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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1411

홍수전(洪秀全)의 기독교로 보는 "중국특색" 글: 제과(齊戈)​소위 "중국특색"은 최근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이다. 중국특색의 시장경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중국특색의 사법제도등등. 여기에는 한가지 기본적인 규율이 있다: 무릇 무엇이라고 말하기 불명확하고, 폐단이 연이어 발생하여 계속 비난받고, 온 천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제도나 주의에 대하여 '중국특색'이라는 네 글자를 붙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게 되고, 잘 모르게 되다보면 결국 흐지부지된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를 보자. 모택동이 행한 것은 기실 스탈린주의이다. 심지어 스탈린보다 더욱 극단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공산당20대이후, 스탈린의 폭정은 전세계에 폭로되었고, 악명을 떨치게 되고, 불명예스러운 것이 되어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끌지 못.. 2024. 11. 1.
장태염(章太炎): 민국시기의 정치광인 글: 장명(張鳴)​장태염(章太炎)은 지금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유명하지만, 청말민초때 그는 혁명가, 정치가로 유명했다. 단지 그의 정치가로서의 인생은 옛날의 책무더기에서 억지로 기어나온 것이다보니, 제대로 할 때는 그럴 듯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제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생은 학자인데, 학문을 얘기할 때는 졸다가도 정치를 얘기하면 바로 기운이 살아난다. 단지 그렇게 기운이 살아날 때 너무나 자기마음대로였기 때문에 어떤 때는 동지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고, 또 어떤 때는 상대방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든다.​장태염은 동맹회(同盟會)의 초기 핵심인원이었다. 도쿄에서 민보(民報)를 간행할 때 그가 크게 싸웠다. 만일 마구잡이로 욕해대는 글재주를 지닌 그가 없었더라면,.. 2024. 11. 1.
서태후(西太后) 인생의 마지막 하루 글: 사설신어(史說新語)​서태후를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그녀를 그다지 좋게 보고 있지 않다.​그녀를 얘기하면 모두가 떠올리게 되는 건 폐관쇄국(閉關鎖國), 각종 굴욕적인 불평등조약, 서방열강에 대해 부득이 무릎꿇는 것, 그리고 수렴청정(垂簾聽政)등등 별로 좋지 않은 단어들이다.​서태후는 17살에 후궁으로 입궁하여, 평생동언 정변도 일으키고, 3차례 수렴청정하면서 48년간 청나라정권을 좌지우지해왔다.​당시 서방은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었고, 문명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대였는데, 서태후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피하는 방법으로 왕조의 꿈만 꾸었다.​그녀는 대권을 독점하면서, 주위의 열강이 노려보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같았다.​만성독약을 먹은 것처럼 방대한 청왕조는 점점 사.. 2024. 10. 31.
당현종(唐玄宗): 천고반제(千古半帝)의 황당한 말년 글: 최애역사(最愛歷史)​역사는 다시 한번 증명했다: 털빠진 봉황은 정말 닭보다 못하다는 것을​상원원년(760년) 칠월, 오랫동안 흥경궁(興慶宮)에 거주해오던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가 태극궁(太極宮)으로 놀러갔을 때, 돌연 500명의 부대가 돌아가는 길을 막는다. 사병들은 칼과 검을 꺼내들었고, 빛이 반사되어 눈부셨다. 우두머리는 태상황(太上皇)에게 태극궁으로 옮겨서 거주할 것을 '요청'하였다. 확실히 이건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것이다.​이전에 두 차례의 정변을 일으키고, 혈우성풍 속에 살아온 태상황은 이때 등에서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린 당현종은 타협을 선택한다. 한번 여행한 것이 이사가 되어버렸다. 이들 병졸들의 '호.. 2024. 10. 30.
악비(岳飛)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진회(秦檜)이다 글: 대설(大雪)​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말한다. 악비는 대민족영웅이고, 진회는 대간신매국노라고. 그러나 880년전 악비가 조사를 받을 때, 당시 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악비는 당시 남송 최대의 야전군을 지휘했가. 그 규모, 전투력과 영향력은 임표가 지휘하는 사야(四野)에 상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악비가 체포되고 살해당할 때, 그의 부하들 중에 그 누구도 나서서 그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한 사람은 오직 부장 장헌(張憲)과 아들 악운(岳雲)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지 않았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조정의 이 조치에 대하여 당시의 많은 관병들은 설사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서는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또 다른 야전군사령관인 한세충(韓世忠.. 2024. 10. 28.
서태후와 의화단 (3) 글: 이신우(李新宇)​7​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했기 때문에, 의화단운동은 불길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서태후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당연히 크게 보면, "부청멸양"의 네 글자로 이미 충분하게 설명이 된다. 의화단은 제국의 충성스러운 호위무사들이다. 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누굴 지지한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가들이 주목한 점은 역시 더욱 구체적인 원인이다.​의화단이 생길 때가 바로 서태후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시기였다. 바로 서양인에 대한 원한이 폭발할 때였다.​먼저, 무술정변이후의 원한이 쌓여 있었다.​무술변법때 외국인들은 광서제와 유신파를 지지했다. 서태후는 어렵사리 국면을 뒤집고 다시 수렴청정하고, 황제를 연금시키고, 담사동(譚嗣同)등 '무술육군자'를 죽여버렸다 .. 2024.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