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서사대회(誓師大會)에서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격정적인 연설을 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첫째, 나, 주체는 태조고황제와 효자고황후의 적자이고, 번왕에 봉해진 이래 법과 기율을 준수해왔다.
둘째, 지금 유주(幼主, 즉 건문제 주윤문)가 즉위했는데, 간신을 신임하여, 삭번을 진행하고 우리 집안을 도륙했다. 이는 공공연히 태조고황제의 "조훈"을 어긴 것이다.
셋째, 정의와 간사는 불공대천이다. 나는 "조훈"을 따라, 천명을 받들어 '청군측(淸君側, 황제의 주변에 있는 간신을 제거함)'함으로써 사직을 안정시키겠다.
넷째, 천지신명(天地神明), 일월영감(日月永鑒)
심복장수들은 주체의 발언에 감동받아 하나하나 열정을 토해내고 있을 때, 돌연 날씨가 급변했다. 조금 전까지는 맑은 하늘이었는데, 졸지에 벼락이 치고 우뢰성이 일어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벼락이 쳐서 연왕부 궁전의 기왓장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경실색했고, 금방 격정을 토로하며 자신만만했던 주체와 모든 사람이 멍해진다: 이런 불길한 징조는 설마 하늘이 우리의 "정난(靖難)"계획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란 말인가?
모든 사람들이 탄식을 하면서 서로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나이 많은 승려가 일어서서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건 길조이다. 비룡재천(飛龍在天)이고 비바람이 불어 기와를 떨어뜨렸으니, 이는 황색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의 몇 마디 말은 의미가 컸다. 비바람은 길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곧 진룡천자(眞龍天子)가 나타날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진룡이 출현할 것이기 때문에, 비바람이 불면서 기왓장을 떨어뜨린 것은 황색기와로 바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명나라제도에 따르면, 번왕의 궁전은 녹색기와를 쓰고, 황궁만이 황색기와를 쓸 수 있었다.
그의 이 말에 현장의 분위기는 다시 들떠오른다. 여러 장병들은 그들의 지도자 주체를 다시 한번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노승의 멋진 활약은 주체의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게 된다.
도연화상
1
주체의 곤란을 해결해준 노승은 기실 연왕부에서 익숙한 인물이다. 법명은 도연(道衍)이고, 나중에 사람들이 "흑의재상(黑衣宰相)"으로 부르게 된다.
도연화상은 주체가 거병하여 조카 주윤문과 황위를 다투게 만드는 막후추진자이다. 만일 도연이 없었더라면, 주체는 정난지역에 자신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건문원년(1399년) 칠월, 주체는 조카와 공개적으로 싸우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도연의 나이는 이미 65세였다. 그러나 3년여의 정난지역을 전후하여 도연은 사실상 주체의 대군사(大軍師), 총참모장 역할을 한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도연은 올바른 화상(和尙)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요천희(姚天僖)이다. 원순제 지원원년(1335년)에 태어났고, 소주(蘇州) 사람이다. 가족대대로 의원(醫員)을 지냈으며 비교적 청빈하게 살았다.
14살이 되던 해에 요천희는 스스로 취업한다. 그는 부친의 가업을 승계받지 않고, 고향의 묘지암(妙智庵)에서 출가하여, 소사미(小沙彌)가 된다. 이때 법명 "도연"을 얻는다. 그보다 4년전에 안휘 봉양에서는 17세의 소년(주원장)이 재해로 집안이 망하여 어쩔 수 없이 황각사(皇覺寺)에서 중이 되었다.
세상살기가 힘들 때는 출가하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물며 승려는 원나라에서 특수한 지위를 지녔다. 관리는 아니지만, 관리보다 나았다. 요천희가 출가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가족회의에서 요천희의 백부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부를 해서 성취를 이루면 조정에 관직을 얻어 부모를 빛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학을 배워 방외지락(方外之樂)을 즐기면 된다." 출가하면 좋은 점이 많다. 어떻게 하더라도 리스크가 없는 것이다.
사료에 따르면, 요천희가 어느 날 거리로 나온 대화상을 보게 되는데, 양산을 씌우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며 위풍이 당당했다. 현지의 관리들보다 더욱 요란했다. 그리하여 바로 절로 뛰어가 머리를 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그가 나중에 세속 일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역으로 그를 '풍자'하기 그가 어려서부터 정치적 야심을 가졌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보여 믿기가 어렵다.
진실한 상황은 아마도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당시로서는 출가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비교적 괜찮은 선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 가난하게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요광희가 출가를 서택한 것이고, 막다른 골목에 몰렸던 안휘 봉양의 소년도 출가를 선택한 것이다. 다른 수천수만의 이름을 남기지 못한 젊은이들도 역시 출가를 선택했다.
출가후의 도연은 통상적인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았다. 그는 아주 총명했고, 여러 분야를 배워 스스로 "잡가(雜家)"로 성장한다.
그는 천태종(天台宗)을 배우고, 다시 선종(禪宗) 임제종(臨濟宗)의 고승 지급(智及)을 스승으로 모신다. 심지어 도사 석응진(席應眞)까지 스승으로 모시면서 도법(道法), 상술(相術)과 병법(兵法)을 배운다. 그는 시문을 좋아하고, 나중에 "명초삼대가(明初三大家)중 하나인 고계(高啓)등과도 "북곽십우(北廓十友)"를 맺어, 자주 시회(詩會)를 연다.
점점 도연은 당시의 일대 기승(奇僧)이 된다. 그리고 괜찮은 평가와 명성을 얻는다.
1368년, 황각사에서 승려가 된 봉양소년은 역사의 기적을 이루어, 대명의 개국황제 주원장이 된다. 그리고 도연은 주원장이 재위한 31년간 전혀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강호에서 그의 전설을 남긴다.
2
널리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도연은 숭산(嵩山)으로 가서 유명한 상사(相師, 관상가) 원공(袁珙)을 만난다. 원공은 도연의 관상을 본 후에 대경실색한다: "이 무슨 이승(異僧)인가. 눈은 삼각이고, 모습은 병호(病虎)이며, 성격은 사람죽이는 것을 좋아하니, 유병충(劉秉忠)의 류이다!"
유병충은 도연보다 120년 먼저 태어난 기승이다. 법명은 자총(子聰)이다. 대몽골국의 쿠빌라이 막부내에서 군정요무에 참여했고, 쿠빌라이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쿠빌라이가 몽골의 국명을 "대원(大元)"으로 정한 것은 바로 유병충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현재 사학계에서 유병충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그를 원나라의 설계사로 부른다. 다만 명나라초기 반원의 분위기 속에서 몽골인을 위해 일한 유병충은 자연히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도연은 원공이 자신을 "유병충의 류"라고 말하자.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뻐한다. 나중에 도연이 북경에 도착한 후, 두 차례에 걸쳐 유병충의 묘를 찾아간다. 과연 같은 유형의 사람이다.
경구(京口, 지금의 강소성 진강)에서 도연은 남조의 역사유적지를 감상한 후 시를 한 수 남긴다:
초로년래전혈건(譙櫓年來戰血乾), 연화유자반조잔(烟花猶自半凋殘)
오주산근조운란(五州山近朝雲亂), 만세루공야월한(萬歲樓空夜月寒)
강수무조통철옹(江水無潮通鐵瓮), 야전유로도금단(野田有路到金壇)
소량사업금하재(蕭梁事業今何在), 북고청청객권간(北固靑靑客倦看)
성문에는 오래 전의 전쟁으로 인한 피가 말라붙어 있고,
화려했던 모습은 반쯤 쇠락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오주산의 아침 구름은 어지럽게 흩어졌다 모이고
만세루는 사람이 없어 밤하늘의 달만 차갑다.
강물은 더 이상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철옹성으로 들어가고,
들밭에는 금단으로 가는 길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한때 휘황했던 소씨의 양나라의 사적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북고산은 여전히 푸르지만 사람들은 보길 귀찮아 한다.
도연과 동시대의 고승인 종륵(宗泐)은 이 시를 읽고난 후 이렇게 조롱하여 말했다: "이게 승려가 할 수 있는 말이냐?" 그 말에 숨은 의미는 화상이면서 소량의 사업에 대해 뭘 신경쓰느냐. 정치흥망의 일을 출가인들이 생각해야할 일인가?
사서에는 도연이 그에 대해 "소이부답(笑而不答)"했다고 되어 있다.
홍무15년(1382년), 주원장의 조강지처 마황후(馬皇后)가 사망한다. 그때 전국이 고승들을 불렀고, 주원장의 아들들을 따라 각자의 번국으로 가서 돌아가신 마황후의 명복을 빌게 했다.
명나라사람들의 야사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연이 연왕 주체와 처음 만났을 때, 도연은 모든 번왕들을 살펴보고 주체를 물색하여 적극적으로 그에게 어필한다. 다만 주체는 도연의 용모가 기괴한 것을 보고 무시한다. 그러자, 도연은 마음이 급해져서 직접 주체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한다.
"전하가 만일 저를 데리고 북평으로 가시면, 저는 큰 백모자(白帽子)를 머리에 씌워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은어(隱語)이다. 다만 주체는 금방 알아듣는다. 자신은 이미 연왕(燕王)이다. '왕(王)'의 머리에 "백(白)"모자를 쓰게 되면, 바로 "황(皇)"이 되는 것이다.
야사기록에 따르면, 주체는 그 말을 듣고난 후, 그 자리에서 도연에게 욕을 한 마디 한 후에 그를 데리고 북평으로 가는데 동의하였다고 한다.
당연히 야사의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역시 꾸며낸 이야기이다. 이것도 여전히 명나라사람들이 도연이 마음 속으로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 날조해낸 것이다.
생각해보라. 한 승려와 한 번왕이 이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들의 처음 만났을 때, 승려가 번왕에게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자는 말을 하다니, 이게 역사상 저명한 대군사가 할 짓인가, 아니면 바보 멍청이가 할 짓인가?
다시 말해서,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1382년이고, 그때는 황태자 주표(朱標)가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을 때이다. 번왕이 된지 겨우 2년되고 아직 실력이 미미한 황사자(皇四子)가 황위를 찬탈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 때인 것이다.
진실한 상황은 이러하다. 도연은 북평으로 가서, 경수사(慶壽寺)의 주지가 된다. 그리고 돌아가신 마황후를 위해 독경하고 염불했다. 그리고 이건 고승 종륵의 추천을 받아 주원장이 직접 안배한 것이다. 도연이 주체에게 무슨 '백모자'를 약속한 후, 주체가 고른 것이 아니란 것이다.
다만 도연이 장례를 마친 후 주체의 일행을 따라 북평으로 돌아갈 때, 그들은 처음 만났고, 그후 서서히 익숙해졌을 것이다.
북평 경수사에서, 도연은 개략 20년간 주지로 있었다. 이 긴 세월동안, 그가 어떻게 주체의 신임을 점차 얻었는지 그리고 편제에 없는 군사, 승복을 입은 참모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정사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건 은밀한 일이고, 아마도 쉽게 누설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사서에는 그저 모호한 기록만 남아 있다. 도연이 "연왕부에 출입하며 행적이 아주 비밀스러웠고, 수시로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밀담을 나누었다." 승려가 자주 주체의 왕부에 드나들면서, 제3자가 없는 상황하에서 두 사람이 밀담을 여러차례 나누었다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상상의 여지가 많다. 이는 명나라중기이후, 야사에서 진위가 섞인 이야기가 떠돌게된 근본원인일 것이다.
한 판본의 기록에 따르면, 도연은 주체를 위해 점을 쳤고, 두 개의 동전을 던진 후, 이렇게 말한다: "전하께서는 황제가 되고 싶습니까?" 주체는 아주 긴장하여 부인한다: "헛소리 하지 말라!" 다만 도연은 여전히 그의 점괘를 믿고 계속하여 말한다. "있습니다!"
또다른 판본에서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체가 상련(上聯)을 낸다: "천한지동(天寒地凍), 수무일점불성빙(水無一點不成氷)" 도연은 바로 하련(下聯)을 내놓는다: "세란민빈(世亂民貧), 왕불출두수작주(王不出頭誰作主)". 왕자에 머리가 나오면 "주(主)"이다. 주체에게 거병을 권유하는 의도가 아주 명확하다.
명나라사람의 필기에 따르면, 도연은 주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노승은 관상을 가장 잘 봅니다. 여러 해동안 천하를 운유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는데, 한번도 대왕과 같이 비범한 골상은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 다른 사람의 밑에서 오래 있으시겠습니까?"
도연이 점차 주체에게 거병하여 정난지역을 일으키도록 하는 과정에 대하여 유사한 기록들이 많이 있다. 비록 믿기는 어렵지만 전체과정과 주체의 실력과 야심이 팽창한 것은 나란히 했을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홍무23년(1390년), 주원장은 주체에게 북평의 병마를 이끌고 북원을 정벌하도록 명한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주체는 유용유모(有勇有謀)로 형제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주원장으로부터 높이 인정받는다. 이때부터 연왕의 세력이 날로 커지게 된다. 홍무25년(1398년) 주원장이 병사한 후, 즉위한 황태손 주윤문은 삭번(削藩, 번왕을 없앰)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이는 주체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고, 시기가 도래했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는 빈번하게 사회의 능력있는 인물들과 접촉했고, 도연과의 관계를 통하여 금방 자신의 왕부에 기인이사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원공 부자, 김충(金忠)등 점복, 관상, 참어에 능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영락조를 개창하는 공신이 된다.
3
국내정세의 발전과 더불어, 도연은 한걸음 한걸음 주체의 "유병충"이 되어갔다.
주체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은 바로 해야 한다. 주원장이 죽은 후, 주체는 사람들을 데리고 경사(지금의 남경)로 장례식에 참석하러 간다. 회안(淮安)에 도착했을 때, 신황제 주윤문이 사람을 보내어 "주원장유조(朱元璋遺詔)를 전달하며, 봉지로 돌아가도록 요구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주체는 화가 무척 나서, 장강을 건너겠다고 고집한다. 그러나 도연이 나서서 그를 말린다.
도연은 이렇게 분석했다. 현재 효도를 다하겠다는 명목으로 장강을 건너는 것은 문제가 없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했을 때 "유조"를 어기는 것이 되고, 오히려 불효로 된다는 것이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주체가 만일 지금 거병하면 합법성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인내하고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윤문이 대거 삭번계획을 추진할 때, 전설에 따르면 경사에 한 도사가 이런 노래를 전했다고 한다: "막축연(莫逐燕), 축연일고비(逐燕日高飛), 고비상제기(高飛上帝畿)....."
이 참어성격을 지닌 노래는 아마도 주윤문에게 연왕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결과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연왕이 즉시 거병하는 것에 대한 합법성을 갖게 될 것이다. 신황제가 하늘의 계시를 듣지 않고 나를 거병하도록 압박했다.
비록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우리는 믿을 수 있다. 이런 노래는 아마도 주체집단내에서 도연등이 전파했을 것이다.
역사상 참어(讖語), 동요(童謠)가 전파되기 시작할 때는 대사를 도모하는 사람의 야심이 이미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문원년(1399년), 거병을 결심하기 전에, 주체는 그의 마지막 우려사항을 얘기한다: "민심이 그에게 향하면, 어떡하지?" 주윤문은 정통을 대표하고, 민심이 그를 향하고 있다. 내가 일개 번왕으로 조정에 대항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인가?
도연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은 천도(天道)를 압니다. 왜 민심(民心)을 논하십니까?" 이런 일은 천도를 봐야하고, 천도가 바로 민심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이미 여러번 당신이 나서서 황제에 오르라고 계시했고, 그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주체가 주윤문이 파견한 심복을 속이기 위해 병이 든 척하고 있을 때, 도연은 주체를 도와 여병말마(厲兵秣馬)하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도연은 연왕주에 병기작방(兵器作坊)을 만들어, 무기를 제작하고, 병사를 훈련시켰다. 비밀이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사람을 시켜 집안에 대량의 가금(家禽)을 기르게 했다. 오리와 거위의 소리로 무기제작때 나는 소리를 가렸다.
칠월의 정난서사대회에서, 도연은 교묘하게 주체를 도와 날씨가 급변한 것으로 인한 위기를 막아내 주어 더더욱 주체의 신임을 받는다. 정난지역 3년여 기간동안 도연은 나이가 많아서, 주체를 따라가면서 전쟁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북평에 남아 세자 주고치(朱高熾)를 도와 후방을 지켰다. 그러나, 주체는 매번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항상 그에게 서신을 보내 물었다: "전투의 주요한 일은 모두 도연이 결정했다."
건문2년(1400년), 계속 승리를 거두던 연군이 동창(東昌, 지금의 산동 요성)에서 크게 피해를 입고, 주체 수하의 최고장수인 장옥(張玉)이 전사한다. 다행히 원군이 적시에 도착하여 주체는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동창전투로 주체는 엄청난 손해를 입고,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이 전투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연이 주체에게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할 것을 극력 독촉한다.
자신감을 잃은 주체와 장수들에게 도연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제가 이전에 "사행필극(師行必克), 단비양일(但費兩日)"이라고 말했는데, 지금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동창의 "창(昌)"은 바로 "일(日)" 두 개입니다. 이번에 한번 좌절했지만, 이후에는 모두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관건적인 때에 그는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에게 흥분제를 놓아주었다. 이런 개방적인 예측과 해석은 오늘날 보면 그저 문자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인들은 소위 '미신'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이런 우연한 일들의 배후에 있는 신비한 역량을 믿었다. 그래서 도연이 그의 판단을 설명한 후, 주체와 그의 장병들은 다시 한번 기세를 올려 출발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도연을 "신기"한 군사라고 말할 때, 도대체 얼마나 신비한 면이 있었던 것일까? 기실 그렇지 않다. 그는 단지 마음 속으로 하나의 판단만 있었다. 주체의 거병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후에 그는 임기응변능력을 발휘하여 계속 합리화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이전에 모든 합리화를 위한 말들은 그에게 신기한 색채를 더해주었다. 그 뿐이다.
도연의 진정한 "신래지필(神來之筆)"은 이 3년간 교착상태를 끌어오던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건문3년(1401년) 말에 이르러, 주체가 거병한지 이미 3년이 지났다. 그러나 병력이 유한하여 시종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북평, 영평, 보정의 3부만 지키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경사에서 연왕부로 도망쳐온 환관이 이렇게 보고한다. 조정대군은 모두 연왕을 치러 나갔고, 지금은 경사가 가장 수비가 약한 곳이다.
그 말을 듣고 도연은 번쩍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는 즉시 전쟁사상 상상력이 풍부한 기모(奇謀)를 낸다: "무하성읍(毋下城邑), 질추경사(疾趨京師), 경사단약(京師單弱), 세필거(勢必擧)". 성읍을 점령하려고 하지 말고, 경사로 빠르게 쳐들어가십시오. 경사는 병력이 적고 약하니,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주체도 총명한 사람이다. 바로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른다." 그는 더 이상 성 하나 땅 하나를 가지고 다투지 않고,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쾌속진군하여, 조정이 배치한 북방의 중병을 따돌린다. "연이어 여러 장수를 비하(淝河), 영벽(靈璧)에서 연패시키고, 장강을 건너 경사로 들어간다."
다음 해 육월, 연군이 경사를 점령한다. 궁안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건문제 주윤문은 행방불명이 된다. 며칠 후, 주체가 등극하여 영락제의 시대가 열린다.
생각을 바꾸니, 힘을 절반만 들이고도 성과는 배가 되었다. 이는 도연이 역사상 일류모략가로서 진정 대단한 점이다. 또한 정사에서 도연을 정난지역의 제일공신으로 추앙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4
승리는 주체의 것이면서, 도연의 것이다. 영락2년(1404년), 70세 고령의 도연은 주체에 의해 자선대부(資善大夫),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임명되어 일생에서 지위의 최고봉에 오른다.
그리고, 주체는 도연의 속성을 회복시키고 광효(廣孝)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목적은 도연(요광효)으로 하여금 환속하여 관직을 받아 영화부귀를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서에 따르면, 주체는 요광효에게 머리카락을 기르라고 했지만, 요광효는 따르지 않는다. 주체는 다시 그에게 저택과 미녀를 하사했는데, 그는 모두 돌려보낸다. 요광효는 단지 태자소사라는 관직만 받았다. "항상 절에 거처하면서, 입조할 때는 관대(冠帶)를 했지만, 돌아로면 여전히 치의(緇衣, 검은색의 승려복)를 입었다."
공명을 이룬 후에 오히려 요광효는 공명에 담백했다.
정난지역때 그는 스스로를 쿠빌라이를 보좌한 유병충에 비유했으나, 지금 그는 스스로는 그저 늙고 병든 고양이라고 말했다.
<제강행풍랑도(題江行風浪圖)>라는 시에서 그는 장강의 바람이 높고 파도가 급할 때 배를 모는 위험에 인생을 비유했다.
세인지험시풍파(世人知險是風波), 나식인심험갱다(那識人心險更多)
인심면대구의산(人心面對九嶷山), 일소살인아경간(一笑殺人俄頃間)
빈천안거양불악(貧賤安居良不惡), 명리분치유하락(名利奔馳有何樂)
차일피도심위경(此日披圖心爲驚), 노년무사불강행(老年無事不江行)
인심은 험악하고, 웃으면서 사람을 죽인다. 명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이 모든 것은 칠순을 넘긴 노승이 세상을 볼 만큼 보고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노년무사불강행"은 실제로 그가 은퇴하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난지역에서 주체가 남경을 함락시키기 전에, 요광효는 특별히 당부한 바 있다. 방효유(方孝儒)라는 사람은 절대로 투항하지 않을 것인데, 그를 죽이지 말아달라.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 독서인의 씨가 끊기게 된다(天下讀書種子絶矣)." 그러나 주체는 방효유에게 격분하여 결국 죽여버리고 만다.
어떤 분석에 따르면, 요광효는 주원장이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홍무제때는 같은 승려출신인 주원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주원장의 정치유산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보조하는 신황제 주체도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이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방효유 및 그에 연루된 사람들이 피살된 후, 요광효의 정치이상은 깨져버린다.
또 다른 분석에 따르면, 요광효는 공명을 성취한 후, 여전히 승복을 벗지 않고 은거를 지향한다. 그것은 그가 공로가 너무 높은 공신이기 때문에 처지가 아주 미묘해서이다. 공이 높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스스로 정치에 뜻이 없음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는 고인의 묘 앞에 역사, 공명, 영화, 사생에 대한 생각을 담은 시를 남긴 바 있다:
언지대화중(焉知大化中), 천지동려우(天地同旅寓)
사업수상구(事業水上沤), 공명초두로(功名草頭露)
사생량막측(死生諒莫測), 영화하족고(榮華何足顧)
불여보정덕(不如保貞德), 가환자조모(歌歡自朝暮)
공명을 헛된 것으로 보고난 후, 나이든 요광효는 정치와 약즉약리(若即若離)의 관계를 유지한다.
태자소사로서 그는 태자 주고치를 보좌했다. 나중에는 황장손 주첨기(朱瞻基)의 시강(侍講), 시독(侍讀)도 맡는다. 실제로 이런 안배는 그가 주체의 조손3대의 제왕지사(帝王之師)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흠차대신의 신분으로 고향인 소호(蘇湖)일대로 가서 이재민들을 구제한다. 고향을 떠난지 20여년후에 그는 마침내 금의환향한 것이다. 주체는 그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국고를 아끼지 말고 이재민 구제에 필요한만큼 마음껏 쓰라고.
그는 또한 <영락대전>과 <명태조실록>의 두 책의 편수를 주재한다. 특히 <영락대전>은 중국고대 최대유서이고, 중요문화거작이다.
그는 수탉을 한 마리 길렀는데, 매일 아침 닭이 울면 일어났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십여년을 아주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영락16년(1418년) 84세의 요광효는 명을 받아 남경에서 북상하여 북경에 도착한 후 병이 들어 쓰러진다. 주체는 여러번 그의 병문안을 왔다. 그때 요광효는 승려 부흡(溥洽)을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부흡은 건문제때의 고승이고, 어떤 사람은 그가 건문제의 머리를 깍고, 숨겨주었다고 말했다. 주체는 남경을 점령한 후, 주윤문의 행방을 찾지 못했고, 그리하여 부흡을 구금했던 것이다. 그후 십여년간 구금되어 있게 된다.
요광요의 요청을 듣고, 주체는 나이든 부흡을 풀어주라고 명한다.
주체는 다시 묻는다. 또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어본다.
요광효는 출가인이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주체가 다시 물었지만, 요광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삼월 이십팔일, 요광효는 단좌한 상태로 사망한다.
주체는 직접 요광효의 제문을 지어 요광효의 공적을 추억한다:
"광효는 진퇴존망(進退存亡)의 이치를 알았고, 안위복화(安危福禍)의 시기를 알았다. 시기에 앞서서 계책을 세우니 맞지 않는 말이 없었다. 좌우를 출입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으니, 옛날의 지혜로운 사람도 그만 못했다....자고이래로 경과 같은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일대 기승이 세상을 떠났지만, 개관정론이 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논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격렬해진다.
명나라중기이후, 문인사대부들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요광효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운다. 명영종 천순연간, 요광효의 의손(義孫)이 요광효의 "유의(遺衣)"를 입고 소주지부를 만나러 간다. 지부의 앞에서 자신의 조상의 공명을 자랑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지부는 요광효라는 말을 듣자 대도하여 한바탕 욕을 했다. 명세종 가정연간, 가정제는 요광효의 태묘에 배향될 자격을 취소한다.
청나라때, 건륭제는 직접적으로 말한다. 주체는 요광효의 말을 가장 잘 들었다. "칭병찬역(稱兵簒逆), 개용기모(皆用其謀)". 당시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요광효의 작품은 엄숭(嚴崇)의 작품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비록 글은 아름다워 문단에 나란히 실을 수 있지만." 그들은 모두 "대간대악(大奸大惡)"이므로 "그 목록만 첨부하고(附存其目)" 전문은 싣지 말도록 한다.
결국 정통관의 영향하에 요광효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사람들은 전통유가관념과 황권사상의 속박을 받아, 주체가 거병하여 황위를 찬탈한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다만, 그는 찬탈에 성공했기 때문에 욕할 수 없지만, 그를 보좌하고 부추긴 사람을 찾아서 욕을 하게 된 것이다.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제일공신' 요광효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낡은 관념하에서 사람들은 요광효를 간승(奸僧), 악인, 야심가로 욕한다. 아무도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였는지는 살펴보려 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 속으로 얼마나 애태웠는지,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단지 명나라말기 독립독행의 사상가 이지(李贄)만이 '정통성'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정곡을 찔러 말한 바 있다:
"우리 나라가 이백여년동안 휴양생식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러, 선비들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살고, 사람들이 전쟁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조문황제(영락제)와 요광효의 힘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역사를 읽을 때, 이지와 마찬가지로 낡고 우매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인물을 평가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에도 명청시대와 마찬가지로, 황위를 찬탈했으냐 아니냐를 가지고 역사인물의 도덕성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황권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정난지역의 본질은 역사상 여러 황실내부의 권력투쟁과 마찬가지로, 무슨 정의 비정의의 구분이 없다. 주원장의 아들이 황제가 되든, 주원장의 손자가 황제가 되든,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승리자에 대하여 우리가 봐야할 것은 그가 그의 전임자보다 더 잘했느냐 아니냐이다.
실패자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의 정신을 숭상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관념을 고수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들의 처지를 동정할 수 있지만, 그들의 선택을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역사상의 변천을 깊이있게 통찰할 수 있다. 주체를 어떤 위치에 놓을지 알 수 있게 되고, 주윤문을 어떤 위치에 놓을지 알 수 있게 되고, 방효유를 어떤 위치에 놓을지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요광효를 어떤 위치에 놓을지도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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