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경지월(一景之月)
1
명나라말기의 역사를 읽다보면 한 사람을 절대로 피해갈 수가 없다. 그는 바로 명장(名將) 웅정필(熊廷弼)이다.
그는 아마도 척계광(戚繼光)처럼 빛나지도 않고, 이성량(李成梁)처럼 야심이 크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의 뒤를 이은 손승종(孫承宗)만도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웅정필은 어렸을 때, 그다지 편안하게 보내지 못했다. 비록 공부는 잘했지만, 현실은 그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 않았다. 웅씨집안은 돈이 없었고, 먹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부하면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별로 바뀌지 않았다.
스무살이 되던 해, 고향인 강하(江夏,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에는 연속 3년간 기근이 든다. 일가족은 생존마저 위태로 정도가 된다. 다행히 유피(油皮, 가루를 얇게 튀긴 음식)를 팔던 노부부가 가끔 양식을 도와주어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의 극단적인 비애와 고통은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게 된다.
운이 좋게도 웅정필은 공부를 잘 했다.
만력25년(1597년) 29세의 웅정필은 향시(鄕試)에서 1등을 하고, 다음 해에는 진사(進士)가 되어, 조정으로부터 보정추관(保定推官, 추관은 지방의 법원장에 해당함)의 관직을 받는다. 이는 웅정필에게 적합한 임무였다. 그래서 그는 일을 아주 잘 처리했다.
만력28년(1600년), 보정부에 큰 가뭄이 든다. 굶주린 백성이 길거리에 넘쳐났다. 뼈까지 새겨진 기아에 대한 고통은 그로 하여금 서둘러 대응조치를 취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순무 왕응교(汪應蛟)에게 대응방안을 제시한다. 왕응교가 방안을 효과적으로 조직집행하여, 보정은 질서있게 기부금을 받아, 일시에 수천금이 모인다. 그리하여 재난상황은 상당히 완화된다. 웅정필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직접 각지를 감독하고 조사하여, 이재민구호작업이 용두사미가 되어 결국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되지 않도록 독려했다.
만력32년(1604년), 보정에는 다시 수재가 발생한다. 온 천지가 물이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해둔 2만여석의 예비양식으로 많은 이재민들은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이처럼 뛰어난 정치적업적을 이루었지만, 조정에서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
운명의 전환점은 만력36년(1608년), 39세의 웅정필이 절강도어사(浙江道御史)로 부임하고, 곧이어 요동순안(遼東巡按)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부터이다.
이건 아주 신기한 명령이다. 역사에, 대명에, 그리고 무수한 역사애호가들에게 끝없는 비애를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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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은 대명의 구변(九邊)중 하나이다. 그곳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막혀 있어, 경사를 지키는 병풍이다. 지리위치가 아주 중요하다. 대명의 수보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후, 이 비옥한 지방은 대명황제에게 영원한 골치거리가 된다. 버리기에는 아쉽고, 버리지 않고 지키려니 너무나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런 맛도 없는 계륵과도 같아, 대명황제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만력제(萬歷帝)가 좋은 황제는 아니다. 그러나 좋은 황제가 아니라고 하여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명의 다른 황제와 비교하면, 만력제는 장점이 아주 많았다. 그중 최대의 장점은 그에게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조(上朝, 조회에 참석하는 것)를 싫어했던 황제는 마치 일찌감치 웅정필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알아본 듯했다. 요동이라는 골치아픈 곳을 웅정필은 분명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가장 적합한 인물은 바로 그라고 판단했다.
사실은 증명한다. 만력제의 안목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정명했다. 웅정필이 요동으로 간 이후, 위험했던 요동의 국면은 점점 좋아지기 시작한다. 이전에 아주 강력했던 누르하치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그 원인을 생각해보면 오직 한 가지뿐이다.
웅정필은 독서인(讀書人, 문인)이고, 생긴 것도 못생겼으며, 개성도 분명하여, 어떻게 보더라도 정명한 총사령관감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웅정필이 부임하자 처음에 누르하치는 아주 기뻐했다. 그러나, 역사는 누르하치에게 확실한 교훈을 내린다. 사람을 볼 때는 겉모습만 봐서는 안된다. 총명한 사람은 겉모습 뒤에 숨은 본질을 봐야 하는 것이다.
웅정필은 생긴 것은 거칠었지만, 일처리는 아주 세심했다. 그가 요동에 발을 디딘 순간, 웅정필은 깨달았다. 단순히 힘과 힘으로 부딛쳐서는 현재 명군의 실력으로 이미 누르하치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일패도지할 정도는 아니고, 잘 운용만 한다면 승리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아주 컸다.
적의 기병은 어려서부터 말 위에서 자라고, 말타면서 활쏘고, 적진을 돌진하는 것이 이미 근육속에 기억으로 박혀 있었다. 이 점은 명군이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명군에게는 성벽이 있다. 방어는 뛰어나다. 너희 기병을 이길 수는 없지만, 너희 기병을 막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런 인식에 기초하여, 웅정필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전략을 취하게 된다. 소규모 부대를 국경밖으로 출동시켜 조금씩 누르하치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구전이야말로 승리의 관건이다.
이것이 바로 웅정필이 요동을 지켜낸 정수이다.
정수는 왕왕 정곡을 찌르고, 아주 실용적이다.
웅정필의 관리하에, 이전에 무적이었던 누르하치는 그저 수시로 유격전을 벌여 물자를 약탈할 뿐 더 이상의 이득은 얻어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좌절감으로 누르하치는 고민한다. 그리하여 웅정필에게 한 가지 별명을 붙여주게 된다: 웅만자(熊蠻子)
이 별명은 웅정필의 사람됨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는 업무를 함에 있어서 적에 대해서도 만경(蠻勁) 즉 있는 힘을 다써서 두렵게 만들었고, 대내적으로 자신의 사람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일만도저(一蠻到底)하여, 동료들이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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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정필은 안팎으로 마치 고슴도치같았다. 온 몸에 가시가 돋아 있어 누구든 그와 부딛치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군사에 기용하면 절대로 뛰어난 인재이지만,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일은 잘 못한다. 성격상의 결함때문에 웅정필은 요동에서 적지 않은 동료들과 사이가 틀어진다. 그는 누르하치를 욕한 후에는 동료들을 욕했다. 게다가 그는 자세히 설명해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요동의 동료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하루빨리 누르하치를 소멸시키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웅정필이 취하는 고수전략에 동의하지 않았다.
웅정필이 계속하여 움직이지 않자, 일찌감치 웅정필이 못마땅했던 일부 어사들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한다. 죄명은 "일의좌수(一意坐守), 공모은향(空耗銀餉)"이다. 즉 오로지 지키는 것만 생각하며, 군량미를 헛되이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죄명은 40%는 진실이고, 60%는 거짓이다. 그러나 이제 막 등극한 천계제(天啓帝)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 젊은 황제는 요동이라는 군사요충지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었고, 각종 조치는 적절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아직 젊었고, 할아버지 만력제처럼 노련하지 못했다. 더 먼 곳을 보는 안목은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목공(木工)을 좋아하는 이 황제는 할아버지처럼 웅정필을 잘 알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웅정필은 파면당하고, 원응태(袁應泰)가 기용된다.
그는 웅정필과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만일 웅정필이 거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세련된 문화인이다. 그는 품격이 고상하고, 조정에 충성심이 강한 좋은 관리였다. 웅정필이 가진 모든 결점이 원응태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이 점은 <명사>에서 그를 평가할 때도 나타난다: "원응태는 관료로서 정민강의(精敏剛毅)하다. 그러나 용병(用兵)은 그가 잘하는 분야가 아니고, 계획은 아주 엉성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원응태는 다 좋은데, 전투는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응태는 부임 후에, 웅정필은 법집행이 너무 엄격했다고 여기고, 그것은 장수의 길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는 웅정필과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관용을 베풀며, 이전의 제도와 규정을 바꾸어 버린다.
이렇게 하여 부지불식간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게 된다.
원응태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그의 앞에 닥친다. 그때 몽골의 각 부족에 큰 재난이 닥쳐서, 많은 이재민들이 관내로 들어와서 구걸을 하게 된 것이다.
곤란은 왕왕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가져온다.
몽골의 천재지변이 대명의 위기로 번진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위험신호에 대하여 원응태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다. 유리걸식하는 가련한 몽골인들을 보면서, 원응태는 졸지에 부모같은 자비심이 발동하여, 몽골이재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거두지 않으면, 너희는 적에게 투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거두게 되면, 병력을 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문을 열도록 명령하고, 직접 이들을 맞이한다. 원응태가 직접 나서니까 그에게 귀순하는 인원이 더욱 많아졌고, 원응태는 그들을 요심(遼瀋) 두 성에 배치한다.
이런 조치 자체는 큰 문제라고 할 수가 없다. 문제의 관건은 원응태가 한 가지 절차를 소홀히 한 것이다. 즉 이들 몽골이재민들 제대로 구분,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동에서 누가 이재민이고, 누가 적인지를 원응태는 확인해보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누군가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원대인이 일거에 이렇게 많은 투항병을 거두게 되면 적에게 이용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마도 거기에 적의 간첩이 끼어들어 나중에 누르하치와 안팎에서 호응하면 불측의 화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런 의문제기에 대하여 원응태는 그 부하가 너무 많이 생각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스스로 아주 괜찮다고 생각하는 해석을 내놓는다.
자신은 몽골인을 이용하여 누르하치를 상대하려는 것이다. 기병으로 기병을 대항하면, 전투에서 우리가 불리하지 않을 것이다.
금방 원응태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천진난만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투항을 받아준지 1달이 지나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누르하치가 병력을 이끌고 공격을 개시한다. 심양(瀋陽)의 수비장수 하세현(賀世賢)은 결사적으로 방어한다. 그러나 관건적인 순간에 원응태가 거둔 몽골인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그들은 군대내에서 대거 파괴공작을 하고, 수비군을 공격하며, 적인 누르하치와 호응하였다. 결국 심양이 함락되고, 하세현은 전사하며, 7만에 이르는 명군수비군은 전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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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면 여러분들도 필자와 같이 원응태의 조치에 대하여 이를 갈면서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다시 이 시기의 역사를 읽어보면, 우리는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무능한 자가 아니다. 좋은 성품과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고, 그것은 무수한 동정을 산다. 그리고 그에게는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인품에서 아무런 결점도 찾아볼 수 없는 원응태는 그저 이후 육일밖에 더 살지 못한다.
심양성을 점령한 후, 누르하치는 별로 많이 머무르지 않는다. 이 군사천재는 병귀신속(兵貴神俗), 병법은 신속한 것이 중요하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양을 점령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대를 정돈하고, 가장 빠른 속도로 다음 목표를 향한다. 요양(遼陽).
요양은 요동의 오래된 도시이다. 명나라가 개국한 후, 북방의 적을 막기 위하여, 특별히 동으로는 압록강에서 서로는 가욕관에 이르는 만리의 방어선에 9개의 방어도시를 건설한다. 요양은 바로 그 중의 하나인 요동진(遼東鎭)이다. 동시에 동북의 각 요새에 18개의 성을 쌓는다. 요양성은 그중 가장 큰 성이다.
명나라 역대황제의 노력으로 요양의 농업생산은 신속히 발전하고, 수공업, 상업도 발달한다. 명나라 동북지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군사지휘중심이 된다. 인구와 각종 군사시설, 성벽건설에서 모두 전체 요녕지역에서 최대였고, 요동제일견성(遼東第一堅城)이라 할 수 있었다.
전체 전투지속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명군이 3일을 버틴 후, 원응태는 직접 3만정예를 이끌고 누르하치의 6만 팔기군에 맞서 싸운다.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명군의 전투력도 아직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누르하치를 누를 정도는 아니었고, 결국 6만 팔기군을 이끈 누르하치의 승리로 끝난다.
패전한 원응태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그가 직접 거둔 몽골인이 성안에서 방화를 시작하고, 이어서 누르하치의 병사들이 소서문(小西門)을 통해 성안으로 진입하여 성이 큰 혼란에 빠질 줄은. 많은 주민들은 등을 밝히며 누르하치의 대군을 기다렸고, 부녀자들조차도 옷을 갖춰입고 문앞으로 나아가 영접했다.
이렇게 요양도 함락당한다.
성벽위에 서 있던 원응태는 이 장면을 보고 대세가 기울어 더 이상 만회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장전(張銓)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성을 지킬 책임이 없다. 빨리 떠나라. 나는 이곳에서 죽겠다." 말을 마치고나서, 관복을 차려입고, 보검, 관인을 차고 남쪽을 향해서 목을 매어 자결한다. 그의 처제 요거수(姚居秀)도 따라서 자결한다. 종인 당세명(唐世明)은 원응태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하며, 건물에 불을 질러 같이 죽는다.
요동의 총사령관으로서 원응태는 불합격이지만, 대명의 관리로서는 직책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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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요양이 함락당하고, 원응태가 자결하자, 전체 요동에서 유일하게 남은 곳은 광녕(廣寧, 요녕성 북진시)뿐이다.
요동의 국면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아마도 요동의 함락이 자신이 웅정필을 중용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심사숙고끝에 젊은 천계제 주유교(朱由校)는 다시 웅정필을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기용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의 관직까지 내린다. 이와 동시에 왕화정(王化貞)을 요동순무(遼東巡撫)로 임명한다. 역사는 다시 한번 증명한다. 누르하치가 강대해진 것은 명나라 내부에서 사람을 제대로 기용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천계원년(1621년) 칠월, 웅정필은 다시 한번 요동으로 간다.
여기에서 웅정필은 내각수보(內閣首輔) 섭향고(葉向高)의 제자 왕화정을 만난다.
원응태와 비교하면 왕화정은 전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요동에서 전투에 패배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해결법은 오로지 백만탕금을 뿌려서 몽골인을 극력 환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후금은 거리낌이 있어 깊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이 방안은 집행할 수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모험적이었다.
왕화정은 원응태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는데, 그것은 누르하치는 우려할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견해는 이성량시대에 대명에서 명장들이 배출되던 시기에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제 명장이 구우일모로 부족한 때이고, 누르하치는 수십년의 전투를 거쳐 경력을 쌓아서, 군사소양에서 그 어느 대명의 명장에 밀리지 않게 되었다. 이미 죽은지 오래된 이성량을 포함해서.
아쉽게도 왕화정은 그런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확실히 거친 인물인 웅정필은 인식했다. 그러나 웅정필의 배후는 동림당(東林黨)이 아니고, 뒷배경이 없는 웅정필은 일찌감치 지휘권을 빼앗겨버린다. 전체 요동의 국면은 완전히 왕화정이 장악했다. 병부상서 장학명(張鶴鳴)과 왕화정간에 오가는 문건은 모두 웅정필을 거치지 않았다.
적을 경시하는 왕화정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광녕성은 구부러진 산꼭대기에 있다. 산을 오르면 성안을 내려다볼 수 있다. 삼차하(三岔河)의 천연장벽도 있지만, 삼차하의 흙탕물은 물이 얕아 건너갈 수 있었다.
광녕성을 넘겨받은 왕화정은 배치를 시작한다: 강을 따라 6개의 군영을 설립하고, 매 영에는 참장 1명, 수비 1명을 두고 각자 지역을 나누어 지키도록 한다. 서평, 진무, 유하, 반산등 요충지에도 초소를 각각 설립한다.
웅정필은 이 방안에 즉각 반대한다. 이유는 "강이 좁아 버티기 어렵다. 보루는 좁아 사람들을 수용하기 어렵다. 지금은 광녕을 고수해야 한다. 만일 병력을 강에 주둔시키면, 병력이 분산되어 약하게 된고, 적은 경기로 몰래 강을 건너 1개영을 공격하면 버티기 어렵다. 1개영이 무너지면, 여러 영도 모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서평도 지킬 수 없다. 강에는 유격병을 두고 드나들게 하여, 적에게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야 하고, 어느 한 곳에 모아서 주둔하게 되면 적이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강에서 강녕까지 봉후를 여러 개 설치하여야 한다. 서평의 여러 곳에는 술병을 약간 두고, 적을 탐지하는 용도로만 써야 한다. 큰 병력은 광녕에 집중시켜 성밖의 형세에 따라 기각(掎角)으로 군영을 세워, 심루고책(深壘高柵)하면 된다. 요양은 광녕에서 360리 정도 떨어져 있으니, 적의 기병이 하루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소식이 있으면 우리가 미리 알 수 있다. 병력을 강에 분산시켜 방어해서는 안된다. 마땅히 자약지계(自弱之計)를 써야 한다." <명사열전제147>
나중의 결과를 보면, 웅정필이야말로 누르하치를 잘 알았다.
방안이 다르게 되면서 쌍방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웅정필은 왕화정을 미치광이로 여겼고, 왕화정은 웅정필을 겁쟁이로 여겼다.
금방 왕화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누르하치가 왔기 때문이다.
전투는 군사방안을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천계2년(1622년) 정월 십팔일, 누르하치가 대군을 이끌고 광녕을 공격한다.
왕화정은 광녕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였고, 휘하의 중군유격장군 손득공(孫得功)과 조대수(祖大壽)가 앞으로 나아가 기병충(祁秉忠)과 회합했고, 그후에 전선으로 나아가 전투를 벌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군은 평양교(平陽橋)에서 후금군과 맞닥뜨린다. 왕화정이 심복이라 여기던 손득공과 참장 포승선(鮑承先)이 누르하치의 대군을 보자 앞장서서 도망친다. 그렇게 되지 명군의 사기는 완전히 꺾여버린다. 기회를 잡은 누르하치는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고, 명군은 대패한다. 총병 유거(劉渠)가 전사하고, 기병충도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손득공은 도주했고, 수만의 명군은 전멸해버린다.
6
이번 전투실패의 결과는 자명하다.
군사요새인 서평보(西平堡, 지금의 고성자향 고성자촌)은 아무런 방어없이 누르하치의 대군 앞에 놓여진다. 누르하치는 천계2년(1622년) 정월 이십이일, 5만인마를 모아 이 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부총병 나일관(羅一貫)은 3천수비군을 이끌고 저항한다.
이 정도 인원으로 군사성보를 방어하는 것은 자살이나 다를 바 없다. 하물며 서평보는 평원에 위치해 있고, 방어에 활용할 지형지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결함을 나일관은 잘 알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앞에서 그는 철군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명군이 계속 패배하고, 계속 물러나면서, 요동의 땅은 하나하나 누르하치의 손에 넘어간다. 그런 결과에 나일관은 가슴이 아팠다.
그런 아픔으로 인하여 그는 결사전을 선택한다.
정확히 말해서, 개성이 강하고, 조정에 충성심이 컸던 수비장수는 하늘이 대명에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를 바랐다. 자신의 승리로 혹은 사망으로 강적에 타격을 가하고, 이를 통해 조정상하가 일심단결하여 공동으로 적을 상대해주기를 바랐다.
전투는 하룻동안 계속되었고, 아주 참혹했다.
누르하치의 5만대군은 수차례 공격을 감했했지만, 나일관은 모두 격퇴하고 있었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나일관의 성에 의지하여 완고하게 저항했다. 포격으로 무수한 부상자를 냈다. 대청은 깃발을 세우고 항복하기를 권유했으며, 사자를 보내었지만, 나일관은 응하지 않았다." <명사.권271. 열전. 159>
실력차이로 나일관은 기적을 창조해내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이 도래했을 때, 나일관은 성벽위에 서서, 대명의 북경방향을 향해 영원히 역사책에 남을 유언을 남긴다: "신은 힘을 다했습니다(臣力竭矣)." 말을 마치고 그는 자결한다.
누르하치에게도 손실이 참혹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서평보전투에서 누르하치는 7천의 장병을 잃는다.
서평보가 함락되면서, 왕화정은 가슴도 아팠지만, 사태의 심각성도 깨닫는다. 그날 밤 직접 방어를 강화하도록 독려했고, 도망쳐온 심복장수 손득공의 책임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누르하치에 대항해 싸우자고 격려했다.
왕화정이 몰랐던 것은 이 손득공이 일찌감치 몰래 누르하치에 투항했다는 사실이다.
함께 투항한 자로는 이영방(李永芳)이라는 명나라반장(叛將)도 있다. 이들의 후안무치정도는 무수한 명사애호가들이 갈아먹어도 시원치않게 여겨질 정도이다.
이들 대명의 반장을 매수하기 위하여 누르하치는 단지 손녀 1명과 부마라는 직함을 주었을 뿐이고, 이를 통해 광녕성을 손쉽게 얻어낸다.
광녕성을 잃으면서, 왕화정은 낙타 몇 마리를 타고 광녕성을 빠져나온다. 이때 전체 요동은 이제 더 이상 지켜낼 요새가 없게 된다.
다음 날 새벽, 후방으로 도망친 왕화정은 웅정필을 만난다. 두 사람은 각자 서로를 무시했었고, 아직도 그런 선입견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웅정필이 웃으며 말한다: "육만병력을 일거에 탕평한다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화정은 웅정필의 조롱에도 한 마디 대꾸를 하지 못하고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왕화정은 이 패배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자신감이 철저히 사라져 버리고, 그것을 대체한 것은 요동의 미래를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실패는 무섭지 않으나,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 점에서 왕화정은 실제적이었다. 그는 웅정필을 만나자 즉각 지금 장병을 보내 중요한 방어선인 영원(寧遠, 산해관밖의 중사중진, 위치는 지금의 요녕성 흥성시), 각화도(覺華島, 지금의 각화도)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건 아주 정확한 판단이다. 그러나 웅정필은 그것을 흘려듣는다. 이때 그가 신경쓴 것은 대명의 미래가 아니라, 사적인 원한이었다. 왕화정의 패배를 보면서, 웅정필은 크게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왕화정의 아주 실질적인 건의를 무시하고, 한 마디 한다: "이미 늦었습니다. 유민들을 산해관으로 불러들이면 됩니다." 말을 마치고 물자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수십만 군민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마지막 광녕보위전을 진행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후금은 병력 한명 잃지 않고 전체 요동을 점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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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정필은 자신의 이런 조치로 인하여 나중에 반박할 수도 없는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그의 목숨을 빼앗는.
대명은 개국이래, 2백여년간 고심경영하던 요동을 적의 수중에 빼앗겨 버렸다. 이런 치욕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조정이 내놓은 방안은 아주 공평했다. 웅정필과 왕화정을 모두 하옥시키는 것이다. 대체로 웅정필의 군사능력은 주유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같다. 이 젊은 황제는원래 웅정필에게는 가벼운 처벌을 내릴 생각이었고, 왕화정에게는 무거운 처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이 젊은 황제가 좌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실패하고 돌아온 왕화정은 이미 동림당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자신의 변호를 위해 뛰어다니던(그 김에 웅정필을 모함하기까지 함) '동림군자'들을 버리고, 구천세 위충현(魏忠賢)의 진영에 들어간다. 위충현은 이 기회에 그를 이용하여 동림당이 '요동군향을 부정부패했다'는 것을 폭로하게 하고, 일거에 동림당을 궤멸시켜버린다.
웅정필은 부지불식간에 이미 동림당과 위충현의 당쟁에 휘말려든 것이다.
천계4년(1624년) 육월, 동림당인 좌부도어사 양련(楊漣)이 상소를 올려 위충현의 24개 죄상을 탄핵한다. 위충현은 겁을 먹고, 동림당이라는 잠재적인 적수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동림당인이 웅정필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하게 된다.
그의 일당인 풍전(馮銓)은 <요동전(遼東傳)>이라는 가짜 책을 출판하여 웅정필을 모함한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책은 웅정필이 쓴 것으로,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데, 자신을 변명하려는 것이다." 각신 황립극(黃立極)은 웅정필을 죽임으로써 동림당에 타격을 가하자고 건의한다.
이때, 요동의 국면은 이미 만회불가능한 상황이 빠진다. 웅정필의 억울함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어떻게 하면 조정에서 자신들을 위한 카드를 더욱 많이 가지느냐였다.
웅정필같은 인물이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천계2년(1622년) 사월, 웅정필과 왕화정은 모두 사형판결을 받는다. 천계5년(1625년) 팔월 이십팔일 오경에 이르러, 웅정필은 '실함광녕죄(失陷廣寧罪)'로 사형을 당하고 수급은 구변(九邊, 요동, 계주, 선부, 태원, 대동, 연수, 고원, 영하, 감숙)에 보내어진다.
형을 받기 전에, 주사(主事) 장시옹(張時雍)은 웅정필이 가슴에 주머니 하나를 달고 있는 것을 보자 무슨 물건인지 묻는다.
웅정필이 대답한다: "이는 사은소(謝恩疏)이다!"
장시옹이 냉소하며 말한다: "공은 <이사전(李斯傳)>도 읽지 않으셨습니까? 죄수가 어찌 상소를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웅정필이 분노하여 말한다: "그건 조고(趙高)가 한 말이다."
장시옹은 일시에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사 양몽환(梁夢環)은 웅정필이 참수당한 후, 상소를 올려 웅정필이 생전에 군수물자 17여만냥을 횡령했다고 무고하여, 그의 가산을 몰수한다. 웅정필의 장남 웅조규(熊兆圭)는 치욕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고, 그의 딸 웅호(熊瑚)는 너무 격해져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은 고금왕래에 보기 드물다.
여기에서 한가지 언급해야할 점은 왕화정이 동림당을 버리고 자신에게 온 것때문에 위충현은 왕화정을 극력 비호한다. 그리하여 천계제때는 왕화정이 잘 살았다. 그러나 그 날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숭정5년(1632년) 결국 왕화정은 처형당하게 된다.
원응태, 웅정필이 연이어 죽으면서, 야심만만한 누르하치는 전체 요동을 돌아보고 이미 자신의 적수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대명이 이백년간 경영했던 비옥한 토지는 이제 모조리 그에게 넘어간 것이다. 거대한 승리로 그의 눈길은 다시 더욱 먼 목표를 향하게 된다. 산해관(山海關).
여기에는 손승종이라는 사람이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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