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낭야왕씨(琅琊王氏)": 어떻게 위진남북조때 권력의 최전성기를 맞이했을까?

중은우시 2022. 5. 8. 22:00

글: 명금명사(明今明史)

 

구시왕사당전연(舊時王謝堂前燕)

비입심상백성가(飛入尋常百性家)

 

이 시에서 얘기하는 것은 위진시기의 두 명문집안의 이야기이다. 낭야왕씨와 진류사가(陳留謝家). 그러나 낭야왕씨와 비교하면 진류사가는 그래도 약간 못하다고 할 수 있다. 

 

1. 왕씨의 내력

 

왕씨의 역사는 유구하다. 당시의 족보에서 조상을 동주(東周)때 주령왕(周靈王)의 태자 희진(姬晋)이라고 한다. 제왕의 후손이므로 '왕(王)'을 성으로 삼았다. 이 가족의 최초의 보첩(譜牒)은 서진(西晋)때 최림(崔琳)이 만들었다. 최림이 쓴 보첩의 서문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왕씨의 선조는 원래 성이 희(姬)로, 주령왕의 태자인 진이다. 실로 왕실의 후손이다. 더구나 주,진,한,위를 거치면서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그후 함화9년, 왕도(王導)가 <낭야왕씨종도(琅琊王氏宗圖)>를 쓴다. 그리고 서문에는 위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했다.

 

두번에 걸친 족보제작과정에서 희진에서 왕상(王祥), 왕람지(王覽之) 일부 세대의 인물이 보충된다. 그리하여 후세 낭야왕씨족보의 전대 전설에서의 소위 '주,진,한,위이래로 대대로 배출되었다는 '명공거경'이 된다. 마치 '무면지왕(無冕之王)'의 현실적인 지위는 주왕실후예로 자처하는 이 가족에 충분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한나라때 전국명장 왕전(王翦)의 증손인 왕원(王元)의 일맥이 낭야 임기(臨沂)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왕씨집안 7백년의 휘황한 역사가 시작된다.

 

왕씨는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최고급의 명문망족이다. 일찌기 "화하수망(華夏首望)"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 가족은 도대체 어느 정도 강대했을까? <이십사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때부터 명청때까지 1,700여년간, 낭야왕씨는 모두 92명의 재상과 600여명의 문인명사를 배출했다.

 

전혀 과장없이 말하자면, 낭야왕씨는 중국의 봉건시대의 풍운변환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이 가족이 오대이후에는 몰락하여 예전의 영광은 잃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왕씨집안에서 여전히 여러 명의 대가, 명사를 배출하는데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낭야왕씨는 실로 중국 최고의 명문집안이다.

 

2. 왕씨의 굴기

 

비록 왕씨가 존재했던 기간은 오래되었지만, 진정한 굴기와 전성기는 위진시대라 할 수 있다. 낭야왕씨의 굴기는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삼국시대로 왕상(王祥)이 사마씨를 보좌하여 서진(西晋)을 건립한 것이고, 하나는 왕돈(王敦), 왕도(王導) 형제가 사마예(司馬睿)를 보좌하여 동진(東晋)을 건립한 것이다.

 

(1) 사마씨를 보좌하여 서진을 건립하다.

 

왕상은 한헌제 연강원년에 여건별가(呂虔別駕)의 직을 맡은 후로 진무제 태시5년 사망할 때까지, 위, 진 두 왕조에서 관료를 지낸다. 그 기간은 49년이나 된다.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교체될 때, 왕상은 조위정권 및 사마씨간의 관계를 잘 처리해서, 그의 정치적 지혜도 보여주면서, 정치적 인격도 드러냈다.

 

그리고 사실은 증명한다. 왕상은 이 방면에서 양쪽 모두에게 밉보이지 않고, 양쪽을 오가면서 쌍방의 정치분쟁을 달 처리한다. 이를 통해 정치적 지혜와 복잡한 업무를 잘 처리하는 노련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하여 조위정권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사마씨를 추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다.

 

왕상은 후기에 이르러 황제의 신임을 받아 제후에 봉해졌지만, 실제로 실권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의 가족이 건립되고 발전하는데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왕씨는 왕상의 대에서 잘 경영하면서 집안의 기품을 엄격하게 하여, 왕씨일족중에서 여러 명이 조정의 관직에 있으면서, 가족의 도덕과 학문 그리고 관료로서의 역사를 일구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왕씨가 '제일명문'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능력있고, 명성을 떨치면서도 도덕과 학문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2. 사마예를 보좌하여 동진을 건립한다.

 

정치가 파산하고, 신앙이 붕괴되는 시대에 사마씨는 평범한 의사처럼 내놓은 약방문은 천하를 잘 다스리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서진의 멸망을 재촉했고, 결국 역사상 단명왕조의 하나가 된다. 서진이 멸망한 후, 왕돈, 왕도형제의 보좌하에 낭야왕 사마예가 강좌에서 동진을 창건한다. 이리하여 사마씨가 귀족집안들과 공동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특수한 정치국면이 형성된다.

 

사마예를 보좌하여 서진정권을 건립한 공로로 낭야왕씨는 이때부터 "제일망족"이 된다. 왕씨의 세력이 가장 강했을 때, 조정관리중 3/4이상은 왕씨이거나 왕씨와 관련있는 인물이었다. "왕여마(王與馬), 공천하(共天下)"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나중에 중국봉건역사상 '제일명문'이 된 것은 왕씨가 동진, 서진 두 왕조의 개국공신이었던 것과 큰 관계가 있다. 이 '창업'시기에, 가족구성원의 정치적지혜와 도덕인격은 모두 시스템화되는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게다가 동진이후, 문벌제도가 흥기하면서, 한문(寒門)의 자제들은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어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런 제도는 문벌사족의 지위와 합리성을 보호해주었고, 여러가지 요소가 더해지면서, 후세에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위진풍류가 나타난다.

 

3. 문화적인 굴기

 

낭야왕씨가 조정세력에서 굴기한 이후, 그들을 지탱해준 문화수준도 무시할 수 없다. 동진이 건립되고, 왕씨가 '제일망족'이 되기 전에, 가족중의 문학적 소양은 정치재능에 감추어져 있었다. 남북조시기, 왕씨는 이 시대의 명사, 재자들이 화산폭발처럼 폭발하게 만들었다. 이는 바로 이 가족의 감추어진 힘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낭야왕씨는 서한 한혜제이래 조정정치상의 존재와 영향, 문화분야에서의 성취는 모두 이 시기의 사족정치의 존재와 사족문예창작의 기본특징이 된다. 낭야왕씨의 문예창작상의 성취는 아래의 몇 가지 면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하나는 학술연구의 기본관념과 가치방향이고, 둘은 문학창작의 예술적인 심미와 추구이고, 셋은 서예, 회화작품으로 형성된 틀과 영향이며, 넷은 가족문예관념이 형성된 역사와 연원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한,위, 육조이래 낭야왕씨는 시인 42명, 시문은 총 370여수가 있다. 집이 있는 사람이 49명이고, 그 가족구성원은 시문창작의 수량이건 문집의 보유자이건 당시 사족집단중에서 모두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낭야왕씨의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등의 서예창작과 성취는 당시에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을 뿐아니라, 노늘날까지도 여러 서예애호가들이 추앙하고 모방하고 있다. 낭야왕씨가족 내지 중국전통서예문화의 영원한 보배와 표지가 된다. 낭야왕씨의 서예작품으로 <순화각첩>에 수록된 사람은: 왕돈, 왕도, 왕염(王恬), 왕흡(王洽), 왕초(王劭), 왕순(王珣), 왕민(王珉), 왕이(王廙), 왕수(王邃), 왕희지, 왕헌지, 왕응지(王凝之), 왕환지(王渙之), 왕휘지(王徽之), 왕조지(王操之)등 15명이다. 

 

<순화각첩>은 <순화비첩>이라고도 부른다. 북송 송태종 순화3년 송태종의 명으로 한림원시독 왕저(王著)가 궁중내 내부비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역대명가의 서예작품중에서 고른 명작들이다. 이를 대추나무판에 탁인하여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순화각첩>은 중국최초의 서첩으로 총10권이다. 이는 송나라이전의 역대제왕, 명신과 서예가 합계 100여명의 400여편의 작품을 담고 있다.

 

이 첩은 행서, 초서, 해서, 예서가 모두 있다. 종요(鍾繇), 왕희지, 왕헌지, 유공권(柳公權)등 대가의 작품이 다 들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송나라이전의 역대 서예가들의 최고작품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4. 결론

 

낭야왕씨는 정치와 문화분야에서 동시에 굴기한다. 그리하여 이 가족은 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특수한 시기에 많은 재능있는 후손을 배출했고, 이 가족은 난세에도 쓰러지지 않으면서 무수한 문화영역의 최고작품을 만들어냈다.

 

유우석의 <오의항>은 우리에게 그 시대에 대해 추측해볼 수 있게 만든다. 왕씨의 역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1]王连儒:《汉魏六朝琅琊王氏家族政治与婚姻文化研究》,中国社会科学出版社,2013

[2]姚晓菲:《两晋南朝琅琊王氏家族文化研究》,山东大学出版社,2010

[3]刘占召:《王羲与魏晋琅琊王氏》,凤凰出版社,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