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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126

왕보신(王輔臣): 일생동안 7번의 배신, 강희제에 투항한 후 왜 자결하였을까? 글: 진단설(震旦說) 스승이 어떤지에 따라, 닮은 제자가 나온다고 한다. 오삼계(吳三桂), 강양(姜瓖)이 왕보신에게 끼친 영향은 기실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삼계는 처음에 명나라의 장수였다. 이자성(李自成)이 경성에 진입한 후, 그는 이자성에게 귀순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자성이 그의 가산을 몰수하자, 다시 이자성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순한다. 청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다시 운남에서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계속하여 배반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왕보신은 원래 농민군 출신이다. 고영상(高迎祥), 이자성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여, 자형을 죽여버린 후, 명나라의 대동총독(大同總督) 강양(姜瓖)에 투항한다. 이자성이 경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강양은 투항을 선택하여, 왕보.. 2023. 6. 23.
명나라관리 엄숭(嚴嵩)의 타락사(墮落史) (2) 글: 장금(張嶔) 6. 국사를 도외시하고 양신(良臣)을 해치다. 하투문제는 명나라 경태(景泰)연간부터 이미 명나라변방을 괴롭혀온 오래된 문제이다. 물산이 풍부한 하투초원은 오랫동안 타타르부족에 점거되어 있었다. 그들의 기병,전마를 기를 뿐아니라, 그들이 남하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특히 가정연간부터, 하투에 자리잡은 타타르부락은 몽골초원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엄답칸(俺答可汗)부가 되어 있었다. 엄답칸은 용병에 뛰어나고, 대병력을 이끌고 기습전을 잘 벌였다. 여러번 대거 남하하여, 변방을 휩쓴 바 있어, 명나라의 숙적이었다. 특히 가정19년부터 21년까지 엄답한은 3차례내 대규모로 산서를 침입하여, 군민을 무수히 살륙하고 약탈했다. 가정23년에는 더더욱 크게 움직여 완현(完縣)까지 다가와서 경성까지도 .. 2023. 4. 20.
명나라관리 엄숭(嚴嵩)의 타락사(墮落史) (1) 글: 장금(張嶔) 1. 가정제(嘉靖帝)의 생각 선덕(宣德)연간부터 명나라의 최고권력은 삼각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황권의 아래에 문관집단(文官集團)과 환관집단(宦官集團)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 특히 문관집단은 내각제도가 성숙되면서, 발언권이 점점 강해져서 황권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제약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문관집단에 속하는 언관(言官)세력의 발언권도 크게 높아졌다. 이런 행정전통을 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은 우습게 보았다. 그의 눈에, 무슨 문관이든 환관이든 내각이든 도찰원이든 사례감이든 모조리 황제의 노재(奴才)인 것이다. 착실하게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것이다. 국가대사는 그저 황제인 그 본인이 혼자서 결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들은 열심히 집행만 하면 천하는 태평하게.. 2023. 4. 20.
명나라의 노왕(魯王)일맥 글: 유월(劉越) 명나라가 건립된 후, 주원장은 한고조 유방을 본받아 번왕을 두었다. 1370년 주원장의 열번째 아들인 주단(朱檀)이 태어나자, 그의 모친이 총애를 받고 있어, 두 달만에 노왕(魯王)에 봉하고, 봉지를 산동 연주(兗州)지역으로 한다. 이때부터 노왕의 세계(世係)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1. 초대 노왕: 약을 먹고 죽은 황당한 왕야 1370년은 주단이 노왕에 봉해진 첫해이다. 주원장은 사람을 곡부의 공묘로 보내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제사글에서 주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열번째 아들 주단을 위해 노국(魯國)을 건립하니, 그 안의 산천의 제사는 노왕이 실제로 주재한다. 아직 나이가 여려서 제사를 지낼 수 없으므로 글을 지어 신에게 바친다. 그 글은 비록 노왕이 직접쓰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신.. 2023. 1. 30.
서계(徐階) vs 엄숭(嚴嵩): 관료투쟁에서 어떻게 승리하는가? 글: 자귤(紫橘) 드라마에서 엄숭(嚴嵩)이 수보(首輔)로 있던 시기는 청류(淸流)가 엄숭(嚴嵩)과 투쟁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청류파(淸流派)는 서계(徐階),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을 핵심으로 한다. 그중 고공이 가장 과격했으며, 영원히 엄숭일당과 정면으로 부딛쳤다. 그리고 청류파중에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은 차보(次輔)인 서계인데, '과격파' 고공과 비교해보면 서계는 항상 엄숭의 주변에 있었다. 서계는 몸은 내각(엄숭의 영역)에 있으면서, 마음은 청류에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엄숭을 타도하는 것이 성공한 후, 서계가 수보를 맡고나서도 그는 엄숭에 대하여 완전히 청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엄숭을 예로 대했다. 이는 서계의 원활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렇.. 2023. 1. 26.
탕현조(湯顯祖)는 어떻게 이지(李贄)를 숭상했는가?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탕현조는 일찌기 나여방(羅汝芳)의 제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 "비성지서(非聖之書)"를 읽었다. 나중에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선종대사(禪宗大師) 자백(紫柏)과 친구로 사귀면서 특히 급진사상가 이지를 존경하여, 그의 를 읽고 매우 흠모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명덕선생(明德, 나여방)과 같은 분으로 당시 내 마음 속에 있던 사람으로 보기에 상인(上人, 자백)의 웅(雄)과 듣기에 이백천(李百泉, 이지)의 걸(傑)이다. 그들의 말을 찾아낸 것은 마치 아름다운 검을 얻은 것과 같았다." 탕현조는 수창(遂昌)의 임지를 떠난 후, 일찌기 임천(臨川)에서 이지와 만난 바 있다. 이지가 옥중에서 자살한 후, 탕현조는 시를 써서 애도한다. 그는 반이학(反理學)의 달관선.. 2023.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