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116

만력제(萬曆帝):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가? 글: 역사기실유취(歷史其實有趣) 만력14년, 서력1586년. 만력제 명신종(明神宗) 주익균(朱翊鈞)의 후계자분제가 정식으로 의사일정에 올라왔다. 황제의 나이가 적지 않고, 황제에게 아들도 있으니, 국본(國本)을 안정시키고 국조(國祚)를 이어가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루빨리 후계자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당사자인 만력제는 후계자인 황태자의 후보와 관련하여, 일찌감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은 황삼자(皇三子) 주상순(朱常洵)이었다. 당연히 그가 이 아들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애옥급오(愛屋及烏)의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주상순의 모친은 바로 만력제가 가장 좋아한 비인 정귀비(鄭貴妃)였기 때문이다. 먼저, 만력제는 일찌기 정귀비에 대하여 "유가옥질(柔嘉玉質), 완닉란의(婉嬺蘭.. 2023. 11. 7.
유백온(劉伯溫): 장량, 제갈량에 비견되는 그는 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글: 흑색군(黑色君) 민간전통이야기에서 유백온은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과 나란히 이름을 떨치는 지자(智者)이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창립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 그후 공성신퇴(功成身退)하여 귀은전원(歸隱田園)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시기를 받아 주원장 혹은 호유용(胡惟庸)에게 독살당한다. 역사상 유백온은 정말 그렇게 신기하였을까? 왜 귀은한 후에 선종하기 힘들었을까? 유백온은 주원장의 눈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유백온은 언제 관직에 나왔을까? 주원장의 부모가 아직 건재하고, 주원장 본인이 아직 지주를 위해 소를 키우고 있을 때, 유백온은 이미 지방관리를 지낸지 오래되었다. 그 자리에서 4,5년간 있은 후, 현(縣)에서는 더 이상 승진할 기회가 없다고 보고, 또한 동료들과의 관계도.. 2023. 7. 8.
왕보신(王輔臣): 일생동안 7번의 배신, 강희제에 투항한 후 왜 자결하였을까? 글: 진단설(震旦說) 스승이 어떤지에 따라, 닮은 제자가 나온다고 한다. 오삼계(吳三桂), 강양(姜瓖)이 왕보신에게 끼친 영향은 기실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삼계는 처음에 명나라의 장수였다. 이자성(李自成)이 경성에 진입한 후, 그는 이자성에게 귀순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자성이 그의 가산을 몰수하자, 다시 이자성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순한다. 청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다시 운남에서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계속하여 배반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왕보신은 원래 농민군 출신이다. 고영상(高迎祥), 이자성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여, 자형을 죽여버린 후, 명나라의 대동총독(大同總督) 강양(姜瓖)에 투항한다. 이자성이 경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강양은 투항을 선택하여, 왕보.. 2023. 6. 23.
명나라관리 엄숭(嚴嵩)의 타락사(墮落史) (2) 글: 장금(張嶔) 6. 국사를 도외시하고 양신(良臣)을 해치다. 하투문제는 명나라 경태(景泰)연간부터 이미 명나라변방을 괴롭혀온 오래된 문제이다. 물산이 풍부한 하투초원은 오랫동안 타타르부족에 점거되어 있었다. 그들의 기병,전마를 기를 뿐아니라, 그들이 남하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특히 가정연간부터, 하투에 자리잡은 타타르부락은 몽골초원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엄답칸(俺答可汗)부가 되어 있었다. 엄답칸은 용병에 뛰어나고, 대병력을 이끌고 기습전을 잘 벌였다. 여러번 대거 남하하여, 변방을 휩쓴 바 있어, 명나라의 숙적이었다. 특히 가정19년부터 21년까지 엄답한은 3차례내 대규모로 산서를 침입하여, 군민을 무수히 살륙하고 약탈했다. 가정23년에는 더더욱 크게 움직여 완현(完縣)까지 다가와서 경성까지도 .. 2023. 4. 20.
명나라관리 엄숭(嚴嵩)의 타락사(墮落史) (1) 글: 장금(張嶔) 1. 가정제(嘉靖帝)의 생각 선덕(宣德)연간부터 명나라의 최고권력은 삼각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황권의 아래에 문관집단(文官集團)과 환관집단(宦官集團)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 특히 문관집단은 내각제도가 성숙되면서, 발언권이 점점 강해져서 황권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제약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문관집단에 속하는 언관(言官)세력의 발언권도 크게 높아졌다. 이런 행정전통을 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은 우습게 보았다. 그의 눈에, 무슨 문관이든 환관이든 내각이든 도찰원이든 사례감이든 모조리 황제의 노재(奴才)인 것이다. 착실하게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것이다. 국가대사는 그저 황제인 그 본인이 혼자서 결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들은 열심히 집행만 하면 천하는 태평하게.. 2023. 4. 20.
명나라의 노왕(魯王)일맥 글: 유월(劉越) 명나라가 건립된 후, 주원장은 한고조 유방을 본받아 번왕을 두었다. 1370년 주원장의 열번째 아들인 주단(朱檀)이 태어나자, 그의 모친이 총애를 받고 있어, 두 달만에 노왕(魯王)에 봉하고, 봉지를 산동 연주(兗州)지역으로 한다. 이때부터 노왕의 세계(世係)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1. 초대 노왕: 약을 먹고 죽은 황당한 왕야 1370년은 주단이 노왕에 봉해진 첫해이다. 주원장은 사람을 곡부의 공묘로 보내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제사글에서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열번째 아들 주단을 위해 노국(魯國)을 건립하니, 그 안의 산천의 제사는 노왕이 실제로 주재한다. 아직 나이가 여려서 제사를 지낼 수 없으므로 글을 지어 신에게 바친다. 그 글은 비록 노왕이 직접쓰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신.. 2023. 1. 30.
서계(徐階) vs 엄숭(嚴嵩): 관료투쟁에서 어떻게 승리하는가? 글: 자귤(紫橘) 드라마에서 엄숭(嚴嵩)이 수보(首輔)로 있던 시기는 청류(淸流)가 엄숭(嚴嵩)과 투쟁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청류파(淸流派)는 서계(徐階),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을 핵심으로 한다. 그중 고공이 가장 과격했으며, 영원히 엄숭일당과 정면으로 부딛쳤다. 그리고 청류파중에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은 차보(次輔)인 서계인데, '과격파' 고공과 비교해보면 서계는 항상 엄숭의 주변에 있었다. 서계는 몸은 내각(엄숭의 영역)에 있으면서, 마음은 청류에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엄숭을 타도하는 것이 성공한 후, 서계가 수보를 맡고나서도 그는 엄숭에 대하여 완전히 청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엄숭을 예로 대했다. 이는 서계의 원활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렇.. 2023. 1. 26.
탕현조(湯顯祖)는 어떻게 이지(李贄)를 숭상했는가?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탕현조는 일찌기 나여방(羅汝芳)의 제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 "비성지서(非聖之書)"를 읽었다. 나중에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선종대사(禪宗大師) 자백(紫柏)과 친구로 사귀면서 특히 급진사상가 이지를 존경하여, 그의 를 읽고 매우 흠모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명덕선생(明德, 나여방)과 같은 분으로 당시 내 마음 속에 있던 사람으로 보기에 상인(上人, 자백)의 웅(雄)과 듣기에 이백천(李百泉, 이지)의 걸(傑)이다. 그들의 말을 찾아낸 것은 마치 아름다운 검을 얻은 것과 같았다." 탕현조는 수창(遂昌)의 임지를 떠난 후, 일찌기 임천(臨川)에서 이지와 만난 바 있다. 이지가 옥중에서 자살한 후, 탕현조는 시를 써서 애도한다. 그는 반이학(反理學)의 달관선.. 2023. 1. 16.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의 원흉인 왕진(王振)은 충신인가, 간신인가?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토목보지변"은 명나라 수십년간 축적한 국력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날려버린 사건이다.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문신, 무장,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이 전쟁은 명나라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후 명나라는 다시 대규모로 병력을 일으켜 몽골을 공격하지 못한다.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명나라가 수십만대군을 일으켜 몽골을 친지 겨우 25년이 지난 때였다. 그리고 이 비극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왕진이었다. 천순(天順)원년, 명영종(明英宗)은 왕진의 관직을 회복시켜주고, 영예롭게 장례를 치러주고(의관총), 왕진을 위해 사당을 지어 기념한다. 지금도 그 사당은 남아 있는데, 바로 베이징의 지화사(智化寺)이다. "왕진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지내도록 하고, 사당을 세워주었다(賜王振祭葬, 立.. 2023. 1. 9.
육병(陸炳): 가정제(嘉靖帝)때 가장 큰 권세를 가졌던 숨은 인물 글: 자귤(紫橘) 탄송윈(譚松韵), 런자룬(任嘉倫)이 연출한 의 결말은 그래도 좋은 편이다. 결말은 이러하다: 융경제(隆慶帝)에 이르러 하언(夏言)의 집안을 명예회복시켜준다. 그러나 진실한 역사에서는 하언이 명예회복되었지만, 육병(陸炳)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육병은 죄를 받는다. 역사적으로, 육강(陸絳)은 진짜 육병의 아들이다. 육강의 육씨집안은 가정제때 가장 큰 권세를 가진 가족이었고, 육강의 부친 육병은 가정제를 구해준 적이 있기 때문에, 가정제의 신임을 깊이 받았다. 육병은 금의위(錦衣衛) 지휘사(指揮使)로 15년간 지내면서 뇌물을 무수히 많이 받았다. 특히 그는 엄숭(嚴嵩)과 합작하여 비교적 정직한 수보(首輔, 재상) 하언(夏言)을 제거한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정치국면은 더욱 암담해진다. 1. 육.. 2022.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