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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 장녀 행방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4. 8. 26.

글: 노리람사(老李覽史)

 

홍군의 동정(東征)때, 모택동은 하자진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낳는다. 다만 전투과정이어서, 아이는 현지 농민에게 키워달라고 맡기게 된다.

그 딸은 농민에게 맡겨진 후, 그녀의 생사는 수수께끼가 된다. 이 '홍색공주'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중앙에서부터 복건지방까지 관련인원들은 수십년동안 계속하여 찾고자 노력했다.

'홍색공주'를 찾는 과정은 전설적이고 최종결과도 탄식을 불러오게 만든다.

 

1930년 초봄의 복건서부 산간지구. 두 필의 빠른 말이 용암산성의 얕은 안개를 뚤고 달려, 한 홍군소부(紅軍少婦)를 호령산록의 애화의원으로 데려갔다. 여기에서 나이 갓 스무살의 하자진은 장녀를 낳는다. 이름은 "모금화(毛金花)"라고 짓는다. 아이가 한달도 되기 전에 민서특위서기 등자회(鄧子恢)의 소개로 눈물을 흘리며 용암성(龍巖城)에서 신발수리하는 장인 옹청하(翁淸河)에게 맡긴다.

1932년 봄, 모택동은 홍군동로군을 이끌고 장주를 친다. 도중에 용암을 지난다. 모택동은 딸을 아주 보고싶었지만, 군정사무가 많아서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때는 하자진이 부대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정을 아는 등자회도 멀리 다른 곳에 있었다. 모택동은 동생 모택민에게 대신 가서 보고 오라고 분부한다. 모택민은 용엄성구 소비에트정부 주석의 안내를 받아, 신발수리장인 옹청하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는 딸이 이미 죽었다고 말한다. 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탄식을 뱉어낸다: "정말 안타깝구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하자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건국되자마자, 그녀는 여러가지로 사람을 시켜 찾는다. 동생 하이(夏怡)는 강서로 모택동의 자녀를 찾으러 가는 길에 죽고 만다. 1951년, 정무원 내무부장 사각재(謝覺哉)는 중앙위문단을 이끌고 민서로 가서 옛소비에트구의 인민을 위문한다. 모택동도 그에게 딸의 행방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한다. 

1953년, 모택동은 다시 고향으로 친척을 만나러 돌아가는 등자회에게 정중하게 이 일을 부탁한다: "등노. 나의 딸 하나가 아직도 용암에 있다. 당신이 돌아간 후 내 대신해서 알아봐 달라. 아직도 살아있는지 아닌지."

등자회는 이렇게 말한다: "주석은 안심하십시오 제가 용암으로 돌아간 후 반드시 조사해내겠습니다. 결자해지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등자회는 부인 진란(陳蘭)을 데리고 용암으로 돌아간 다음 날, 옹청하를 찾아가서 상세히 조사한다. 이 신발수리공은 처음부터 딸이 이미 죽었다고 말한다. 등자회는 어쩔 수 없이 북경으로 돌아와 모택동에게 보고하고, 모택동은 아주 침통해 하며 말한다. "안타깝다. 정말 안타깝다." 모택동은 등자회에게 300위안의 돈이 들어 있는 봉투를 주면서, 그를 대신하여 옹청하에게 전해주라고 말한다.

1963년 초여름, 당시 전국부련(婦聯) 부주석으로 있던 강극청(康克淸)은 복건성 부련당조서기 임만군(任曼君, 임필시의 당매)에게 관련상황을 확실하게 확인해달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복건성부련과 용암지구부련,용암현공안국은 비밀공작조를 만들어 조사에 착수한다.

 

1964년 원단(元旦)이 지난후 얼마 되지 않아, "양월화(楊月花)"라고 서명한 서신이 용암행서(龍巖行署) 부전원(副專員) 오조방(吳潮芳)에게 신세내력을 조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양월화의 서신은 용암으로 가서 지도업무를 하던 복건성 성장 위금수(魏金水)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64년 1월 17일 위금수의 주재하에, 용암현위는 양월화 및 그녀의 양모 구란자(邱蘭仔), 외숙모 정추지(鄭秋地) 및 옹청하 부부등 관련인원들이 참석한 좌담회를 열게 된다. 구월자는 양월화가 자신이 낳은 딸이 아니라고 솔직히 털어놓는다(월화에게 양씨성을 준 것은 구란자의남편의 성이 양씨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응송(邱應松, 양월화의 '백부')가 데려온 홍군 아이였다는 것이다. 옹청하는 이렇게 말한다. 1930년 5,6월경 홍군이 용암을 떠나기 전날, 그는 등자회의 소개로 모금화를 맡았다. 얼마후 국민당 백군이 오고, 그는 아주 두려워서, 부인 임대고(林大姑)에게 감추고 모금화를 상회 이웃 석벽두의 옹고(翁姑)에게 주어 기르게 했다. 얼마후, 국민당의 여단장 양봉년(楊逢年)이 찾아와서 그를 심문했고, 모택동의 아이의 행방을 물었다. 그는 옹고까지 연루시키는 것이 겁이 나서, 아이가 죽었다고 거짓말한다. 옹고는 모금화를 기른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후에 이사람 저사람의 손을 거쳐 구응송에게 넘어간다. 해방후 정부에서 아이의 행방을 조사할 때에도 옹청하는 '죽었다'고 말한다. 그래야 골치아픈 일이 적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옹청하는 말을 마치고 양월화를 가리키며 위금수에게 말한다: "위성장. 양월화가 바로 옛날 모주석과 하자진 사이의 딸 모금화입니다."

위금수는 일의 경위가 어느 정도 밝혀지자, 부드럽게 옹,구 두 집안 사람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먼저 돌아가 쉬어라. 내일 너희 두 집안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겠다. 모두 거기서 상황을 보충해서 얘기하자."

 

하룻만에, 옹청하는 다시 말을 바꾼다: "위성장에게 보고합니다. 어제는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모주석의 딸은 다음해 6월 초열흘가량까지 길렀으나, 불행히도 병사했습니다...."

위금수는 엄숙하게 물었다: "너는 어제 양월화가 맞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지금은 다시 아니라고 하느냐?" 옹청하는 교활하게 변명했다: "어제는 제가 양월화와 함께 회의에 참석했는데, 당시에는 그녀가 면전에 있어서 나는 부득이 인정하는 말을 몇마디 했을 뿐입니다." 옹청하가 말을 자주 바꾸므로, 조사 및 증거수집업무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옹청하는 왜 말을 자꾸 바꾸는가?

옹청하의 딸 옹춘목(翁椿木), 사위 소인홍(蘇仁鴻)은 이렇게 말한다: "첫째는 해방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하가 홍인지 백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하늘이 바뀌어' 이후 국민당이 공격해왔을 때 이 일을 알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사실대로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말하면 정부에서 아이를 내놓으라고 할 텐데, 내놓을 수가 없다. 그러면 불인불의하게 주석의 딸을 버린 죄명을 뒤집어 쓸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물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이번에 정부에서 와서 조사할 때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 나는 이미 죽었다고 말했는데, 현재 사실을 얘기하면, 내가 정부를 속였다고 할까 겁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이를 내놓을 수 없다. 아예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소인홍은 이렇게도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이익을 얻으려고 했다." 그는 예를 들어 말한다: 1964년, 옹청하는 주석에서 양월화가 모주석의 딸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뒤로 양월화의 집에 돈을 달라고 했다. 내가 이미 이 일을 정부에 분명히 말했으니, 너는 일자리도 생기고, 돈도 생길 것이다. 이후 북경으로 가서 잘 살 것이니, 나에게 돈과 술을 사라. 당시 양월화는 이미 자식이 6명이 있었고, 양모 구란자까지 일가 9식구였다.생활은 여전히 멀리 상해에 있는 작은고모가 도와주고 있었다. 무슨 돈이 있어서 그에게 주겠는가. 옹청하는 돈을 뜯어내지 못하자,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결론을 뒤집어 버리겠다. 나중에 전안조가 오면 모금화는 죽었다고 말하겠다."

다음 날, 옹청하는 말을 바꾸어 양월화는 죽었다고 말한다. 위금수는 아주 화가 나서, 소인홍에게 나서서 설득작업을 하도록 시킨다. 그러나 옹청하는 사위에게 이렇게 말한다: "양월화는 배은망덕하다.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 나는 그냥 확 흐트려 놓고 말 것이다." 소인홍은 그를 설득했다: "모두 인정하는데, 네가 도와주면 안되느냐?" 옹청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옹청하가 협력하지 않아서, 양월화의 신분은 결국 확정되지 못하고 만다.

 

"문혁"의 폭풍이 몰려올 때, 양월화는 조반파의 공격을 수시로 받았다. 멀리 북경에 있는 등자회가 한번은 집안에서 북경으로 찾아온 용암 보반파의 두목을 만났을 때 명확히 말한다: "양월화의 출생년월이 맞고, 혈액형도 모주석과 완전히 부합한다. 너는 돌아가서 양월화에게 말해라. 그녀가 바로 모금화이다. 그리고 직접 상해로 가서 그녀의 엄마 하자진을 찾으라고 해라." 등자회는 이때 이미 그녀를 인정하는 편에 섰다. 용암의 조반파 두목이 용암에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자, 그는 금방 '나쁜 놈'으로 규정되어 압송조사를 받는다. 용암의 길거리에 나붙은 대자보에는 한 목소리로 양월화는 '모주석의 딸을 사칭'한다고 하고, 그녀는 '정치사기꾼'이라고 욕했다.

1971년말, 원래 복건성 교통청에 재직중이던 노홍군 나만창(羅萬昌)이 조반파에게 권한을 빼앗기고 고향 용암으로 돌려보내진다. 그의 주소는 마침 양월화의 이웃이었다. 양월화에 관한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온다. 그는 이 일을 상사인 당시 복건성 부성장 하민학(賀敏學)에게 보고한다. 하민학은 나만창과 또 다른 용암출신의 노홍군 장화남(張華南)으로 하여금 이 일을 주도면밀하게 조사확인하라고 부탁한다. 이때 신발수리장인 옹청하는 이미 죽었다. 1973년초, 나만창은 조사자료를 정리한 후 옛 상사에게 보낸다. 하민학은 북경의 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자료를 주은래에게 보낸다. 모택동은 소식을 들은 후 아주 기뻐하며 하민학에게 신속히 비행기로 딸을 북경에 보내어 한번 만나게 하다록 지시한다. 드러나 다음날 일찍, 모택동은 원래의 말을 바꾸어 딸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의심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역시 민간에서 살아왔으니 민간에서 계속 사는게 좋겠다고 한다. 하민학이 돌봐주면 된다고 했다. 사실상, 하민학이 양월화에 관한 자료를 주은래에게 보낸 후, 주은래는 아주 관심을 가진다. 1973년 8월, 몸이 좋지 않던 주은래는 모택담(毛澤覃), 하이(賀怡)의 며느리 주검하(周劍霞)를 복건에 보내어 이 일을 처리하게 한다. 주검하는 먼저 상해로 가서 병석에 누운 하자진을 만난다. 그리고 조용히 이모에게 용암에 남겨둔 딸에게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물어본다. 하자진은 기억을 되살려 말한다: 그녀의 오른쪽다리에 비교적 큰 검은 점이 있었고, 무릎앞에는 두 개의 작은 검은 점이 있었다고. 주검하는 천리 먼길을 달려 복주에 간 후, 하민학은 그녀에게 용암으로 가서 나만창을 찾고, 그에게 양월화와 만나게 해달라고 하라고 시킨다.

양월화를 만난 후, 어떻게 '태기(胎記)'를 확인할 것인가가 난제였다. 나만창의 딸 나해명(羅海明)이 아이디어를 내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큰 소리를 낸다: "좋지 않다. 벼룩이 있다." 주검하등은 바로 이해하고 약속을 한 듯이 바지를 걷어올렸다. 양월화는 그것에 계책인줄 모르고 따라서 바지를 위로 걷어올려서 바지에서 벼룩을 찾는다. 주검하, 나만창이 살펴보니 과연 오른쪽 무릎에 검은 점이 있었다.

주검하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용암현혁위회선전조의 두조장은 하민학의 동의를 받아, 양월화를 상해로 데려가서 친척만남을 주선한다. 누가 알았으랴 상해로 가서 1달을 기다렸지만, 하자진과 만날 수가 없었다. 원래 상해에 오기로 되어 있던 주검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만창의 딸 나해명은 복주에서 상해로 와서 하민학의 뜻을 전한다: 상해를 떠나 복건으로 돌아가라. 화단(禍端)이 발생하지 않도록 북주로 속히 돌아가서 하민학을 찾아와라.

밤중에 양월화는 하민학의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하민학은 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월화. 너를 찾느라고 힘들었다. 너를 찾기 위해서, 나는 서북에서 복건으로 왔고, 언젠가 너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민학이 양월화를 인정하고나서 양측은 빈번하게 내왕한다.

 

1997년, 전 국무원부총리 등자회의 부인 진란은 인터뷰때, 모택동이 딸을 인정하지 않은 가장 핵심이유는 "옹청하가 등자회를 속이고, 결국 등자회도 모주석을 속인 셈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강청의 존재가 나중에 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된 점도 있다.

하민학이 양월화를 인정한 후, 하자진은 딸을 만나고 싶어했다. 1974년, 양월화가 상해로 와서 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후, 하자진은 격동했다. 비록 몸이 좋지않았고, 하민학의 복건에서의 처지도 미묘했지만, 딸을 생각하는 절박한 마음에, 그녀는 복주로 간다. 그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복건성위서기, 복주군구사령관 한선초(韓先楚)에게 양월화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한선초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중앙에 지시를 요청한다. 복주군구 부사령원 용비(龍飛)가 하민학에게 중앙판공실의 결정을 전달한다: 하자진을 양월화와 만나지 못하게 하라.

1977년, 하민학은 전면해방된다. 하자진은 기뻐서 복건으로 가서 오빠를 만난다. 그리고 특별히 오빠가 인정한 '딸'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지당한다. 1984년 4월, 하자진은 세상을 떠나고, 이 일을 말없이 그렇게 종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