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문찬(楊文燦)
숭정14년(1641년) 정월, 이자성은 하남 낙양(洛陽)을 점령한 후, 개봉(開封)의 명나라 수비군의 방어가 비교적 약하다는 것을 알고, 즉시 행동에 들어간다. 그는 이것이 명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조정을 무너뜨릴 중요한 기회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이월, 이자성은 3만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밤을 새워 행군하여, 3일만에 개봉성에 도착한다. 하루빨리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그는 부하들로 하여금 쟁기(犁), 호미(鋤), 도끼(斧)등의 도구를 가지고 성벽을 둘러싸고 터널을 파도록 지휘하여, 이를 통해 공격과 침투를 진행하고자 한다.
개봉의 수비군지휘관은 명나라의 순무인 고명형(高名衡)이었다. 그는 틈군(闖軍, 이자성군)이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대를 지휘하여 수비를 강화하며 응전을 준비한다. 고명형은 성내의 수비군들이 방어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는 외에, 성밖으로 포탄을 쏘아 적군의 진격을 막고자 한다. 방어선의 강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고명형은 공개적으로 현상금을 내걸고, 결사대를 모집한다. 그렇게 하여 병사들과 민중들로 하여금 성밖으로 출동하여 공격을 감행하게 하여 성안의 압력을 완화시킨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비록 용맹하기는 하지만, 적지 않은 댓가를 치러야 했다. 공성의 곤란과 성내의 방어강도로 농민군은 계속하여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사망자수가 점차 늘어난다. 연일 계속되는 포격과 돌격으로 그들의 병력은 점점 소모되었고, 개봉의 수비군은 비록 사상자가 많았지만,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붕괴될 조짐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자성은 한편으로 계속하여 땅굴을 파도록 명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화포포격을 강화하며 하루빨리 명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자 했다.
바로 이 때, 명나라에서 파견한 증원군이 마침내 개봉에 도착한다. 고겸(高謙)은 명나라의 총병(總兵)으로 명을 받아 부대를 이끌고 개봉으로 왔다. 고겸의 이번 임무는 바로 이자성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것이고, 개봉이 함락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러날에 걸친 행군으로 고겸은 개봉의 진영복(陳永福)과 회합한 후, 공동으로 이자성의 포위공격에 대한 반격을 진행한다. 양군이 연합한 후, 신속히 반격을 진행하여 이자성의 부대에 큰 골치거리가 된다. 그후에 이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농민군은 비록 최선을 다했지만, 시종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오히려 명군의 반겨게 틈군의 사망은 갈수록 심각해져서, 할 수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고전끝에 이자성의 부대는 마침내 인식하게 된다. 개봉을 포위공격하는 목적을 단기간내에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지속된 전투로 자신의 손실만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것을. 이제, 개봉성의 견고한 방어와 계속되는 명군의 증원군에 직면하여, 이자성은 잠시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번의 포위공성전은 농민군의 철수로 끝난다. 이자성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개봉을 떠나 다른 주현으로 공격목표를 바꾼다.
숭정15년(1642년) 정월 십이일, 개봉부 바깥의 모습은 숨조차 쉬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자성은 이번에 결심을 굳히고 이 성을 함락시키고자 온 것이다. 작년에 실패하고 돌아갔던 교훈이 역력하다. 이번에 그는 전해 십이월부터 옛동료인 "조조(曹操)" 나여재(羅汝才)를 끌어들여, 인마를 이끌고 권토중래하며 개봉성을 반드시 짓밟고 말겠다는 결심이었다.
성안에서 하남총병 진영복(陳永福)이 성벽위에 서서 수비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제1차 포위공성때 이자성이 아직 자리를 완전히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진영복은 기회를 노려, 인마를 데리고 밤중에 기습을 갔다. 그날 밤, 그는 아들 진덕(陳德)과 정예병사들을 이끌고 틈군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그가 쇄도해 들어갔을 때, 틈군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큰 피해를 입혔었다.
개봉성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성벽이 최대 공신이다. 높이가 5장에 이른다. 현재의 단위로 하면 십육미터가 넘는다. 아래에 서서 위를 바라보면 목이 아플 정도이다. 성벽은 청전(靑磚)으로 한층 한층 쌓아올렸기 때문에 큰 바위처럼 견실했따. 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고, 포탄을 쏴도 무너지지 않았다. 성벽의 아래에는 호성하(護城河)가 있었고, 수면이 아주 넓었다. 틈군은 가까이 다가가는데만도 엄청난 힘이 들었다.
이자성은 가지고 온 화포를 일자로 배치시켰다. 화포의 갯수는 백개가 넘었다. 이들 화포는 이자성이 각지에서 끌어모은 것으로 어떤 것은 명군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어떤 것은 수하장인들이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비록 정교하진 않았지만, 위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진영복은 성위에 서서 그 모습을 보면서 수비군에게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명령한다.
개봉의 성벽이 견고하고 높이가 5장에 이르렀으며, 청전으로 쌓아서 아주 튼튼했지만, 밀집된 포격앞에서 그래도 갈라진 틈이 생기게 된다. 어떤 곳은 주먹만한 구멍이 생겼고, 쇄석이 사방으로 날렸다. 수비군이 미처 피할 틈도 없어서 적지 않은 사람이 맞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핏물과 진흙이 함께 흘렀다. 틈군은 포화의 엄호를 받으면서, 신속히 움직였고, 한 '해아군(孩兒軍)'무리가 운제(雲梯)를 타고 성벽으로 돌진했다. 이들 병사들은 다수가 젊고 건장한 이들이었다. 동작이 민첩하여 순식간에 백여명이 운제를 타고 기어올라간다.
바로 이 위급한 순간에, 주왕(周王) 주공효(周恭枵)가 왕부의 호위를 이끌고 전선으로 왔다. 그는 개봉성안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번왕(藩王)이고, 평소에는 편안하게 살아갔지만, 지금은 신분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직접 왕부의 창고에서 수만냥의 은자를 꺼내어 수비군에게 군비로 쓰도록 내놓는다. 그리고 50만냥의 은자를 들여 양식을 구매하여, 성안의 군민이 굶지 않도록 대비했다.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그는 현상령도 내렸다: 틈군병사 1명을 죽일 때마다 50금의 상금을 내리겠다고. 만일 적군을 물리치고, 개봉의 포위를 풀어준다면, 직접 10만냥의 백은을 상으로 내리겠다고 한다.
성을 수비하는 관군은 원래 피로에 지쳐 있었는데, 큰 상을 내린다는 말을 듣자, 힘이 솟았다. 민병까지도 전투에 가담한다. 그들은 장모(長矛, 긴세모창), 궁전(弓箭), 심지어 급히 마련한 곤봉을 들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틈군과 육박전을 벌인다. 틈군은 인원수도 많고 기세도 흉맹했지만, 수비군은 성벽의 이점과 큰 상금의 장려하에 이를 막아내고 있었다.
숭정15년 팔월에 이르자, 개봉은 포위당한지 이미 7개월여가 흘렀다. 성안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성밖에는 원군이 오지 않았다. 조정에서 파견한 병력은 일찌감치 이자성의 부대에 의해 막혔고, 소식도 성안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성안의 양식은 몇달전에 이미 바닥이 났고, 군인과 백성들이 모두 끼니를 잇지 못했다. 성을 수비하는 관리들은 은원래 성문을 열어 일부 굶주린 백성들을 빠져나가게 하려 했다. 어쨌든 성안에 수십만이 살고 있으니 원래의 양식으로는 오랫동안 버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사람들을 내보내면, 성안의 약점이 틈군에게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 두려웠따. 예를 들어, 수비군의 숫자, 양식부족상황등등의 정보를 알게 되면 이자성이 그 빈틈을 파고들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을 봉쇄하고, 성문을 꽉 걸어잠그고, 병력으로 하여금 밤낮을 순찰돌게 했다. 아무도 성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즉결처형했다.
양식이 없어지니, 백성들은 사방으로 배를 채울 것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낱알이나 혹은 지하창고에 보관하던 말린야채같은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금방 바닥난다. 이어서, 그들의 눈길은 야외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로 돌아간다. 곤충이 인기있었다. 메뚜기, 귀뚜라미, 심지어 흙속의 벌레들까지 잡기만 하면 끓여서 먹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도 벗겨내서 씹어삼켰다. 비록 쓰기 때문에 삼키기 힘들었지만, 최소한 배는 채울 수 있었따. 약방의 약재도 모조리 먹어버린다. 인삼이건 초약이건 굶주린 사람들은 빼앗아가서 끓여먹었다. 나중에는 분변까지도 뒤져서, 그중에서 소화되지 않은 식량찌꺼기를 찾았다. 성안의 길거리에는 더 이상 예전의 분주함이 없어졌고, 굶어죽은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수비군도 오랫동안 먹지 못해 체력이 버티기 힘들어진다. 창을 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이자성쪽도 사정은 그다지 좋을 것이 없었다. 그는 몇달간 성을 포위했지만, 개봉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수하의 농민군은 비록 인원수가 많았지만, 물자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남은 매년 전란으로 전답이 황폐해졌다. 틈군은 부근의 마을에서 약탈한 것으로 버텨야 했다. 그러나 가까운 마을을 모조리 약탈하고 나니, 더 이상 식량을 구할 수가 없게 된다.
숭정15년 구월 십사일 밤, 개봉포위공성전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날, 황하의 물이 돌연 터져서, 엄청난 홍수가 성의 북쪽문을 통해 밀려들었고, 전체 성이 수몰되어 버리고 만다. 누가 이 재난을 일으켰는지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틈군이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고의로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렸다고 한다. 어쨌든 이자성이 여러 달동안 공성해도 함락시키지 못했으므로, 이런 극단적인 수단을 취한 것도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명군내부에서 누군가 틈군의 전진을 막기 위하여 했다고 한다. 어쨌든 수비군은 이미 피로가 극에 달했고, 식량도 끊겨서, 더 이상 지킬 희망이 없어져서 위험한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황하제방이 무너진 것은 만든 지 오래 지난 데다가 매년 전란이 일어나면서 아무도 유지보수를 하지 않았고, 게다가 장마를 만나 수위가 올라갔기 때문에 제방이 버티지 못하고 터진 것이라고 한다. 진상이 무엇이든 간에, 이번 홍수는 엄청났다. 수심은 신속히 2장을 넘었다. 즉 6미터를 넘은 것이다. 개봉성은 하룻밤만에 호수로 바뀌어 버렸다.
그날 밤, 성안의 백성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따. 성안의 골목은 금방 물로 가득차고, 백성들은 물 속에서 살기위해 몸부림쳤다. 물에 뜨는 것이면 뭐든지 붙잡았다. 그러나 홍수의 힘은 너무나 거대했다. 나무, 문짝 심지어 대들보까지도 물살에 휘말려 여기저기 부딛친다. 많은 사람들은 거센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고, 어떤 사람은 떠다니는 물건에 부딛쳐 목숨을 잃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에 익사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
사후의 통계에 따르면, 개봉성에는 원래 37만명이 살고 있었고, 전쟁전에 일부 사람들은 도시를 떠났지만, 성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절대다수가 이번 화를 피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3만여명에 불과했다. 성밖의 틈군도 마찬가지로 졸지에 당하게 된다. 이자성의 본영은 성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홍수가 밀려올 때, 병사들은 천막 안에서 쉬고 있었다. 한밤중에 혼란에 빠지고 1만명이 넘는 틈군병사들이 홍수에 목숨을 잃는다. 그들이 가져온 무기와 양초마저도 사라져 버린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그날 저녁, 개봉성내의 몇몇 핵심인물들은 몸이 빠져나가는데 성공한다. 주왕 주공효는 성안의 최고의 번왕으로서 수하 사람들이 미리 준비한 선박을 왕부 부근의 하도(河道)에 마련해 놓았었다. 주왕비와 그의 가족은 시기만 되면 떠날 준비를 했다. 이와 동시에 진영복은 하남총병으로서, 성의 방어를 몇달간 지휘했고, 성안에 양식이 바닥난 절망적인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황주(黃澍)등과 일찌감치 몇 척의 작은 배를 준비했고, 성안의 북문에 가까운 수도에 숨겨놓았었다.
구월 십사일 밤, 황하의 물이 성안으로 밀려들어올 때, 주왕은 호위와 가족을 데리고 신속히 배에 올라타 물의 흐름을 타고 성밖으로 저어갔다. 진영복과 황주등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배는 비록 누추했지만, 사전에 준비를 했고, 홍수가 완전히 출로를 막기 이전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전투의 최후를 결정지은 것이 도검이 아니라 황하물이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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