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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안룡(毛岸龍) 생사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4. 5. 30.

글: 양국선(楊國選)

 

모안룡(마오안롱)은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과 양개혜(楊開慧, 양카이후이) 사이에 태어난 세번째 아이이다. 모안영(毛岸英, 마오안잉)과 모안청(毛岸靑, 마오안칭)의 인생은 중국인들이 아주 잘 안다. 다만 모안룡의 생사는 아직도 권위있는 결론이 없고, 더더구나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금년 모택동탄신120주년의 기념활동 가운데, 마침내 수십년동안의 "실종설" "생존설" "사망설"의 논쟁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모택동은 모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양개혜는 3명의 아들을 낳았다. 즉 모안영, 모안청, 모앙룡이다; 하자진(賀子珍)은 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중 3명은 아들로 한명은 행방불명인 모안홍(毛岸紅, 小毛), 한명은 강서에서 출생해서역시 행방불명이고, 또 한 명은 소련에서 출생하여 10달만에 요절한 요와(廖瓦)이다. 3명의 딸중 겨우 살아남은 것은 연안에서 출생한 교교(嬌嬌, 李敏)이고, 또 다른 2명은 각각 복건과 귀주에서 출생한 딸들로 모두 행방불명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강청(江靑)이 낳은 이눌(李訥)이다.

 

모택동의 10명의 자녀중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4명이다. 다만 신중국이 막 성립되었을 대 가장 모택동이 사랑했던 장남 모안영은 전쟁터에서 희생되고 만다. 결국 모안청, 이민과 이눌만 남는다. 다만 그들의 일생도 전쟁을 겪으면서 유리걸식하고, 정치적으로 파란만장했으며 감정적으로 대비대통(大悲大痛)했다.

 

1. 모안룡실종설

 

1930년, 양개혜가 영웅적으로 희생된 후,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3형제는 당조직의 안배하에, 외할머니, 외숙부를 따라, 상해로 간다. 거기서 숙부 모택민(毛澤民), 숙모 전희균(錢希均)의 곁으로 간다. 모택민은 3형제를 상해비밀당중앙기관 특과공작인원인 동건오(董健吾)가 설립한 대동유치원(大同幼稚園)에서 살도록 한다.

 

1931년 여름, 비밀당조직이 파괴되면서 동건오의 신분이 노출된다. 유치원의 직원들은 체포되거나 숨어버렸다. 아이들은 아무도 관리해주지 않아서 길거리를 떠돌게 된다.

 

모안영은 막내동생은 업고, 둘째동생은 손을 잡고 끌면서 3형제의 길거리 유랑생활이 시작된다. 모안영은 나중에 이때의 처참한 생활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 돈있는 사람의 야아들이되는 것 말고는 모조리 해보았다.상해에는 외백도교(外白渡橋)가 이싸.황포차(黃包車)를 끌려면 힘이 많이 든다. 나는 동생 안청과 함께 뒤에서 밀어주었다. 그러면 몇 푼을 받는다...."

 

하루는 모안룡이 돌연 열이 나고 설사를 한다. 모안영은 모안청을 데리고 나가서 구걸을 했다. 돌아와보니 모안룡이 보이지 않았다.

 

동건오는 사방으로 숨어다니면서, 모안영, 모안청이 길거리를 떠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처인 정란방(鄭蘭芳)을 시켜 사방을 찾아다닌다. 결국 두 형제를 찾아서 집안에 거둔다. 동건오의 장모는 모씨 두 형제를 거두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항상 원망의 말을 하고 싫은 소리를 했다. 반년후, 동건오는 두 형제를 전처인 황혜영(黃慧英)에게 맡긴다. 그냥 둘이 친구의 아들이라고만 말하고, 한 명은 양영복(楊永福), 한명은 양영수(楊永壽)라고 알려준다.

 

처음에 황혜영의 집으로 갔을 때, 두 형제의 생활비는당조직에서 매월 제공했다. 그외에, 동건오는 매월 황혜영에게 20위안의 생활비를 보태주었다. 1933년초, 상해당조직기관이 강서 서금으로 옮겨가면서, 모안영, 모안청의 생활비공급은 끊어지게 된다. 이때 동건오는 이미 고정된 수입이 없었다. 당시 황혜영에게는 이미 4명의 자녀가 있었다. 거기에 모씨 2형제를 더해서 7식구가 그녀의 장남 동재원(董載元)의 얼마 안되는 급여로 생활해야 했다. 궁박한 상황하에서, 황혜영은 모안영과 모안청에게도 돈을 버는 일을 시킨다. 그녀는 이웃의 담보로 신문을 발행하는 사주에게 약간의 보증금을 내고, 매일 각종 신문을 받아와서, 모안영, 모안청에게 길거리에서 신문팔이를 하도록 시켰다.

 

하루 저녁에 장부를 대조해보니, 모안청은 신문을 팔면서 위조지폐를 적지 않게 받은 것을 발견한다. 돈을 벌지 못했을 뿐아니라, 손해를 본 것이다. 모안청은 황혜영에게 욕을 얻어먹는다. 이미 두끼를 굶은 모안청은 위조지폐가 몇몇 외국인 선원이 신문을 살 때 준 것이라고 여기고, 화가 난 나머지, 분필을 들고 큰 길로 나가서, 전신주에 비뚤비뚤하게 "타도양인(打倒洋人)"이라는 4글자를 쓴다. 이를 통해 마음 속의 울분을 푼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홍두아삼(紅頭阿三, 인도순포)'에게 발견되어 순포는 그의 뺨을 힘껏 갈긴다. 모안청은 즉시 머리가 아프고 깨질 것같아서, 땅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른다. 나중에 달려온 모안영이 그를 업고 돌아갔는데, 병을 심하게 앓는다. 적시에 치료를 받지 못하여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병을 얻게 된다.

 

모안영, 모안청은 황혜영의 집에서 4년간 생활했다. 비록 아주 힘들었고, 씁쓸했지만, 그래도 백색공포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안영의 미망인인 유송림(劉松林)은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결혼한 후, 안영은 나를 서사승리영화관으로 데려가서 <삼모유랑기>를 본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그 영화를 보면서 옛날 느낌이 났는지 아주 격해졌다. 영화가 끝난 후, 영화관에는 사람들이 모두 떠났는데, 그는 여전히 영화의 스토리에 빠져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와 동생이 상해에서 유랑한 경력이 삼모와 아주 비슷하다고. 자신과 삼모를 비교하면, 자본가의 양자가 되거나 물건을 훔치지 않은 두 가지를 빼면, 삼모가 겪었던 고생은 자신도 모두 겪었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상해에서 그 되돌아보기도 싫은 6년의 유랑생활을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은 그의 특수한 경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현실생활에서의 삼모유랑기는 대모, 이모는 괜찮은 편이나, 가장 어린 삼모는 실종되었다.

 

2. 모안룡생존설

 

1931년, 상해지하당이 파괴되고, 대동유치원도 폐쇠된다. 모안영은 두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를 유랑한다. 하루는, 경찰의 추격을 받아, 모안룡이 실종된다.

 

나중에, 상해에 육백권(陸柏權)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부친이 바로 모택동의 셋째아들 모안룡이라고 주장한다.

 

육백권에 따르면, 1935년 장정 전에, 모택동은 3개월간 실종되었다. 기실 모택동은 비밀리에 상해로 와서 '이란각(李爛脚)"이라는 가명으로 비밀리에 장정에 쓸 자금을 모금했다. 당시 상해탄의 대형(大亨) 황금영(黃金榮)에게 돈을 빌렸다. 황금영의 조건은 아들 1명을 인질로 잡겠다는 것이었고,당시 8살된 모안룡을 선택하면서 나중에 육진발(陸進發)로 개명한다.

 

다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1935년 1월, 홍군은 장정하는 동안 준의에서 준의회의를 거행하고, 모택동의 지도자지위를 확립한다. 모택동이 비밀리에 상해로 갔다는 기록은 없다. 장정전인 1934년, 모택동안 1월에 지도자직무를 잃는다. 5월에 강서남부로 조사를 떠나서 회창에 거주한다. 당시 감남(南, 강서남부)군구사령원 공초(龔楚)가 그를 만나러 갔을 때 술을 마신 후 모택동은 장탄식을 내뱉는다: "나는 혁명에 참가한 이래, 3번이나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고 8번이나 엄중경고처분을 받았다. 이번에는 실패를 조성한 책임을 모조리 나에게 떠넘겼다. 현재는 우리들 정강산 동지의 천하가 아니다." 말을 하면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렸다. 9월에 학질을 앓고 영도(寧都)에 칩거한다. 10월 장정이 시작된다. 이 시기에 모택동은 비밀리에 상해로 가서 장정의 자금모집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모택동이 상해로 가서 자금모집한 사료기록도 없다.

 

해방후, 정부도 인력을 대거 동원하여 모택동의 흩어진 가족을 찾아나섰다. 모택동의 처제인 하이(賀怡)는 모택동과 하자진 사이에 태어난 모안홍을 찾다가 강서에서 자동차사고를 당해서 불행히도 사망한다. 일찌기 모안룡을 찾아나섰지만, 여러가지 견해가 있고, 모두 성과는 없었다.

 

다만, 육백권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부친은 6번 북경으로 가서 신분을 드러냈고, 주은래가 사람을 보내어 접대했다. 그러나 나중에 중앙에서는 모택동이 일찌기 '이란각'이라는 가명을 써서 상해로 장정의 자금모집을 하러 간 것을 부인한다. 문혁후,육진발은 반동분자로 지목되고 현재는 이미 84세이다.

 

1996년, 육진발의 장남 육백권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조상찾기'에 나선다. 다만 2001년 상해당국에 의하여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당했고, 작년에야 풀려났다. 그는 다시 양모와 함께 북경으로 간다. 모두 그의 몸매와 용모가 젊었을 때의 모택동과 아주 유사하다고 말한다. 비록 더 이상 강제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감시를 받고는 있다. 육백권은 당국이 그의 부친과 그의 혈액감정을 거절하는 것은 말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은 모택동이 황금영에게 인질로 넘겨주고 돈을 빌렸기 때문에 모택동의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집요하게 '조상찾기'에 나서는 것은 그저 자신의 신분을 되찾고자 함인데, 그의 바램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외에 또 하나의 노점상에서 유행하는 '다큐멘터리문학' <모택동의 아들: 모안룡>이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회에서 생사불명이라는 소문이 도는 모안룡은 세상에 살아있다. 이 '모안룡'은 일찌기 한 개명한 곳에서 양자로 들어갔고, 강남항일부대에 참가했으며, 항미원조전쟁(한국전쟁)에서 부상도 입었다. 일찌기 '모택동'이 명을 내려 자신이 모안룡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했다...작자는 이 수수께끼같은 '모안룡'을 인터뷰했다고 하며, 책의 첫머리에 자신은 '충실하게' 그의 힘들었던 역정의 모든 시간의 울음소리, 웃음소리, 총소리, 포소리를 기록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모안영의 미망인 유송림은 몇 페이지를 넘겨보더니, 웃으면서, "나는 여러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은 모두 믿을만한 것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3. 모안룡사망설

 

1931년 봄, 상해지하당이 엄중하게 파괴되고, 삼형제는 상해의 길거리를 유랑한다. 어린 안룡의 거취는 지금까지 수수게끼이다: 일설에는 상해에서 실종, 사망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고 아마도 세상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설에서는 세균성이질로 상해 광자의원(廣慈醫院)에서 사망했는데, 지금의 서금의원(瑞金醫院)이다.

 

드라마 <모안영>은 마지막 견해에 따랐다. 이 드라마의 고문 겸 총감제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원의 한 여성동지가 모안영에게 동생은 병독성이질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31년 5월말 혹은 6월초의 어느 날 밤, 모안룡은 돌연 병이 난다. 설사와 고열이 있어서 보육원 진봉영(陳鳳英, 일명 秦怡君, 이구실(李求實)열사의 미망인)은 그를 안고 부근의 광자의원으로 가서 진료받았다. 그러나 치료를 하지 못하고 그날 밤에 사망한다. 다음 날, 유치원에서 행정사무를 책임지는 요아부(姚亞夫)가 관을 사서 염을 하고 장례를 치른다.

 

다만 나중에, 소화(邵華)가 그 의원으로 가서 모안룡의 병력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2013년 12월 26일은 모택동의 탄신120주년이다. 중앙에서는 융중한 기념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6월 26일, 소산 모택동동지기념관의 특별전시실은 2년의 시간을 들여서 새로 조정한 후 다시 개방된다. 전시된 문물, 사진은 600여점이고 그중에는 처음 전시되는 진귀한 문물도 많이 있었다.그 배후의 숨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중 모안룡에 관한 설명은 이렇다: 1931년초, 모안룡은 숙부 모택민이 어레인지하여 상해대동유치원에 들어간다. 얼마후 이질을 앓아 사망한다.

 

그러므로, 모안룡이 이질로 사망했다는 것은 믿을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