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정월 십칠일, 날이 밝아왔다. 대명황제 주기옥(朱祁鈺)은 신하들과의 약속에 따라, 이날은 조조(早朝)를 회복할 예정이었다.
신하들은 일찌감치 오문(午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과 북이 함께 울리는 소리를 듣고, 그들은 꼬치에 꿰인 물고기처럼 줄줄이 봉천문(奉天門)으로 들어갔다. 다만 눈앞의 황제를 보고 그들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고, 그들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나 의심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경태제(景泰帝) 주기옥이 아니라, 6년여동안 연금되어 있던 태상황(太上皇) 주기진(朱祁鎭)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때, 서유정(徐有貞)이 큰 소리로 외친다: "상황(上皇)께서 복벽(復辟)하셨다!"
뒤를 이어 주기진이 신하들에게 말한다: "경태제는 병이 위중하여, 여러 신하들이 짐을 맞이하여 복벽하게 되었다. 여러분들은 여전히 원래의 관직을 유지할 것이다!"
신하들은 그저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전날 밤인 정월 십육일 심야에, 대명제국에서는 궤이한 정변이 발생했다. 주모자는 겨우 천여명을 모아서, 하룻밤만에 대명의 황권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 장면은 너무나 조용하여 유혈충돌이 있었는지 여부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두번째로 황위에 오르게 된 주기진이 만일 회고록을 쓴다면, 책제목은 분명히 <나의 성공은 복제할 수 없다>일 것이다.
1
당연히 만일 주기진이 감추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의 실패도 마찬가지로 복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한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간 것은 기나긴 중국역사상 극소수의 망국지군을 제외하고는 주기진이 파천황의 운나쁜 경우일 것이다. 다만 이를 뒤집어 보면, 황제가 이민족에게 직접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고, 최후에 황제는 살아서 돌아왔으니, 그는 파천황의 행운아이기도 하다.
정통14년(1449년) 칠월, 몽골의 오이라트부의 수령인 예센(也先)은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침범한다. 23살의 명영종(明英宗) 주기진은 대태감(大太監) 왕진(王振)의 종용하에 흥분제를 맞은 것처럼 평행을 후회할 결정을 내려버린다: 어가친정(御駕親征).
50만의 명나라 정예부대를 이끌고 주기진은 출병한다.
대군이 대동(大同)에 도착했을 때, 왕진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주기진에게 회군을 권한다. 주기진은 변경에 도착하여 장병을 위문만 하고 다시 황궁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게 된다. 다만 왕진은 거기에서 장난을 친다. 그는 하북(河北) 울현(蔚縣) 사람인데, 회군도중에 황제가 그의 고향을 우회하여 가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고향사람들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정을 늦추게 되어, 토목보(土木堡, 지금의 하북 회래)에서 예센의 오리라트군에게 추격받게 된다.
명군은 맹공을 당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50만의 명군중 사상자가 과반수에 이르렀고, 갑옷과 물자는 모조리 빼앗긴다. 핵심은 주기진조차도 오이라트군에게 포로로 잡힌 것이다.
계속하여 뻘짓을 하던 왕진은 난전중에 호위장군(護衛將軍) 번충(樊忠)의 일추(一錘)에 격살당한다.
그 소식이 북경으로 전해지자, 전체 조정과 황궁은 혼란과 공포에 빠진다.
예센은 주기진을 명나라조정에 정치적 협박과 경제적 약탈의 자본으로 삼아, 수시로 주기진을 데리고 현재의 대동성문 밖에 나타나, 주기진의 명의로 성지를 내려 이걸 요구하고, 저걸 요구하면서, 돈을 뜯어낸 다음 돌아가곤 했다.
주기진의 모친 손태후(孫太后)는 돈을 주고 황제를 구해오려고 했다. 그녀와 전황후(錢皇后)는 궁중의 금은보화를 모두 모아 가치있는 물건은 모두 8필의 말에 실어 오이라트군영으로 보낸다. 예센은 모두 받은 후에 주기진을 돌려보내겠다늠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다.
이렇게 하여 명나라는 군주가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
주기진이 포로로 잡힌지 4일후에, 그와 동부이모(同父異母)의 동생인 성왕(郕王) 주기옥이 섭정감국(攝政監國)으로 황권을 대행한다.
다시 4일후, 주기옥은 임조청정(臨朝聽政)하고 신하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회에 참석한다. 어떤 대신은 대전에서 왕진의 죄행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왕진이 비록 죽었지만, 그의 잔당은 여전히 조정에 남아 있으니, 구족을 멸하여 천하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신하들은 함께 바닥에 꿇어앉는다.
주기옥은 명을 내려 금의위(錦衣衛) 지휘사(指揮史) 마순(馬順)으로 하여금 왕진의 가산을 몰수하게 한다.
말이 떨어지자 마자, 급사중(給事中) 왕굉(王竤)이 돌연 마순을 바닥에 쓰러뜨리면서 마구 두들겨 팬다. 여러 신하들도 가담하여 결국 마순은 조당에서 맞아죽는다.
원래, 모든 문무백관들은 다 알고 있었다. 마순은 왕진의 충실한 부하였다는 것을. 그러나 사정을 모르던 주기옥이 마순으로 하여금 왕진의 가산을 몰수하라는 명을 내리자,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순을 마구 때려서 죽게 만든 것이다. 이때 함께 맞아죽은 사람은 왕진의 두 명의 심복인 모귀(毛貴)와 왕장수(王長隨)도 있었다.
주기옥의 제1차 청정(聽政)에서 사상 유례없는 조정집단폭행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눈앞에서 세 사람이 맞아죽는 일이 벌어지자 그는 태감들의 부축하에 조용히 자리를 떠난다.
2
개략 10일후, 신하들은 태자의 나이가 어리고, 사람들을 이끌고 오이라트의 공격에 대항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손태후에게 주기옥을 황제로 세울 것을 청한다.
손태후는 주기옥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아들 주기진의 황위를 지키고자 했다. 일찌감치 주기옥을 감국에 임명하는 칙서에서도 그녀는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 황제(주기진)는 "금상미반사(今尙未班師)"하므로, 주기옥은 단지 "잠정적으로 백관을 총괄하고, 그 일을 처리하라(暫總百官, 理其事)"고 하였을 뿐이다. 다만 서서히 현실과 여론이 변화하면서, 그녀도 부득이 신하들의 요구에 따라 주기옥이 칭제하도록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주기옥은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현한다.
사서에 따르면, 그는 "재삼 사양했다(再三退讓)." 그러나 신하들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러자, 주기옥은 큰 소리로 나무란다: "황태자(주기진의 太子 朱見深을 가리킴)가 있는데, 경등은 법을 어지럽히려는 것인가?" 그러자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오직 우겸(于謙)만이 나서서 큰 소리로 말한다: "신등은 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지, 사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해내어 종묘사직을 안정시켜주시고,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십시오."
우겸의 말을 듣고, 주기옥은 비로소 안심하고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만일 토목보의 변이라는 돌발사건이 없었더라면, 주기옥은 평생 황제에 오를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는 용상에 앉았다. 이 국가를 이끌고 침입하는 이민족과 싸워야 한다. 이건 아마도 소위 천명일 것이다. 명나라때 두 명의 황제가 황제의 자리를 그저 주워먹는데, 주기옥이 바로 그 중의 한명이다.
그러나, 주기옥의 황위는 그냥 주운 것이 아니다. 어쨌든 왕조의 위기순간에 그는 사명을 지고, 제 역할을 해낸 주전(主戰) 황제였으니까. 전통적인 입장은 이러하다: 우겸이 위기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람을 조직하고 지휘하여 북경보위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명나라의 통치를 지속할 수 있게 한 것이라괴;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겸의 배후에 신황제 주기옥의 수권과 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기옥의 신임이 없었더라면, 우겸은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합심협력하여 항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시강(侍講) 서정(徐珵)등은 북경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천도하자고 주장했었다. 만일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졌더라면, 토목보의 변은 명나라 버전의 정강지치(靖康之恥)가 되었을 것이다.
남천주장에 대하여 우겸은 크게 화를 내며 소리친다: "남천(南遷)을 얘기하는 자는 참해야 한다. 경사(京師)는 천하의 근본이므로, 한번 움직이면 대사를 그르친다.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일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주기옥은 우겸을 적극 지지하면서, 그는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천을 하지 않으면 오이라트와 싸워야 한다.
예센은 명나라에 새 황제가 옹립되고, 자신이 붙잡은 주기진은 태상황이 된 것을 보고, 이용가치가 크게 떨어졌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해 십월 병력을 이끌고 북경을 공격하나, 격패당해 서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다음 해(1450년) 봄에 다시 한번 변방을 침범하나. 대동총병관(大同總兵우官) 곽등(郭登)에게 격패당한다.
우겸과 주기옥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상황하에서, 예센은 주기진을 계속하여 붙잡고 있어봐야 이득이 될 것이 없겠다고 여긴다. 차라리 그를 돌려 보내주면, 두 황제가 서로 싸우면서 명나라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 여긴다.
명나라쪽을 보면, 주기옥은 예센이 먼저 태상황 주기진을 풀어주겠다는 것에 대하여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신하들은 흥분했다. 대신 왕직(王直)등은 모두 어떻게 태상황을 영접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그러자 주기옥은 아주 불쾌해 하면서 말한다: "짐은 원래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나를 떠밀어서 앉힌 것은 실로 그대들이 아닌가!" 신하들이 당초 자신을 밀어부쳐 황제에 오르게 해놓고는 이제와서 다시 원래 황제를 모셔오겠다고 하다니, 주기진을 모셔온 다음에 너희는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다시 우겸이 일어나서 담담하게 말한다: "황위는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다른 일이 있겠습니까(天位已定, 寧復有它)" 황위는 이미 정해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다만 이치에 따르면, 마땅히 태상황은 모셔와야 합니다.
우겸의 말에 안심한 주기옥은 비로소 말한다: "그대의 말을 듣겠다. 그대의 말을 듣겠다."
오이라트인들은 주기옥을 돌려보낼 때, 한 가지 수완을 써서 명나라조정이 내분에 빠지게 만들고자 한다. 지원(知院)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는 주위를 물리친 후에 통역을 통해 주기진에게 이렇게 말한다: "황제께서 돌아가면, 지금 당신의 동생이 황제를 하고 있는데, 황제의 자리는 원래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돌아간 후 대소신료들을 겁낼 필요없이, 당신이 황제 자리에 앉으면 된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1년가량 포로로 있던 주기진은 이렇게 대답한다: "돌아가면 조종의 능침을 지키는 것이 백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같다."
권력욕에 대하여 대명으로 다시 돌아온 주기진은 거의 욕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 주기옥은 권력욕이 더욱 강해진다.
3
경태3년(1450년) 팔월, 태상황 주기진이 북경으로 돌아온 후, 주기옥은 그를 남궁(南宮)내에서 생활하도록 조치하고, 군대를 보내어 지키게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주기진이 주기옥에게 연금당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주기옥은 위기의 순간에 등극할 때 주기진은 이미 십여년간 대명황제로 있었다. 이는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주기옥의 입장에서 최대한 신하들이 이 태상황을 잊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신하들이 주기진을 알현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는 오직 손태후만이 자신의 아들을 보러 가도록 허용했으며, 그를 모시는 태감은 남궁을 출입할 수 있도록 해서, 주기진에게 최소한도의 존엄은 지켜주었다.
그는 시간의 힘을 믿었다.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연기처럼 흩어져버린다는 것을. 살아있는 전황제의 영향력을 포함해서.
주기옥의 본심은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다만 권력의 단맛은 결국 그의 욕망을 팽창시킨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앉을 뿐아니라, 자신의 아들, 대대손손 황제의 자리에 앉게 하고 싶었다. 권력의 부자승계는 부계사회의 컨센서스이고, 이 점에서 그는 사상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주기옥이 대명의 황제이지만, 태자는 여전히 주기진의 아들인 주견심이었다. 즉, 주기옥이 죽으면, 황제의 자리는 다시 주기진의 일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건 주기옥에게는 풀리지 않는 근심거리였다.
여하한 시대에도 윗사람의 뜻을 받들어 큰 보답을 받으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금방, 광서(廣西)의 한 도지휘사(都指揮史)가 병사를 살해한 것으로 체포되었는데, 그는 급히 사람을 시켜 "태자를 바꾸길 청합니다(請易太子)"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이를 통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
주기옥은 그 상소문을 보고 크게 기뻐한다. 그는 급히 예부(禮部)로 하여금 이 일을 논의하도록 시킨다. 신하들은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모두 태자를 교체하는데 동의한다고 서명한다.
경태3년(1452년) 오월, 6살짜리 주견심은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기왕(沂王)이 되고, 주기옥은 자신의 아들이자 5살된 주견제(朱見濟)를 황태자에 앉힌다.
그러나, 황태자교체건은 일부 사람들의 불만을 산다. 주기옥의 황후 왕씨(汪氏)가 명확하게 반대하다가, 주기옥에게 황후에서 폐위되고, 주견제의 생모인 항씨(杭氏)가 황후에 오른다.
겨우 1년반 후인 경태4년(1453년) 십일월, 황태자 주견제가 요절한다. 이는 아마도 주기옥의 일생에서 가장 비통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견제의 죽음은 어느 정도 후속되는 일련의 사건을 폭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주견제가 죽은 후, 주기옥은 황태자에 앉힐 다른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부 대신은 주견심을 황태자로 복위시키도록 청한다. 주기옥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자신은 겨우 26,7세이고, 정력이 왕성한데, 다시 아들 몇명을 낳는 것은 문제될 것도 없는데, 이들 대신들은 왜 조급하게 주기진의 아들을 황태자로 앉히라고 한단 말인가? 그는 한편으로 주견심을 황태자로 복위시키자는 대신을 하옥하고, 다른 한편으로 하루빨리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심지어 한때는 당시의 명기(名妓) 이석아(李惜兒)까지 내궁으로 불러들인다.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던 태상황 주기진은 황태자교체의 풍파때 다시 사람들에게 언급되기 시작한다. 주기진의 일상생활을 책임지고 있던 태감 완랑(阮浪)은 주기진으로부터 금수대(金繡袋)와 도금도(鍍金刀)를 하사받은 바 있다. 완랑은 다시 이 두 개의 물건을 그의 친구 왕요(王堯)에게 보낸다. 어찌된 일인지 이 일이 발각되고 만다. 그리고 이 일은 주기진이 복벽을 도모하는 음모로 취급되어, 완랑과 왕요가 모두 감옥에 갇힌다. 다행히 완랑은 죽을 때까지도 주기진이 복벽하려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주기진은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다.
경태6년(1455년) 칠월, 서정(徐正)이라는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이 주기옥을 만나서, 주위를 물리쳐 달라고 청한 후, 주기옥에게 "상황(주기진)은 황제로 오래 있었고, 기왕(주견심)은 황태자의 자리에 있어서, 천하의 신민들이 떠받들고 있습니다. 마땅히 봉지로 옮겨가게 하여 사람들의 기대를 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친왕의 자제를 궁으로 불러서 양육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주기옥은 그의 말을 들은 후 경악하고 대노하여 서정을 손가락으로 기리키며, "죽어 마땅하다! 죽어 마땅하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서정은 원래 주기옥이 태상황 가족의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부귀를 얻으려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주기옥의 기휘(忌諱)를 건드렸다.
주기옥은 서정을 유배보내어 충군(充軍)시킨다. 다만 내심은 서정의 말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주기옥은 주기진에 대한 연금의 강도를 높인다. 그는 주기진과 외부의 연락을 철저히 차단한다. 그렇게 하여 그가 외부인과 모의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는 남궁의 문 자물쇠 구멍에 쇳물을 부어 막아버리고, 담장을 높이고, 동시에 담장의 주변에 있는 큰 나무도 베어버린다. 그리고 일상적인 주기진의 식재료는 단지 구멍 하나를 뚫어서 넣어준다. 심지어 지필(紙筆)의 공급량도 엄격히 통제했다.
당시는 한여름이어서, 주기진은 평소에 그늘에서 시원하게 보내던 나무까지 모두 베어버리니,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옥은 어쨌든 크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는 태상황 주기진을 감금하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목숨까지 빼앗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비록 6,7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가 만일 조그만치라도 주기진이 살아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마음을 노출시켰다면, 아마도 누군가 즉시 그 뜻을 눈치채고 사람을 시켜 깔끔하게 정리하였을 것이다. 나중에 주기진이 그에 대하여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주기진은 시종 잘 살아 있었고, 판을 뒤집을 가능성은 남아 있게 된다.
4
경태7년(1456년) 연말에 이르러, 주기옥은 아들을 더 낳지도 못하고, 자신의 몸이 망가져버린다.
그는 병이 들어, 의식활동조차 참가할 수 없게 된다.
다음 해(1457년) 정월 십이일, 그는 병이 심하여 조회에 참석하지도 못하게 된다. 신하들이 좌순문(左順門)에 이르러 문안인사를 한다. 환광 흥안(興安)이 나와서 말하기를 여러분은 조정의 고굉대신인데, "사직을 위하여 생각하지 않고, 매일 그저 와서 문안인사만 하다니, 무슨 좋은 점이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여러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난다.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흥안의 말 속에 뼈가 있다고 여긴다. 혹시 대신들에게 후계자에 관한 일을 논의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사람들은 황태자에 대하여 여러가지 논의를 벌인다. 결국 모두가 당시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겸 춘방대학사(春坊大學士)로 있는 상락(商洛)으로 하여금 <복저소(復儲疏)>를 초안하게 한다. 그리고 특별히 우겸의 제안에 따라 두 마디를 덧붙인다: "청컨데 하루 빨리 황태자를 정해주셔서(乞早擇元良),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십시오(以安人心事). 폐하(주기옥을 가리킴)는 선종장황제(宣宗章皇帝)의 아들이니, 장황제의 자손을 황태자로 세워주십시오." 그후에 대신들이 서명한다. 명선종(明宣宗) 주첨기(朱瞻基)의 적손(嫡孫)은 기왕 주견심 한명만 남았다. 이 상소는 주견심을 황태자로 복위시키자는 것을 공론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틀후인 정월 십사일, 상소문이 올라간다.
주기옥은 바로 회신을 내린다: "허락하지 않는다!" 신하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짐은 단지 감기에 걸렸을 뿐이니, 정월 십칠일의 조조(早朝)에 나겠다."
신하들은 이를 황제의 몸이 호전되었다는 뜻이라고 여기고 물러난다. 삼일후인 정월 십칠일에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정월 십오일, 관례에 따라, 황제는 직접 천지에 제사지내야 한다. 주기옥은 자신이 가고 싶었으나,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총병관, 태자태사, 무청후인 석형(石亨)을 대신 보낸다.
석형은 황제의 용상 앞으로 불려갔고, 그는 주기옥의 실제 병세가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궁에서 나온 후, 즉시 사설감태감(司設監太監) 조길상(曹吉祥), 도독(都督) 장올(張 ) 두 사람에게 연락하여 이렇게 말한다: "황제는 이제 곧 돌아가실 것같다."
석형이 말한다. 경태제의 병이 이미 침중하니, 만일 불측의 일이 발생하면 태자가 없다. 차라리 상황을 모셔와서 복위시키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불세의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다. 서둘러 이루어진 음모가 이렇게 서막을 열었다.
업무를 분담하여, 조길상은 궁으로 들어가 손태후를 만난다. 그리고 손태후의 지지를 받아낸다. 손태후는 조길상에게 의지(懿旨)를 써준다: "천자(주기옥)은 병이 위중해져서 가망이 없고, 황제의 자리는 오랫동안 비어있었다. 상황(주기진을 가리킴)은 남궁내에서 지금까지 팔년을 지냈지만 성덕은 여전하고 하늘의 뜻이 그에게 있다. 간사한 신하들이 음모를 꾸며 다른 번왕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려고 하는데, 이는 국가에 불리하다. 석형등이 병력을 이끌고 상황을 맞이하라."
명나라의 일부 사료에서는 조길상, 석형등이 의지를 위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손태후가 자신의 아들이 다시 황제위에 복위할 것을 바라는 입장을 본다면, 이 의지는 사실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석형과 장올은 밤을 세워 천상(天象)을 잘 읽고, 지모가 뛰어난 서유정(徐有貞)을 찾아간다. 서유정은 바로 토목보의 변 이후, 남천을 주장했던 서정이다. 명성이 너무 나빠져서 오랫동은 승진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인의 건의를 받아 이름을 서유정으로 고친 것이다. 나중에 황하를 잘 다스린 공로로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로 승진한다. 그에게는 재능이 있었으나, 사람됨이 공리심이 너무 강해서, 항상 큰 공을 세울 생각을 했다.
석형등이 온 연유를 뜰은 후, 서유정은 흥분하여 바로 그날 밤에 천상을 살핀다. 그리고 말한다: "제성(帝星)이 이미 자리를 옮겼으니, 일을 늦출 수 없다. 빨리 손을 써야겠다!"
상세한 계획을 세운 후, 그들은 거사일시를 다음 날로 정한다. 즉 정월 십육일 저녁이다.
정월 십육일 저녁, 서유정은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서기 전에 가족들에게 당부한다: "나는 큰 일을 하러 간다.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복이고,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서씨집안은 멸문당할 것이다. 너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거라."
그는 도중에 좌도어사 양선(楊善), 노장 왕기(王驥)도 가담시킨다. 왕기는 당시에 이미 70여세였는데, 스스로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탔을 뿐아니라, 자손들까지 데리고 갔다. 석형숙질, 조길상숙질과 회합한 후, 장올도 경영병(京營兵)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의 병력을 모두 합치면 천여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모두 함께 황성으로 간다.
장올이 데려온 병력이 북경성을 들어가는 핑계는 오이라트군이 변방을 교란시키고 있어서 경성의 안전을 호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석형은 황성의 열쇠를 관장하고 있어서, 직접 대문을 열고 이들 부귀를 추구하는 망명지도들이 순조롭게 자금성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한다. 황성에 진입한 후, 마음씀씀이가 세심한 서유정은 대문을 다시 걸어잠근다. 외부의 구원병이 오지 못하도록.
사람들은 순조롭게 남궁에 도착한다. 도중에 황성 수비군을 만났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서 막지 못했다.
남궁의 궁문은 주기옥에 의해 구멍이 막혀 있어서, 어떻게 해도 열 수가 없었다. 석형은 사람을 시켜 큰 나무를 가지고 와서 충격을 가했지만,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담장에 큰 구멍을 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구멍으로 몰려 들어간다.
태상황 주기진은 이때 아직 잠에 들지 않았었다. 시커멓게 사람들이 몰려오자, 그는 죽을 날이 되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들은 그를 보자 땅바닥에 엎드리면서 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주기진이 물었다: "너희는 나를 복위시키려 온 것이냐? 그 일을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은 주기진을 모시고 대내로 들어간다. 가는 동안 주기진은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물으면서 공로를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동화문(東華門)에 이르러, 수비병사들이 막아선다. 주기진이 나서서 소리쳐 수비병사들을 물러나게 한다. 사람들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황궁으로 진입한다. 또 다른 사료에 따르면, 동화문의 수비병사들은 석형, 장올의 자제들과 소규모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진이 그날 밤 봉천전에서 등극하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하늘이 이미 밝아왔다. 대명황제 주기옥이 약속한 이날 즉 정월 십칠일에 그는 조조에 다시 나설 예정이었다.
신하들은 일찌감치 오문(午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과 북이 함께 울리는 소리를 듣고, 그들은 꼬치에 꿰인 물고기처럼 줄줄이 봉천문(奉天門)으로 들어갔다. 다만 눈앞의 황제를 보고 그들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고, 그들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나 의심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경태제(景泰帝) 주기옥이 아니라, 6년여동안 연금되어 있던 태상황(太上皇) 주기진(朱祁鎭)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때, 서유정(徐有貞)이 큰 소리로 외친다: "상황(上皇)께서 복벽(復辟)하셨다!"
뒤를 이어 주기진이 신하들에게 말한다: "경태제는 병이 위중하여, 여러 신하들이 짐을 맞이하여 복벽하게 되었다. 여러분들은 여전히 원래의 관직을 유지할 것이다!"
신하들은 그저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저명한 궁중정변인 "탈문지변(奪門之變)"은 이렇게 궤이하게 성공을 거둔다.
주기진이 다시 황위에 등극할 때, 주기옥은 세수를 마치고 조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종과 북이 나란히 울리자 그는 좌우에 묻는다: "설마 우겸이 반란을 일으킨 것인가?" 주기옥의 마음 속에,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병부상서 우겸에 대한 우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감이 와서 보고한다. 우겸이 아니라, 태상황이 복위했다고.
주기옥은 "좋다!"는 말을 세번 반복하고, 다시 침상에 들어눕는다. 그리고 벽을 마주보고 잠에 들었다. 이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우겸은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기옥의 집권초기, 제국은 전시상태였고, 병정합일(兵政合一)이었다. 병부상서 우겸은 의문의 여지없이 제국의 2인자였다. 나중에 우겸은 소보(少保) 겸 병부상서가 되고, 다시 총독군무(總督軍務)의 직위가 추가되어 권세가 최고조에 달한다. 그는 여러번 일부 직무를 사직했으나 주기옥은 "천하의 중요한 임무를 경에게 맡겼으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고 말했다.
탈문지변이 발생했을 때, 심지어 주기진이 다시 황제위에 복위하여 신하들의 조배(朝拜)를 받을 때에도,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우겸이 만일 정변을 저지하려고 마음먹었더라면, 그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가 만일 원했다면, 주기진을 다시 태상황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탈문지변이 발생할 때나 그 후에나 우겸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않는다. 이는 그가 탈문지변의 성과를 묵인한다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나중의 사가들은 이렇게 분석한다. 서유정, 석정이 탈문지변을 밀모할 때, 우겸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만일 무력으로 대항하면, 자신의 일신은 지킬 수 있지만, 명영종, 경태제의 명망을 지킬 수 없게 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서유정, 석정이 병력을 이끌고 남궁으로 진입할 때도 나두었고, 그저 앉아서 죽음을 기다렸다. "공(우겸을 가리킴)은 죽지 않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사직을 지키고자 했다."
5
우겸이 죽을 날이 마침내 왔다.
다시 황제에 오른 주기진은 내심 복수심이 충만했다. 그의 모든 빚을 받아내야만 6년간의 연금생활에 대한 울분을 풀 수 있을 터였다. 그중 최우선 대상은 바로 주기진이 의지한 "구시재상(救時宰相)" 우겸이었다.
탈문지변후의 다음 날인 정월 십팔일, 우겸은 체포되어 하옥당한다. 죄명은 막수유(莫須有)의 "의욕영립외번(意欲迎立外藩)" 즉 다른 번왕을 모셔서 황제로 앉히려는 것이라고 했다.
정월 십구일, 주기진은 삼사구경(三司九卿)에게 이 사건을 신속히 심리하도록 명한다.
정월 이십일, 20여명의 관리는 대리시(大理寺)에서 우겸에 대한 회심(會審)을 진행한다. 우겸은 혹형을 받으면서 시종 침묵을 지킨다.
정월 이십일일, 우겸은 처형된다.
사건입건부터 처형까지, 겨우 3일이 걸렸다. 이런 비상식적인 사형집행방식은 누군가 우겸이 하루빨리 죽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기진은 우겸을 죽여야할지 말지에 대하여 망설이고 있었다고 한다. "우겸은 실제 대명에 공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서유정이 곁에서 참언했다: "우겸을 죽이지 않으면, 이번 행동은 명분이 없게 됩니다." 그 뜻은 우겸을 죽이지 않으면 현재의 황위를 올바르게 얻은 것이 아니게 되고, 합법성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결국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우겸을 처형하는 같은 날, 주기진은 조서를 내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리고 경태8년을 천순원년(天順元年)으로 바꾼다. 며칠 후, 연금된 경태제 주기옥은 폐위되어 성왕(郕王)이 된다.
주기진은 조서에서 주기옥이 예전에 황제위를 찬탈한 것과 8년간의 정치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주기옥을 크게 질책한다. "불효불제(不孝不悌), 불인불의(不仁不義), 예덕창문(穢德彰聞), 신인공노(神人共怒)" 심지어 주기옥에 대하여 "기절기자(旣絶其子), 우앙기신(又殃其身)"(그 자손이 끊기고 그 자신도 재앙을 입었다)고 저주했다.
주기진의 말살로, 일찌기 오이라트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여 명나라의 수명을 연장시킨 주기옥, 우겸 두 사람에 대하여 한 사람은 '신인공노'할 혼군폭군으로 매도하고, 또 한 사람은 야심을 품은 간신으로 매도했다.
개략 탈문지변이 일어난지 한달쯤 후에 주기옥이 죽는다. 향년 겨우 30살이다. <명영종실록>에 따르면 주기옥은 병사했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주기진이 진상을 감추기 위해 사관에게 그렇게 쓰게한 것일 것이다. 야사의 주장에 따르면, 주기옥은 주기진이 파변한 태감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주기옥이 죽은 후, 주기진은 그에게 악시(惡諡)를 내린다: "려왕(戾王)". 그후, 다시 사람을 시켜 주기옥이 생전에 만들어둔 수릉(壽陵)을 파괴하고, 별도로 북경의 서교(西郊)에 그를 아무렇게나 매장해버린다.
명나라때의 황제중에서, 오직 두 명의 황제만이 황릉(皇陵)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명은 행방불명된 주윤문(朱允炆)이고, 다른 한명이 바로 경태제 주기옥이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의 배후에는 명나라에서 나라를 세운지 백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발생한 두 건의 놀라운 궁중정변이 있다. 황권의 쟁탈전은 시종 이렇게 적나라하다. 가족의 정이나 혈연은 아무 것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주기진의 주산은 황위를 그저 주운 주기옥보다 훨씬 악독했다. 주기진은 아마도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던 것같다: 나는 그저 원래 내 것을 되찾아 온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빚을 진 것이니,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진 것은 없다.
이렇게 "빚진 것이 없다"는 심리는 인간의 본성때문이다. 설사 황제라 하더라도, 그런 사람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하로서, 석형, 서유정등이 머리깨지도록 위로 올라가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항상 이기적인 생각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이끈다. 어쨌든 세상에 우겸같은 사람은 백년에 한번 보기가 힘들다.
탈문지변에 성공한 후, 부귀를 추구하던 망명지도들은 하나하나 관직과 작위를 얻는다. 그들이 어떤 작위와 관직을 얻었는지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귀찮다. 우리는 그저 기억하면 된다. 그들은 최종적인 승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황권교체의 도구에 불과했다.
이들도 결국은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한다. 명영종 주기진은 자신의 권력이 탄탄해진 후, 옛날의 탈문공신은 하나하나 난신적자가 된다. 석형, 조길상등은 모역죄로 하옥되거나 모살당한다. 석형의 모반안은 주기진이 엮은 억울한 사건이겠지만. 그리고 서유정은 정쟁에서 패배한 후, 한때 유배를 가고, 시종 그가 원하던 부귀공명은 얻지 못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 술에 취하면 집 주위를 여러바퀴 뛰면서 소리쳤다고 한다: "사람이나를 알아주지 못한다" 아마도 그는 미쳐버린 것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우겸과 마찬가지로, 모두 황권지쟁의 희생양이다. 단지 그들의 죽음은 의미가 없고, 우겸은 고귀한 인격으로 죽은 후에도 중국민족과 국가가 공동으로 떠받드는 비극적 영웅이 되었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자면, 우리는 흐르는 방향을 본다. 그럴 때면 여하한 궁중정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음모와 권모술수를 운용하여 세상사람들은 나쁜 길로 인도하는 외에, 근본적으로 흐름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탈문지변은 더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주기진, 주기옥 형제의 생사, 혹은 탈문공신의 운명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어서, 죽더라도 안타깝지가 않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싶었고, 하나의 예외도 없이 권력의 노예였다. 다만 스스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 시인이 말한 것처럼 비열은 비열한 자의 통행증이다. 그 뿐이다.
내가 이렇게 길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제국의 정변에 대하여 글을 쓴 이유는 단순히 그로 인하여 우겸이 피살된 비극으로 인하여, 시인의 다음 싯구가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고상은 고상한 자의 묘지명이다.
전체 사건에서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역사의 세례를 거치고 나면, 오직 우겸의 처지와 정신만이 시대를 초월했다. 권력을 가졌으나 최종적으로 권력을 버린 비정의 영웅, 아마도 유일하게 영혼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야말로 이 시기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추억하고, 영구히 기억해야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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