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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1402

당현종(唐玄宗): 천고반제(千古半帝)의 황당한 말년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역사는 다시 한번 증명했다: 털빠진 봉황은 정말 닭보다 못하다는 것을​상원원년(760년) 칠월, 오랫동안 흥경궁(興慶宮)에 거주해오던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가 태극궁(太極宮)으로 놀러갔을 때, 돌연 500명의 부대가 돌아가는 길을 막는다. 사병들은 칼과 검을 꺼내들었고, 빛이 반사되어 눈부셨다. 우두머리는 태상황(太上皇)에게 태극궁으로 옮겨서 거주할 것을 '요청'하였다. 확실히 이건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것이다.​이전에 두 차례의 정변을 일으키고, 혈우성풍 속에 살아온 태상황은 이때 등에서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린 당현종은 타협을 선택한다. 한번 여행한 것이 이사가 되어버렸다. 이들 병졸들의 '호.. 2024. 10. 30.
악비(岳飛)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진회(秦檜)이다 글: 대설(大雪)​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말한다. 악비는 대민족영웅이고, 진회는 대간신매국노라고. 그러나 880년전 악비가 조사를 받을 때, 당시 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악비는 당시 남송 최대의 야전군을 지휘했가. 그 규모, 전투력과 영향력은 임표가 지휘하는 사야(四野)에 상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악비가 체포되고 살해당할 때, 그의 부하들 중에 그 누구도 나서서 그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한 사람은 오직 부장 장헌(張憲)과 아들 악운(岳雲)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지 않았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조정의 이 조치에 대하여 당시의 많은 관병들은 설사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서는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또 다른 야전군사령관인 한세충(韓世忠.. 2024. 10. 28.
서태후와 의화단 (3) 글: 이신우(李新宇)​7​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했기 때문에, 의화단운동은 불길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서태후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당연히 크게 보면, "부청멸양"의 네 글자로 이미 충분하게 설명이 된다. 의화단은 제국의 충성스러운 호위무사들이다. 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누굴 지지한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가들이 주목한 점은 역시 더욱 구체적인 원인이다.​의화단이 생길 때가 바로 서태후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시기였다. 바로 서양인에 대한 원한이 폭발할 때였다.​먼저, 무술정변이후의 원한이 쌓여 있었다.​무술변법때 외국인들은 광서제와 유신파를 지지했다. 서태후는 어렵사리 국면을 뒤집고 다시 수렴청정하고, 황제를 연금시키고, 담사동(譚嗣同)등 '무술육군자'를 죽여버렸다 .. 2024. 10. 27.
서태후와 의화단 (2) 글: 이신우(李新宇)​4​세계전쟁사상, 이건 유일한 전쟁사례이다: 선전포고를 하고, 공사관을 공격목표로 삼는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렇게 하는 전쟁은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공사관은 자신의 영토내에 있기 때문에,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마땅히 즉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당연히 전쟁이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진정한 전쟁이 뒤이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다만 곤혹스럽게도, 6월 20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는데, 8월 14일 팔국연합군이 북경에 들어와 포위망을 풀 때까지, 50여일동안 대사관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원래, 각국 공사는 청나라조정의 통첩을 받고, 즉시 철수할 준비를 했다. 다만 6월 20일 독일공사가 피살되자, 각국 공사관은 깜짝 놀.. 2024. 10. 27.
사서태후와 의화단 (1) 글: 이신우(李新宇)​1900년 여름, 북경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연히 일어난 일들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를 통해 드러난 것은 왕왕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가장 주목을 끌었던 일은 의화단으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다.​권민(拳民)들이 교당(敎堂)을 불태우고, 선교사를 죽이고, 교민(敎民, 신도)을 죽여 열강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는다. 그들은 대청국에 보호를 요구했고, 조정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열강은 대청제국이 외국교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파병하여 보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외국병사들이 오고 또한 북경으로 진입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소수라 할지라도 결코 범상한 일이라고 .. 2024. 10. 27.
"장가왕조(蔣家王朝)"는 왜 2대로 끝났을까? 글: 노황설사(老黃說史)​장개석(蔣介石)이 장경국(蔣經國)을 위해 길을 깔아준 것과 마찬가지로, 장경국도 아들이 순조롭게 자리를 넘겨받게 하기 위하여 고심을 해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의외의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되어, "장가왕조" 제3대후계자의 "등극의 길"을 끊어지게 된다. 바로 "강남명안(江南命案)"이다.​​장경국에게는 4남1녀가 있다. 그중 장효문(蔣孝文)과 장효무(蔣孝武)이 장방량(蔣方良)의 소생이다. 다만 장효문은 신체가 허약하여 중임을 맡기 힘들었기 때문에, 장효무가 중점배양대상이 된다.​장효무의 인생이 부친의 안배하에 궤도에 들어가고 있을 때, "강남명안"이 발발하여, 이 유력했던 "이태자(二太子)"는 쓸쓸히 무대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장효무가 물러나면서, 결국 장씨가족은 정식으로 정.. 2024.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