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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의 조상묘는 누가 파헤쳤는가?

by 중은우시 2025. 3. 2.

글: 최억시난심(最憶是難尋)

 

 

나는 신문잡지와 인터넷에서 장개석은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쳤는데, 모택동은 장개석의 집과 조상묘를 잘 보호해주었다는 글을 여러번 보았다. 볼 때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어떤 주장은 공정하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았다.

봉화(奉化) 계구(溪口)의 현지인으로, 사실의 진상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여러번 모택동의 조상묘를 파헤치라고 명령한 사람은 호남성주석이자 군벌인 하건(何鍵)이었다. 다만, 하건의 부하들은 모택동의 조상묘를 찾아내지 못했고, 결국 엉뚱한 묘를 파헤쳤다. 모택동의 조상묘는 전혀 파괴된 적이 없다. 그러나, 장개석의 조상묘는 문화대혁명때, 실제로 철저히 파헤쳐진다; 장개석의 옛집 및 재물도 잘 보호되지 못했다.

장개석의 조상묘가 파괴된 진실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68년 4월의 어느 날 오후, 여요중학(餘姚中學)의 홍위병 30여명이 봉화 계구로 온다. 계구중학(溪口中學) 홍위병 접대소에서 상황을 파악한 후, 계구구위로 찾아가 계구구위서기 장정수(張正樹)를 만난다. 여요중학의 홍위병은 장정수를 질책한다: 전국 상하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거창하게 벌이고 있으면서, 파사구(破四舊), 입사신(立四新)하고 있는데, 너희 계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인민공적 장개석 가족의 묘는 지금도 전혀 건드려지지 않았다. 너희는 모택동주석이 직접 일으키고 영도하는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어떤 입장인가?

구위서기는 이렇게 말한다. 홍위병 소장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혁명정신을 배우겠다. 다만, 우리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장개석 가족의 분묘를 보호하고 있어, 함부로 파괴할 수 없다. 잘 보호하지 못하고, 파괴되면 그것은 내 책임이 된다.

여요중학의 홍위병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정말 장개석의 충실한 주구이구나! 너는 정말 장개석의 효자현손이구나! 너는 정말 주자본주의도로의 당권파로구나! 우리가 이번에 봉화 계구로 온 것은 바로 사구를 척결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바로 인민공적 장개석가족의 분묘를 파괴하러 왔다.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장정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분의 혁명열정을 존중한다. 다만 여러분이 장개석 가족의 분묘를 파괴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상부의 지시가 없으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이렇게 하자. 내가 전보를 두 개 보내 상급기관의 지시를 요청하겠다. 상부에서 동의하면, 너희가 행동을 시작해라...

다음 날 아침 일찍, 여요중학 홍위병들은 홍기를 들고, 참신한 괭이와 팔각망치를 어깨에 매고, 계구구위로 찾아온다. 그리고 혁명구호를 외친다. 구위서기 장정수가 나와서 말한다: 나는 어제 오후에 전보를 보냈는데, 아직 회신이 오지 않았다. 우리 하급은 상급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상급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안된다. 우리는 즉시 혁명행동을 취하겠다.

혁명무죄, 조반유리!

인민공적 장개석을 타도하자.

장개석의 충실한 주구를 타도하자.

장개석의 효자현손을 타도하자.

.....

장정수: 아마도 성위, 지위의 공작은 이미 마비된 것같다. 그렇다면 국무원은 아직 마미되지 않았으니, 내가 국무원, 주은래 총리에게 전보를 보내겠다. 국무원, 주총리의 지시를 기다리자. 2시간만 기다려 달라. 8시에 다시 보자.

8시가 되었다. 장정수는 우전국에 전화를 걸었다: 북경에서 전보가 왔는가? 중앙에서 전보가 왔는가?

아무런 전보도 오지 않았다.

여요중학의 홍위병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행동을 개시하자. 너 구위서기도 우리와 함께 가자. 길을 안내해라. 너는 기름 2상자를 들고 우리와 함께 가자.

이렇게 하여, 여요중학의 홍위병들은 깃발을 들고, 괭이와 팔각망치를 매고, 혁명가곡을 소리높여 부르면서, 혁명구호를 외쳤다. 장정수는 두 통의 기름을 들고, 장개석의 본부인이자 장경국의 생모인 모씨(毛氏)의 묘지로 간다. 홍위병은 분묘를 파헤치고, 석판을 부수고 관목을 부수고 기름을 부어 불태워버린다.

동시에 묘앞의 비석을 두동강이낸다.

이번은 모씨의 분묘가 세번째로 파헤쳐진 것이다. 장개석의 본부인이자 장경국의 생모인 모복매(毛福梅)는 1939년 12월 12일 일본인의 비행기가 계구를 폭격할 때 무너진 벽에 깔려서 사망한다. 매장후, 일본인이 계구를 점령하고나서, 일본인들은 모씨의 묘안에 도대체 무엇이 묻혀 있는지 보고 싶어, 묘를 파헤쳐보기로 한다. 일본인들은 먼저 장씨일족에 통보하고, 모씨에게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낸다. 장씨 일족도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냈다. 그후 일본인들은 묘를 파서 안을 본다. 그런데 아주 평범했다. 그리하여, 묘토를 다시 덮는다. 항전승리후, 장경국이 돌아온다. 모친의 묘를 일본인들이 파보았다는 말을 듣고 장경국은 안심이 되지 않아, 다시 묘를 파내서 정리한다. 그후 관의 아래에 목판을 놓고 다시 묘를 만든다.

이번은 세번째로 파헤쳐진 것이다. 야만적인 파괴와 방화를 거쳐, 관목, 유골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렇게 철저히 훼멸된 것이다. 이어서, 여요중학의 홍위병들은 구위서기 장정수를 데리고, 계구의 큰 길을 지나간다. 도중에 계구사진관의 사진사 이강(李剛)을 불러, 장개석 모친의 묘를 향해 출발한다.

장개석 모친의 묘에 도착하여, 홍위병들은 마찬가지로 괭이로 분묘를 파헤치고, 묘혈을 열어 머리부분의 하화석판(荷花石板)이 드러난다. 장개석 모친의 관의 사각은 각각 4개의 동권(銅圈)으로 하화석판의 아래에 매달아 놓았다. 땅바닥에 닿지는 않았다. 홍위병들은 죽어라 팔각망치로 하화석판을 깬다. 하화석판이 마침내 깨지고, 남목(楠木)으로 만든 관목이 바닥에 떨어진다. 관이 열렸고, 이불과 의복은 기본적으로 완전했다. 시신은 이미 썩었으나 머리카락은 완전했다. 옥 하나가 가슴 앞에 놓여 있었고, 반지 하나가 있었따. 관을 뒤집어 부수고 기름을 부어 불태워버린다.

필자는 그날 오후에 장개석모친의 묘가 파괴되었다는 말을 듣고, 친구인 주선생(周先生)과 함께 산을 올라가서 보았다. 파괴된 관목, 의복과 진흙이 뒤섞여 있었고,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었다. 백골은 사방의 산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화에서 사람이 와서 장개석 부친의 묘가 파괴된다. 동시에 장개석 부친의 묘 부근에 있던 장개석 동생의 묘도 파괴된다. 당시 계구1대대의 사원들이 가서 보았다. 당시 계구 1대대의 대장 임서창(任瑞昌)은 한 바보에게 말한다: 너는 이 두개골을 주워서 보관해 두어라.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 바보는 그 말을 정말로 믿고 두개골을 주워간다. 그 사실을 조반파가 듣고는 임서창을 질책했다: 너는 사람을 시켜 두개골을 보관하게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나중에 장개석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상이라도 받을 생각이냐. 그리하여 임서창을 붙잡아가서 반년간 가두어두었다가 풀어준다.

여요의 홍위병은 장개석모친의 묘를 파괴한 후, 묘려(墓廬) -- 자암(慈庵)은 파괴하지 않고 떠났다. 나중에 장개석 모친의 묘려 -- 자암은 그해 가을 봉화에서 온 사람들이 무너뜨렸다. 그들이 가져온 호로(葫蘆)로 기둥을 끌어당겼다. 첫번째 기둥을 쓰러뜨리고, 두번째 기둥을 쓰러뜨렸지만, 집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네번째 기둥을 끌어당기고 나서야 건물이 무너진다.

이어서, 장개석 모친의 패방(牌坊)을 철거하려고 준비할 때, 상백대대(上白大隊)의 서기 서보강(徐寶康)이 앞으로 나와서 얘기한다: 우리는 상백대대의 빈하중농이다. 여러분이 패방을 철거한 후 4개의 돌기둥을 우리 대대에게 주어서 다리를 만들 수 있게 해주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좋다. 너희는 2시간 후에 와서 돌기둥을 가져가라.

그러나, 반나절동안 철거해도 무너뜨리질 못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폭약을 쓰자. 그리하여 패방의 정면과 배면에 폭약을 놓고 터트려서 패방이 무너진다. 4개의 돌기둥도 부러져 버린다. 묘도 파괴했고, 건물도 파괴했다. 목재, 석재, 벽돌등은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재, 석재, 벽돌은 거의 모두 사라진다.

"계구인민공사혁명위원회"가 성립될 때, 관례에 따라 위대한 지도자 모주석에게 보고하는 전보를 보냈다. 전보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 모주석의 친밀한 전우, 경애하는 강청동지가 우리에게 지시했다: 장개석 가족의 분묘를 '평지로 만들고, 논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지으라'. 우리는 이미 철저히 그에 따라 해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장개석의 분묘를 파괴한 후 주은래가 사람을 보내어 복구시켰다고. 그런 일은 없었다. 주은래가 죽을 때까지 이 분묘들은 복구되지 않았고, 여전히 "평지로 만들고, 논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는 상태였다.

장개석의 고거(故居)와 장씨조상묘가 복구된 것은 1980년대초의 일이다.

1980년대초, 장씨의 고거(豊鎬房)를 복구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한동안의 노력을 거쳐 고거에서 유실된 <우리수기(寓理帥氣)>등의 편액도 다시 제작하여 걸어놓았다. '사구(四舊)'로 제거된 양주(梁柱)의 목각, 목조도 다시 제작된다. 모조리 없애버렸던 장씨조상의 신주, 패위도 다시 만들어 안치한다. 집을 페인트칠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빈껍대기이다. 실내의 방, 청당안에 가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원래 장씨 고거의 방, 청당의 주(橱), 거(柜), 대(臺), 궤(几), 탁(卓), 의(椅)같은 류의 가구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이들 가구는 모두 홍목으로 만들었고 고급제품들이다. 조사를 하고, 알아본 다음 원래 이들 가구가 대부분 영파(寧波)로 갔으며, 대부분 영파시위, 시정부의 사무실에서 사무용가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진XX선생은 명을 받아 영파로 가서 원래 장씨고거에 있던 가구를 회수해 온다. 교섭과 협조를 거쳐 시위, 시정부의 이들 가구는 모조리 옮겨온다. 진선생은 그것들을 방 하나에 모아 놓고, 다음 날 트럭에 실어 봉화 계구의 장씨고거로 가져갈 계획이었다. 가구를 운반할 트럭이 영파에 도착하고나서, 진선생이 방문을 열어본 후 깜짝 놀란다. 전날 모아둔 고급홍목가구들중 반이상이 저급한 잡목가구로 바꿔치기되어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이미 바꿔버린 것이다. 누가 그렇게 했을까? 도대체 어디로 가져갔을까?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장씨고거의 원물 고급가구의 거취는 수수께끼로 남고 그후로 행방이 묘연해진다. 그리고 결국은 흐지부지되고 더 이상 추적할 수가 없었다.

현재 장개석고거에 진열된 가구들은 저급목재로 새로 만든 것이거나, 부근에서 모으거나, 돈을 주고 사온 것이나, 사이비 저급품이다. 진정한 원래 물건은 대부분 이미 사라져버렸다. 장씨 조상묘는 1980년대초에, '평지로 만들고 논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지었는데, 원래의 부지에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모두 공묘(空墓)이다. 안에는 관도 없고, 유골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새로 만든 장개석 부친의 묘도, 마찬가지로 공묘이다. 원래 산자락에서 장개석부친의 묘지까지는 묘도(墓道)가 있었는데, 파괴된 후에 복구되지 않았다. 현재는 장개석 부친의 묘 근처는 모조리 분묘로 가득 찼다. 이미 묘도를 복구시킬 공간은 없어진 것이다.

장개석 동생의 분묘는 파헤쳐진 후에 다시 복구되지 않았다. 장개석의 형인 장개경(蔣介卿)의 분묘는 그의 가족들에 의해 복구된다. 현재 우리가 보는 장개석의 본부인이자 장경국의 생모인 모씨묘도 원래의 부지에 새로 만든 공묘이다. 다만 크기는 원래보다 많이 커졌다. (새로 만들 때 일꾼들이 물었다: "원래 묘의 크기대로 만들까요, 그렇다면 원래 묘의 크기는 얼마였나요?" "모른다. 대충 추측해보면 개략 이정도 크기였을 것이다.") 원래 묘를 보았던 사람은 모두 현재의 묘가 이전보다 많이 커졌다고 한다. 원래묘의 석비는 아주 매끄럽고 표면에는 전혀 파흔(疤痕)도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석비는 온통 파흔이 있고, 전혀 매끄럽지도 않다.

또 어떤 글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1949년 5월, 인민해방군이 봉화를 해방시키기 전에, 모택동은 이렇게 지시했다: '봉화를 점령할 때, 부대에 알려서, 장개석의 주택, 사당 및 기타 건축물을 파괴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하여, 1959년 저명한 애국민주인사 장사쇠(章士釗)가 대만의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봉화의 여묘(廬墓)는 원래와 같이 그대로이다. 계구의 화초(花草)도 무양하다."고 말했다. 나중에 여러번의 운동을 거치면서, 특히 문화대혁명대 장씨의 분묘는 철저히 파괴된다. 유골조차 남기지 안았고, 아무런 흔적도 없어진 것은 감추고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장씨고거와 분묘는 파괴된 적이 없이 잘 보호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문화대혁명때 홍위병이 장씨조상묘를 파괴하려는 것을 계구 현지의 백성들이 밤을 새워 3일 밤낮을 보호하려 했으나, 결국 보호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홍위병이 파괴한 후, 주은래가 즉시 사람을 보내 장씨의 조상묘를 복구시켰다고. 이런 말들은 그저 아름다운 상상일 뿐이다. 이런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알려서 여러분들도 사실의 진상을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