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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1349

"모택동사상"이라는 용어는 누가 만들었는가? 글: 옥미수(玉米穗) 1945년 중공7대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하나의 조치는 당장(黨章)이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유소기(劉少奇)가 새로운 당장에 대한 보고를 하는데, 당장의 조문에 "모택동사상(毛澤東思想)"을 중국공산당의 사상적 기초로 규정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의 통일된 사상인 모택동사상을 우리 당의 모든 공작의 지침으로 삼는다." "모택동사상"이라는 용어를 누가 가장 먼저 만들었을까? 왕가상(王稼祥)이다. 왕가상은 1943년 7월초 에 라는 글을 싣는다. 이 글에서 먼저 "모택동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전에 중국공산당에서는 각양각색의 유사한 용어를 사용해 왔었다. 예를 들어, "모택동동지의 이론" "모택동동지의 사상" "모택동동지의 이론과 전략" "모택동동지의 관점.. 2022. 12. 28.
장쩌민 장례식에서 고위관료들의 서로 다른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글: 종원(鍾原) 12월 5일, 중국당국은 돌연 며칠전의 공고를 뒤집고 장쩌민(江澤民)의 유체고별의식(遺體告別儀式)을 거행했다. 그것도 두번이나. 1달반전에 20대 주석단의 제1열에 앉아있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보기 드물게 모습을 나타냈는데, 중공의 현임, 전임 고위관료들의 모습은 서로 달랐다. 거기에는 시진핑이 장멘헝(江綿恒)을 포옹하려고 시도하는 난감한 장면도 포함되어 있어, 어느 정도 그들의 진실한 내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20대후, 중공내부의 "타협"과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유체고별의식을 거행하지 않는다"는 공고를 폐기하다. 11월 30일, 중공은 장쩌민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동시에 치상위원회(治喪委員會) 명단을 공표했다. 시진핑은 유일한 주임위원이고, 위원에는 현임과 전임의 관료.. 2022. 12. 7.
임표(林彪)와 등소평(鄧小平)의 은원(恩怨) 글: 조대부(趙大夫) 임표, 등소평은 모택동의 득의문생(得意門生)으로 일찌기 모두 모택동의 후계자 반열에 올랐다. 한명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이름을 넣었던 모택동의 후계자이고, 다른 한명은 모택동의 사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렇다면, 등소평과 임표는 도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했다. 제1대영도집단의 핵심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심리도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상하급관계였기도 했고, 일찌기 밀접한 협력관계이기도 했고, 또한 심각한 대립관계이기도 했다. 등소평과 임표는 일생동안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등소평의 딸 모모(毛毛)가 등소평을 회고하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등소평과 임표는 개인적인.. 2022. 11. 24.
유방(劉邦)은, 주원장(朱元璋), 이연(李淵)과 비교하여, 가장 힘들게 천하를 얻었다. 글: 역사경전비(歷史經典沸) 유방은 대한(大漢)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대진(大秦)과 항우(項羽)였다. 이연은 대당(大唐)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대수(大隋)와 왕세충(王世充)이었다. 주원장은 대명(大明)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원조(元朝)와 진우량(陳友諒)이었다. 유방은 평민이고, 주원장도 평민이면서 거지까지 되었었다. 이연흔 황친국척이다. 그들의 출신으로 보면, 이연이 강산을 얻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연은 신분이 귀족이니, 평생 다른 사람들이 뛰어넘기 어려운 계층의 이점이 있었다. 즉, 그의 출발점이 아주 좋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욱 쉽게 최초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왕왕 한 사람에 있어서 일생에서 최초의 기반을.. 2022. 11. 21.
조조(曹操)의 죽마고우 4명의 운명은...?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어렸을 때 친구들간의 우의는 어떤 때는 친형제자매간의 감정에 못지 않다. 고대에, 죽마고우는 일반적으로 부친들도 서로 알고 지내고, 어려서부터 함께 놀면서 자랐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친구가 되었다. 그중 필자가 오늘 얘기하려는 사람은 조조이다. 그에게는 4명의 죽마고우가 있었는데, 모두 동한말기의 역사인물들이고, 출신, 능력이 비범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이들 4명의 운명은 각각 어떠했을까? 1. 채모(蔡瑁) 채모는 형주(荊州) 남군(南郡) 양양(襄陽)의 호족인 채씨집안 출신이다. 고모(姑母)가 동한의 태위(太尉)인 장온(張溫)의 처였다. 큰누나와 둘째누나는 각각 황승언(黃承彦, 제갈량의 장인)과 유표(劉表, 형주목)에게 시집을 간다. : "어려서 위무(魏武, 조조를 가리.. 2022. 11. 10.
원세개(袁世凱)는 왜 국민당(國民黨)을 해산시켰을까? 글: 투원(套元) 1913년 11월 4일, 북양군경(軍警)이 대거 출동하여, 국민당 본부를 포위하고, 중화민국 대총통 원세개가 서명한 대총통령을 읽었다. 반란의 죄명으로 국민당을 해산하고, 모든 국민당 소속의 의원과 가족은 즉시 북경을 떠나라는 것이다. 이 소식이 나오자, 북경성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각 기차역과 교통로에는 국민당 소속의원과 가족들이 북경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국민당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인가? 일찌기 최대의 당이 왜 졸지에 해산당하게 되었는가. 1. 송교인(宋敎仁) 암살, 국민당의 명성에 금이 가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 부의는 퇴위조서를 반포하고, 봉건왕조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혁명당과 북양군벌의 영수인 원세개는 함께 .. 2022. 11. 8.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 2022. 10. 26.
옹정제(雍正帝)는 왜 아홉째 동생 윤당(允禟)을 죽였을까?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옹정4년(1726년) 팔월 이십칠일, '팔야당(八爺黨)'의 핵심구성원중 하나였던 윤당(胤禟, 나중에 피휘로 允禟으로 개명)은 3개월간 각종 혹형을 받은 후, 보정(保定)의 한 감옥에서 처참하게 죽는다. 이 날은 마침 윤당의 마흔여섯살 생일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기일이 되어 버렸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다. 옹정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그저 담담하게 "자복명주(自伏冥誅)"라고 한 마디 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윤당은 죽어 마땅했고,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아홉째 동생인 윤당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옹정제가 그를 그렇게 괴롭혔고, 죽고나서도 전혀 애석해하지 않다니. 이 모든 것은 옹정제가 즉위한 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 2022. 10. 19.
경풍(慶豊)의 죄는 홍헌(洪憲)의 백배이다. 글: 진숙함(陳淑涵) 당대 중국제일남아, 즉 중공건정이래 단독으로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내건 펑자이저우(彭載舟) 선생은 중공20대 전날, 베이징 쓰통차오(四通橋)에 플랭카드를 내걸어 국적 시진핑을 토벌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이런 영웅적인 장거를 해냈으니, 천지가 놀라고 귀신이 눈물을 흘릴 일이다. 펑용사의 영웅적인 기개에 감동받아, 필자는 그의 토적격문인 를 자세히 읽어보았으며,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글은 중공건정이래 전체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한 웅장한 글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사실이며, 진실함과 절실함이 들어 있어, 읽는 사람의 피를 끓게 만든다! 펑자이저우 용사는 당금의 국적 시진핑을 1백여년전의 원세개(袁世凱)에 비유했다. 이것은 필자가 유일하게 동의할 수 없는 .. 2022. 10. 19.
"주덕(朱德)의 편담(扁擔, 멜대)"과 "임표(林彪)의 편담" 글: 임휘(林輝) 1950년대초, 토비(土匪)출신의 중공 전 군사지도자 주덕의 간고(艱苦)하고, 소박한 정신을 칭송하는 글인 이 소학교 교재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글은 조작혐의가 있어 작년에 교과서에서 삭제된다.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 조작혐의가 있는 글이 1967년 2월 정치적 원인으로 주인공을 "임표"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년 후 임표사건이 발생하고나서, 주인공은 다시 원래대로 주덕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주석의 편담"도 날조된 것이 아닌가? 먼저 이 정치적 풍운변화에 흔들린 글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대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1928년 주덕과 모택동은 폭동에 실패하여 도망쳐서 정강산에서 만난 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사람을 5.. 2022.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