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명(佚名)
"주석결혼(主席結婚), 경천동지(驚天動地)"
1938년 11월 20일, 하자진(賀子珍)이 소련으로 떠난 후 근 1년간 홀아비로 지내던 모택동은 상해에서 온 여배우 남평(藍萍)과 결혼을 한다. 바로 이 날, 연안은 돌연 일본군 전투기의 폭격을 받는다. 그래서 민단에서는 이 명언이 생긴다: '주석결혼, 경천동자'. 그리고 모택동의 집도 봉황산(鳳凰山)에서 양가령(楊家嶺)으로 이사가게 된다.
결혼후, 이 남평이라는 여인은 강청(江靑)으로 개명하고, 30년후에 이 이름은 20세기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남평은 서안팔로군판사처의 소개로 1937년 팔월하순 연안으로 온다. 연안에 도착한 후, 남평은 자신의 당적을 회복해달라고 요구한다. 중앙은 즉시 그녀에 대하여 심사를 한다. 그후 그녀는 11월 중공중앙당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여기서 당시 그녀의 모친이 일꾼으로 일을 도와주던 장씨집안의 둘째도련님을 만난다. 그는 이미 중공중앙당교교장이 되어 있는 강생(康生)이었다.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니, 남평에게는 든든한 '고산(靠山)'이 생긴 것같았다.
이 해의 설날, 막 연안에 도착한 상해구망극대(上海救亡劇隊)는 연안의 희극공작자들과 처음으로 화극 <혈제상해(血祭上海)>를 공동연출한다. 남평도 이 연극에 참여한다. 연국이 끝난 후, 중앙선전부는 연회를 베풀어 전체 공연인원을 초대한다. 남평은 바로 이 연회에서 처음 모택동을 만난다.
45세의 중공고위영도자 모택동은 막 연안에 온지 1년밖에 되지 않는 24살의 남평과 결혼한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큰 사건이다. 다만 이 일은 그다지 간단하지 않았다. 중공중앙은 이 일을 아주 중시했고, 처리도 아주 신중했다. 그리고 특별히 회의를 열어 연구한다.
이에 대하여, 모택동 본인은 1950년대에 그의 청소년시기의 친구인 주세쇠(周世釗)와 얘기할 때, 당시 중공중앙고위층이 어떻게 그와 강청의 결혼을 처리했는지 말해준 바 있다. 그는 말했다: "어느날 저녁 우리는 회의를 열었다. 내 기억에 밤 12시 반까지 회의를 했다. 주은래 동지가 돌연 나에게 말한다. 주석께서는 잠시 나가주십시오.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연구토론해야 하겠습니다. 주은래 동지가 임시로 일이 있으니 나보고 회의장에서 나가달라고 하여, 나는 할 수 없이 회의장을 걸어나와서, 또 다른 방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나중에야 나는 알았다. 그들은 나와 강청의 결혼문제를 연구토론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 중앙에서 나와 강청의 혼인문제를 토론연구할 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주은래동지가 명확히 다른 의견을 표시했다고 알고 있다. 다만, 우리 당의 조직원칙은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중공은 나와 강청의 혼인을 그래도 동의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연안에서 강청과 혼인할 수 있었다."
비록 중공중앙이 모택동과 강청의 결혼에 동의하였지만, 다만 중공중앙은 여전히 강청에 대하여 "약법삼장"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 통해서 당내의 지위를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일, 모택동 하자진의 부부관계는 여전히 존재하고, 정식으로 해제되지 않았을 때, 강청 동지는 모택동의 부인으로 자처할 수 없다.
제이, 강청동지는 모택동 동지의 기거와 건강을 책임지고 보살피고, 금후 누구도 당중앙에 유사한 요구를 제출할 권리가 없다.
제삼, 강청동지는 모택동 동지의 개인생활과 사무를 관장하고, 이십년내에 당내에서 여하한 직무도 맡을 수 없고, 당내 인사에 간여하거나 물어볼 수 없으며, 정치생활에 참가할 수 없다.
이 '약법삼장'은 왕약비(王若飛)의 노트에 나오는 것이다. 국민당군대가 1947년 연안에 진입할 때 획득한 후 공개한다. 왕약비는 당시 중공중앙 비서장이고, 그가 기록한 이 회의기록은 신뢰성이 있다.
1938년 모택동과 강청이 결혼한 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기까지의 20여년간, 강청은 그의 개인생활을 보살피는데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확실히 "약법삼장"에 규정한 대로 강청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사정은 공산당이 승리하여 북경에 진입한 후 약간 변화가 발생한다. 그 '약법삼장'은 실제로 강청에 대하여 효력이 약화되고, 무슨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 얼마 후, 모택동은 소련을 방문한다. 바로 이 때 멀리 모스크바의 모택동은 강청이 신해방구로 가서 '보고 싶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이 요구는 아주 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모택동은 동의한다. 다만 '약법삼장'이 걸렸다. 모택동이 서신은 전보를 통하여 북경에서 당중앙업무를 주재하는 유소기를 통하여 강청에게 전달된다. 서신에는 이렇게 썼다.
소기동지 읽은 후 강청에게 전달바람:
1월 1일 전보는 받아보았음. 당신이 신구로 가서 보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반드시 소기동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가 동의한다면, 중앙정치연구실 연구원의 명의로 중앙조직부에서 소개서를 써서 신구의 당조직에 전달하라. 그러므로 요로언(廖魯言) 동지와 잘 얘기할 필요가 있고, 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신구에 간 후에는 자료수집에만 주의하고 의견을 발표하지 말라. 그리고 반드시 현지 당정에 지나치게 부담을 주지 말라. 이상의 일은 모두 소기동지와 협의하고 그에게 결정하게 하라.
모택동
1월 4일 오전 4시
모택동의 서신 중에서 가장 왕래서신이 많은 것은 강청이다. '문화대혁명'중에 수백건이 넘는다. 이 서신들 중에서, 모택동이 강청에게 아주 엄격하게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에 대하여 신해방구로 가서 '보는 것'에 대하여 '약법삼장'을 정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제한도 둔다: 첫째는 '반드시 소기동지의 동의를 받아라", 그리고 규정한다. 단지 '중앙정책연구실 연구원의 명의'로 가라. 다른 특수신분으로 가지 말라. 둘째 반드시 중궁중앙 정책연구실 부주임 겸 비서장 요로언 동지의 동의를 받아라; 셋째, 신구로 가서 자료수집에만 주의하고, 의견을 발표하지 말라. 그리고 현지 당정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 말라. 마지막으로 모택동은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상의 일은 모두 소기동지와 협의하고 그가 결정하게 하라." 모택동의 전보를 받은 후, 강청은 모택동의 요구대로 유소기의 동의와 요로언의 지지를 받아내서 '신구'를 한번 갔다 온다. 그리고 확실히 현지 당정기관과 지도자들에게 무슨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강청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모택동의 비서 임극(林克)은 강청이 '허영을 좋아하고,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며, 이기적이고 질투심이 강하며, 전횡발호하며 심지어 타격하고 보복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모택동의 신변에서 12년간 일을 하면서 임극은 점점 강청에게서 '일종의 위험한 싹 - 정치적 권력욕 - 이 자라는 것"을 발견한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후, "강청은 모택동을 갈수록 더 돌보지 않고, 세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계속하여 교란시켰다. 모택동은 감정적으로 안위를 얻지 못하게 되고, 쌍방의 감정상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당연히 감정상의 이합은 양방면에서 온다. 이는 모택동의 교제가 갈수록 넓어지는 것고, 강청에 대하여 냉담해진 것과 관련이 없지 않다." 임극은 말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때, 모택동과 강청은 이미 별거했다. 그는 중남해의 국향서옥에서 수영장 곁의 한 건물로 옮겼다. 다만 그들의 혼인관계는 끝나지 않았고, 정치적으로는 서로 필요했다."
임극은 자신의 회고록 <내가 아는 모택동>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강청은 정치적으로 눈치를 잘 살폈고, 모택동이 좋아할 만한 일을 했다. 그녀는 모택동이 50년대후반부터 점점 '좌경'사상이 발전되는 것을 이용하였다. 모택동은 1962년 중공 제8기 전체회의에서 계급투쟁의 형세에 대하여 부정확한 평가를 하고, 문제가 비교적 심각하다고 보았다. 강청은 계속하여 허위정보를 전달한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문예계와 이데올로기영역의 계급투쟁을 주의하라고 강조한다. 강청은 이 시기를 이용하여, 문예계와 이데올로기영역의 계급투쟁을 장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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