞에 무릎을 꿇고 각로(閣老)께서 은전을 베풀어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엄씨부자는 듣지 못한체 하고, 심지어 왕세정이 자신의 대문앞에서 혼절한 것을 보고서도 "소각로(小閣老)" 엄세번(嚴世蕃)은 가솔을 시켜 두 사람을 쫓아내, 문앞을 깨끗이 정리한다.

부친을 구할 기회를 잃은 왕씨형제는 결국 부친 왕여의 유골을 받아들게 된다.

왕세정은 분노를 금치 못했고, 남은 여생동안 엄씨부자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3

관직에서 실의한 왕세정은 피로한 몸을 이끌고 문단(文壇)을 전전한다.

과거에서 뛰어난 실력을 드러냈던 재주있는 인물로서 왕세정의 글은 당시에 이미 유명했다. 일찌기 부친에게 일이 터지기 전에, 그는 이반룡(李攀龍), 오국륜(吳國倫), 사진(謝榛), 서중행(徐中行), 양유예(梁有譽), 종신(宗臣)등 6명과 함께 경사에서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문화복고운동을 펼친다. 이들은 나중에 대명문단의 "후칠자"로 불린다.

그들이 문화복고운동에서 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대각체(臺閣體)"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때 과거에서 진사를 뽑기 위하여 시험생들에게 요구하던 답안지의 문체이다. 관방의 규정에 따르면 생원들이 답안지를 작성할 때는 반드시 "대각체"를 사용하여 공정(工整)해야 한다. 만일 규정에 따라 작성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적었더라도, 낙방하게 된다.

"대각체"의 출현은 일정한 정도로 서체예술의 자고이래의 풍격을 말살한 것이었다.

명나라 대각체의 대표작 <경재잠(敬齋箴)>

그리하여, 이런 "천인일면(千人一面), 일자만동(一字萬同)"의 문체에 대하여, 왕세정은 재사(才思)를 결합한 창작방법론을 제시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즉재지용(思即才之用), 조즉사지경(調即思之境), 격즉조지계(格即調之界)" 만일 한 학자가 나라를 이롭게 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반드시 그의 재능을 발휘하는데 이런 저런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재사결합의 법을 글의 구주형식, 문채수사에도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게 하여 작품에서 인성이 빛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이다.

그러나, 왕세정은 처음에 나머지 6명과 잘 알지 못했고, 내왕도 없었다. "후칠자"의 결연은 이선방(李先芳)이라는 시단의 괴수(魁首)에서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장원 이춘방과 글자 한자밖에 차이나지 않는 이선방도 역시 가정26년의 진사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나이가 비슷했고, 합격할 때의 나이가 37살, 38살이었다.

합격하기 전에 이선방은 이미 시단에서 여러 해동안 활약했다. 어떤 소문에 따르면, 그는 16살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합격하기 전에, 시로 제로(齊魯)에 이우린(李于麟, 즉 이반룡)보다 먼저 이름을 알렸다." 합격후에는 경사에서 이부(吏部)의 임명을 기다리는 동안 , 이선방은 이반룡등과 "결사를 맺고 시를 지었다."

왕세정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일찌기 진사에 합격했을 때 알고 있었다. 같이 합격한 사람중에 산동에서 온 이자(李子, 즉 이선방)가 있으며, 시를 쓰는데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합격후에 왕세정은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아 이선방과 교류하게 된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왕세정은 결국 이반룡등과 함께하고, "문(文)은 서경(西京)이하, 시(詩)는 천보(天寶)이하는 인정하지 않는다(不齒)"는데 공감한다.

나중에 이선방이 남하하여 신유지현(新喩知縣, 신유는 지금의 강서성 신여)이 되자, "칠자파(七子派)"의 소집인은 점차 왕세정으로 바뀐다. 이때부터 그의 지위는 이십여년간 독보적이 된다.

다만, 왕세정은 시종 엄씨부자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다.

시부가 성행한 "후칠자"중에서, 그는 문학, 희곡, 소설이나 사전(史傳)의 창작에서 모두 '엄씨부자'를 끌어내어 공격했고, 마음 속의 울분을 배설했다.

그리하여, 후세에 사람들이 <금병매>의 작자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을 억지로 왕세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세번의 어릴때 이름이 "동루(東樓)"인데, <금병매>에서 관료, 악패, 부상의 신분을 모두 지닌 대관인의 이름이 "서문경(西門慶)"이기 때문이다. 동루는 서문과 마주하는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이런 논쟁은 지금까지도 답안을 찾아내지 못했다. "난릉소소생"의 진실한 신분에 관한 기록은 "입공(廿公)"이라는 사람이 <금병매>에 써준 발문(跋文)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세묘(世廟, 가정)때 한 거공(巨公)의 우언(寓言)이다"

비록 <금병매>의 창작과 왕세정의 관계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또 다른 작품 <명봉기(鳴鳳記)>라는 전통 곤곡(昆曲)의 극목(劇目)은 그와 관련이 있다.

이 대극에서, 왕세정은 10명의 엄숭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쌍충팔의(雙忠八義)"로 칭하며, 심지어 극본에 대량의 하언(夏言), 서계(徐階), 양계성, 추응룡(鄒應龍), 조문화(趙文華)등 가정조때의 핵심인물들이 들어 있고, 권력투쟁의 노선에 따라 엄숭등 가정제때의 간당의 추악한 모습을 폭로하고 있다."

<명봉기>는 가정이후인 융경(1567-1572)때 완성되었는데, 천하를 돌아보면, 왕세정이나 그의 문하인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전황제시절의 옛일을 가지고 창작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4

문학창작에 있어서 가정26년의 진사들 중에서 만일 가장 "천짐저창(淺斟低唱, 술을 천천히 마시면서 노래부르다)"에 능한 사람을 꼽자면, 아마 왕세정이라고 하더라도, 휘상세가(徽商世家) 출신의 왕도곤을 2등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1등이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후칠자"가 문화복고를 이끌 때, 왕도곤은 고향에서 "신안시파(新安詩派)"를 성립한다.

당시, 왕도곤의 고향인 휘주(徽州)에는 사람들이 외지로 나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삶을 영위하는 주요수단이었다. 자본주의의 맹아와 더불어, 휘상들은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상옹대반학시옹(商翁大半學詩翁)"이었다. 상인들은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이들 휘상세가에서는 시를 논하고 시를 배우는 것이 성행하게 된다.

소수의 부용풍아(附庸風雅)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휘상은 이런 경로를 통해, 자신의 가족을 계층의 말류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후대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집안을 빛냈다.

그래서, 과거에 합격한 인재인 왕도곤이 나서자, 가족중 글을 아는 왕도회(汪道會), 왕도관(汪道貫)등이 바로 호응해서 시를 논하게 된다.

친구이자 동료인 왕도곤을 띄워주기 위해서, 왕세정은 문괴(文魁)의 명의로 삼오양절(三吳兩浙)의 문인아사를 모아서, 휘주에서 집단으로 교류회를 가진다. 자신의 바닥에서 왕도곤은 지방에서 유명한 재자들을 불러모아 대결을 벌인다. 쌍방은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서로 상대의 장점을 받아들여 보완한다. 이는 당시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졌다.

왕도곤은 글로도 명성을 떨쳤지만, 곡예(曲藝)창작에서도 마찬가지로 뛰어났다.

송휘종 시대에 흥성하기 시작한 "남희(南戱)"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곡성(曲聖) 위량보(魏良輔)의 개선을 거쳐, 점차 잡극의 주류인 희곡, 곤강(昆腔)으로 발전한다.

명나라초기 이래의 문화고압아래에서, 잡극의 창작은 보편적으로 "신선", "효자", "절부(節婦)"의 3가지 주제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현실에 관심을 두는 작품은 드물었다. 왕도곤은 고대에 실의한 귀족이나 고급문화인들에게서 시작하여, 이들 인물을 둘러싸거나 혹은 "유운표묘(流雲縹緲), 조래기도명멸(朝來幾度明滅)"의 신화적인 꿈의 경지를 전개하거나, 혹은 "무단야득(無端惹得), 야득풍류황(惹得風流況)"의 궁정,관료사회를 보여주었다.

<오호유(五湖遊)>에서, 왕도곤은 춘추시기 범려(范蠡)가 월왕 구천을 보좌한 후 공성신퇴(功成身退)하여 서시와 함께 배를 타고 은거하는 이야기를 썼다. <낙수비(洛水悲)>에서는 그는 다시 조식(曹植)이 봉지로 쫓겨돌아와, 낙신을 만나 창연약실(悵然若失)하는 것을 그렸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가 관료사회에서 느낀 염량세태에 깨달음을 얻어 본질을 추구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아마도 왕도곤에 있어서, 과거가 그에게 가져다준 신분의 변화는 그저 <오호유>에서 범려의 "도래대몽(都來大夢)"인지 모른다. 일세의 연운(煙雲)을 거친 후에는 결국 화위오유(化爲烏有), 즉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5

건공입업(建功立業)은 왕도곤이 범려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시를 쓰고 극을 짓는 신분외에 그는 유명한 장수이기도 하다.

왕도곤이 생활한 가정, 융경, 만력(萬曆)시대는 바로 왜구해적집단이 동남연해를 침범하는 전성기로,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의오현령(義烏縣令)으로 있을 때, 왕도곤은 항왜명장 척계광(戚繼光)으로 하여금 현지의 향병을 모집하여, 단련(團練)을 조직하여, 바다로 나가 해적을 막도록 시작한다. 이 부대는 나중에 척계꽝의 훈련으로 그 이름도 유명한 "의오병"이 된다. 가정연간 항왜, 만력연간 항왜원조(임진왜란, 정유재란)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오병의 조직으로 왕도곤은 척계광과 깊은 우의를 쌓는다. 척계광은 그보다 3살이 어렸고, 두 사람은 일생에서 거의 1/4의 시간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가정41년(1562년), 왕도곤은 이미 복건병비도(福建兵備道)로 승진했다. 왜구의 침입을 맞아, 영덕(寧德), 복청(福淸)등서 위급한 구원요청이 온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척계광이 8천의 병사를 이끌고 신속히 지원갔다. 그후 척계광이 총사령관이 되고, 왕도곤은 그의 참모가 되어 두 사람이 천의무봉으로 전장에서 협력했다.

전투개시전에, 두 사람은 특별히 패검을 꺼내어 둘로 나눈다면, 복건군민에게 부끄럽지않겠다고 맹세한다.

3년후, 평왜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왕도곤은 기뻐하며 척계광에게 10수의 <척계광군입민파적절구>를 지어준다. 그중의 한 수는 이러하다:

진천부고옹천군(秦川負固擁千群)

한절정사하칠애(漢節征師下七閡)

서거불수사마격(西去不須司馬檄)

남래지시복파군(南來知是伏波軍)

남정북전의 전공으로 왕도곤은 가정후기에 제국의 중앙으로 진입하여 병부로 들어가 병부좌시랑이 된다.

6

이때 엄숭의 하야와 더불어, 대명의 정국은 천번지복의 변화가 발생한다.

왕도곤과 같이 과거에 합격한 장거정은 이미 내각수보 서계와 관계를 맺어, 관직이 평보청운(平步靑雲)한다. 서계의 추천으로 장거정은 유왕부(裕王府)에 들어갔고, 그는 미래 대명천자의 시독학사(侍讀學士)가 된다.

당시 유왕부로 들어가, 유왕 주재기(朱載)를 가르친 사람으로는 장거정과 같이 과거에 합격한 은사담(殷士儋)이 있었다. 그러나 장거정이 이를 기반으로 향후 승진의 발판으로 삼은 것과 달리, 은사담은 훨씬 더 본업에 충실했다.

유왕에게 수업하는 동안, 제로에서 온 은사담은 강직했다. 유왕을 대할 때,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고분고분할 때, 오직 그만이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황실에서 규정한 여름, 겨울휴가기간에도 그는 유왕에게 "사시무철(四時無輟)"할 것을 요구했다. 다만 엄격한 교육의 배후에는 은사담도 장기간 "이룡불가상현(二龍不可相見)"의 갈등에 빠져있던 유왕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있었다.

이 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여러 해 이후 황제가 된 주재기는 여전히 그에게 감사했다.

가정45년(1566년), 지속적으로 단약을 복용하던 가정제가 붕어한다. 삼황자인 유왕 주재기는 많은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대명의 새로운 황제에 오른다. 그가 바로 융경제(隆慶帝)이다.

가정제가 붕어한 후, 아직 유왕부에 남아 있던 장거정은 '백락(伯樂)' 서계의 부름을 받아 급히 유조(遺詔)를 초안한다. 그후 유왕의 옛신하라는 신분으로 장거정은 내각에 들어가 대명의 의사결정층에 진입한다. 서계는 새로운 황제가 그에 대해 전혀 호감이 없어서 융경제가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각에서 쫓겨나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서계가 떠난 후, 대명의 내각수보 자리는 비어있게 된다. 융경제의 직접 지명으로 가정26년과거의 장원인 이춘방이 두각을 나타내 내각수보에 오른다.

융경제가 즉위하기 전에 이춘방은 장원의 신분으로 오랫동안 가정제의 곁에 있었다. 가정제는 도교수행을 좋아하여, 대신들이 황제를 위해 청사(靑詞)를 잘 써주는 것이 승진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이춘방은 장원으로써 청사를 잘 썼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가정제는 스스로의 법호를 "천지조수(天池釣叟)"라 할 때, 그는 황제에게 두 구절의 찬미하는 시를 써서 바친다: "공극중성이옥이(拱極衆星爲玉餌), 현공신월작은구(懸空新月作銀鉤)"

이춘방은 뛰어난 인재였다. 몇 글자를 가지고 여러 별들이 달을 떠받드는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가정제도 이에 크게 만족한다.

이로 인하여 이춘방은 "자학사지병정(自學士至柄政), 범육천(凡六遷), 미상일유정추(未嘗一由廷推)"(학사로부터 내각수보까지 6번 승진하면서 한번도 내각의 추천으로 인한 경우가 없었다). 즉 모두 황제의 총애를 받아 계속 승진했다는 것이다.

7

그러나, 융경제 시대가 되면서 이춘방의 운은 다하게 된다.

각신중 장거정과 고공(高拱)은 비록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이었지만, 두 사람의 입장은 이춘방에 대하여는 기이할 정도로 일치했다: 이춘방은 내각수보에 적합하지 않다.

같은 해에 진사가 된 정분으로 장거정은 직접 이춘방을 찾아가서 그에게 적당한 시기에 물러날 것을 권한다: 그 나이가 되어서, 가장 중요한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실질적인 일은 전혀 하질 않고, 그저 청사만 짓고 있으니 그게 어디 체면에 맞는 일인가. 보정의 대권을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장거정이 말한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춘방도 자신의 난감한 처지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탄핵을 당해서 하야하는 처참한 국면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는 것이 낫다.

이춘방이 떠났지만, 장거정은 꿈에도 그리던 내각수보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다.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은 바로 그의 라이벌인 고공이었다. 고공의 보좌로 융경제는 해금을 풀고, 많은 수량의 백은이 해상무역을 통해 대명의 국고로 들어오며, "융경신정(隆慶新政)"을 떠받친다.

비록 고공과 장거정은 서로 견제하였지만, 국가이익층면을 고려하여, 장거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융경4년(1570년), 타타르부의 엄답칸(俺答汗)이 다시 병력을 이끌고 대동(大同)으로 쳐들어 와 칭제할 것을 기도한다. 바로 이런 긴급한 순간에 장거정은 잘 알고 있었다. 엄답칸의 손자인 파한나길(把漢那吉)은 할아버지와 함께 전설적인 여인 "삼낭자(三娘子)"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하여 할아버지의 핍박하에 파한나길은 대명으로 도망쳐와서 귀순하려고 준비한다.

장거정은 급히 편지를 산서총독 왕숭고(王崇古)에게 편지를 보내, 잠시 이 몽골인을 붙잡아두라고 한다. 향후 조정이 엄답칸과 담판하는데 활용할 수 있도록.

장거정이 극력 권하자, 융경제는 파한나길일행을 업답칸에게 돌려보내고, 순의왕(順義王)에 봉하며 그로 하여금 삼낭자를 취하도록 허락한다. 이에 대한 교환조건으로 엄답칸은 황제를 칭하는 것을 포기한다.

이런 거래를 엄답칸은 즉시 동의한다. 이렇게 하여 대명의 북방은 잠시 안정을 회복한다.

몽골인의 철군과 더불어, 융경제의 신체는 날로 나빠진다. 2년후에는 결국 붕어하고 만다.

장거정은 그러나 인생의 최절정기를 맞이한다.

후임황제의 생모인 이태후(李太后)의 총애에 기대어, 장거정은 일거에 수보의 자리에 5년간 있던 고공을 몰아내고, 자신이 앉는다. 그리고 일대명상이 된다.

명나라의 국고는 정덕연간(1505-1521)이래 지속적으로 비어 있었다. 장거정은 취임하자마자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새로 토지어린도책(土地魚鱗圖冊)을 편제한다. 장거정의 정리정돈으로, 만력8년(1580), 전국의 전지(田地)는 합계 7,013,976경으로 융경5년(1571)에 비하여 근 3배 증가했다. 그 배후에는 장거정이 토호열신의 세금탈루와 경작지병합을 크게 단속한 결과가 있다.

비록 이런 개혁조치는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나라를 위해 이재를 하는 각도에서 보자면, 장거정은 제국의 엉터리재정을 정비한 셈이다.

그후, 조정의 투쟁은 날로 격화된다. 장거정은 "이치고성법(吏治考成法)"을 실행하여, "존주권(尊主權), 과이직(課吏職), 신상벌(信賞罰)"하여 조정관리의 부정부패행위를 해결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면서, 그 스스로는 탐욕을 부렸다.

당시 조정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장거정에게는 두 명의 군사호법이 있었다. 한명은 척계광이고 다른 한명은 이성량(李成梁)이다. 대명의 중앙정부가 안심하게 하기 위해 이 두 명장은 장거정에게 적지 않은 선물을 보냈다. 척계광이 장거정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는 일대명장이 스스로를 "문하주구소적척모(門下走狗小的戚某)"라고 스스로를 낮추어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빛나는 영웅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잘나가던 시절을 장거정은 그다지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다. 만력10년(1582년), 그는 급사한다. 향년 겨우 58세이다.

8

장거정의 사망으로, 그가 만들었던 공과를 만력제는 하나하나 파헤친다.

죽고나서 며칠만에 황제는 장거정의 가산몰수를 명하고, 그의 관직을 박탈하며, 생전에 내린 새서, 사대고명을 회수하고, 죄상을 천하에 고한다.

일시에 장거정을 욕하는 소리가 천하에 넘쳐난다.

최종적으로 역시 같이 과거에 합격한 왕세정이 이전에 사이가 나빴던 것에도 불구하고, 장거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해준다.

이 해에 왕세정은 57세였다.

가정정난을 겪은 후, 왕세정은 2번 조정에 돌아온다. 그리고 장거정의 보살핌하에 운양독무(鄆陽督撫)를 맡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입장이 아니었다. 장거정의 가솔이 강릉지현(江陵知縣)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왕세정은 장거정에게 그를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장거정은 자신의 가솔을 편들고, 두 사람은 사이가 갈라진다.

그후 여생동안 장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왕세정은 매우 힘들게 산다.

장거정이 몰락하자,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해에 왕세정은 기쁜 소식을 하나 듣는다. 그의 막내아들 왕사기(王士騏)가 응천향시에서 해원(解元, 1등)을 한다.

왕씨집안은 관료집안으로서 후대가 생긴 것이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왕세정은 알지 못했다. 과거출신의 그는 평생을 수련했고, 결국 독서수신만 해온 것이고, 서로 속고 속이는 권력투쟁은 잘 몰랐고, 흥미도 없었다.

만력18년(1590), 왕세정이 병사하면서 가정26년진사방의 인재들은 이제 시들어간다. 하나의 시대가 조용히 막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