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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진경지(陳慶之): 전설의 백포장군(白袍將軍)

by 중은우시 2024. 10. 16.

글: 자귤(紫橘)

남북조는 장수가 운집한 시대이다. 다만 전설적인 인물을 얘기하자면 문관출신으로 수천명으로 낙양(洛陽)을 수복한 진경지(陳慶之)를 꼽아야 할 것이다. 진경지는 명문출신도 아니고, 심지어 그는 아부를 통해 관직을 얻은 한문(寒門, 한미한 집안)출신이다. 다만 그것이 그의 휘황한 업적을 가릴 수 없다. 오늘은 남조 소량(蕭梁)의 전설적인 무장 진경지에 대해 얘기해보기로 한다.

  1. 한문(寒門)출신

남조 양(梁)시기에는 문벌사족의 지위가 여전히 공고했다. 진경지는 의흥군국(宜興郡國) 사람이다. 사서에 그의 군망(郡望)이 적혀 있지 않다. 이를 보면 그가 한문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년시기에 그는 소연(蕭衍)을 따라다녔고, 그의 시종(侍從)이었따. <양서(梁書)>의 기록에 따르면, 소연은 바둑을 좋아하여 자주 밤을 세웠다. 소연과 바둑을 두는 기사들은 모두 피곤해 했지만, 오직 진경지만이 부르면 바로 왔고, 함께 밤새워 바둑을 두었다. 이런 행동으로 그는 소연의 총애를 받는다.

이 기록을 보면, 진경지의 출신과 굴기는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거의 상사가 좋아하는 것에 영합하는 아부를 통해 인정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사족(士族)의 한문에 대한 편견에 아주 부합한다. 다만 어찌되었건 사족이 운집한 남조에서 진경지는 어쨌든 관직을 얻는다.

그는 주서(主書)로 시작한다. 이건 하급관료이고, 말류(末流)에 속한다 문서업무를 하는 것으로 절대로 문직(文職)이고, 절대로 탁류(濁流)이다. 다만 진경지는 문(文)에 뜻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는 조적(祖逖)처럼 북벌하여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다만 아쉽게도 진경지는 문약했고, 말타기와 활쏘기도 할 줄 몰랐다. 소연의 진경지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원래 장군의 후손도 아니고, 호걸의 가문도 아니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진경지는 병서를 보고 전략을 연구한다.

2. 초종군려(初從軍旅)

소연이 남조양을 건립한 후, 진경지는 옛날부터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바로 관료로서 순조롭게 성장한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소연은 처음에 진경지의 군사능력을 그다지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경지가 계속하여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소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군사업무부터 그에게 맡기기 시작한다. 525년, 북위(北魏)의 서주자사(徐州刺史) 원법승(元法僧)이 팽성을 바치면서 양에 귀순한다. 소연은 진경지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맞이하게 한다. 진경지가 원법승을 성공적으로 맞이해서 데려오자, 소연은 진경지로 하여금 예장왕(豫章王) 소종(蕭綜)을 서주로 호송하고, 서주에 주둔하며 지키도록 한다. 얼마 후, 북위는 2만대군을 보내 서주를 공격한다. 진경지는 2000명의 양군을 이끌고 먼저 성밖으로 나가, 병력을 집중하여 위군의 예기를 꺾는다. 그러나, 소종은 겁을 먹고 군대를 버리고 북위에 투항한다. 그러자, 서주는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인심이 흩어진다. 북위는 그 틈을 타서 공격을 감행하여 팽주(彭州)를 함락시킨다.양군의 부대는 패배하여 궤멸했다. 오직 진경지의 부대만이 그의 지휘하에 성공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서주전투는 진경지의 군사적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이제 양무제 소연은 진정으로 진경지를 무장을 대우한다. 526년, 진경지는 북위의 예주자사(豫州刺史) 이헌(李憲)과 수춘(壽春)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헌은 점차 밀렸고, 11월이 되자, 이헌은 수춘을 바치며 투항한다. 이번에 북위와 싸우면서, 진경지는 북위의 52개성을 점령하고 인구 7.2만명을 얻는다. 소연은 크게 기뻐하며 진경지를 관내후(關內侯)에 봉한다.

3. 과양대전(涡陽大戰)

527년, 진경지는 편군(偏軍)을 이끌고 장군 조중종(曹仲宗)을 따라 과양을 공격한다. 북위는 종실 원소(元昭)로 하여금 15만병력을 이끌고 지원가도록 한다. 위나라군대의 선봉이 과양에서 40리 거리에 도착한다. 심양태수(尋陽太守)는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만일 싸우게 되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고, 실패하면 사기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도주할 것을 주장한다. 다만, 진경지는 위군이 먼 길을 와서 피로할 것이고, 쌍방간의 거리가 아주 멀다고 생각하여 방어조치를 별도로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고, 상대방은 먼길을 와서 피로하니, 그들이 예상못한 기습을 하면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말을 마치고, 그는 200기의 기병을 이끌고 위군의 영지를 기습한다. 이 200명이 야밤을 틈아 기습하여 위군의 선봉을 격패시킨다. 이렇게 하여 양군의 사기가 크게 오른다.

그후, 양군이 과양을 점령한다. 위군은 성바깥에 13개의 군영을 세우고, 쌍방은 대치상태에 접어든다. 봄부터 겨울까지, 쌍방은 백여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다. 총사령관 조중종은 이렇게 대치하다가는 앞뒤로 적군을 맞이할 수 있다고 보아 철군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경지는 부절(符節)을 들고 대문을 막고 말했다: "여기에 와서 싸우기 시작한지 1년여가 되었다. 군수물자를 얼마나 많이 소모했는가. 지금 여러 군대는 모두 사기가 엉망이다. 만일 물러나려고 하면 어떻게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내가 듣기로 병사는 사지에 몰리면 살려는 욕망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적이 포위망을 완전히 갖추기를 기다려, 다시 파부침주(破釜沉舟)로 적과 결전을 벌이자. 누구든지 먼저 떠나면 나에게는 밀조(密詔)가 있다. 누구든지 어기면 밀조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이 말이 나오자, 좌중은 모두 깜짝 놀란다. 조중종은 그의 용기에 탄복했고, 계속하여 지키는데 동의한다.

군심을 통일시킨 후, 진경지는 밤을 틈타 정예병을 성밖으로 내보내, 기병으로 기습한다. 위군의 군영 4개를 연이어 격파한다. 이 소식을 듣고, 북위의 많은 장수들은 양에 투항한다. 양군은 과양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4. 북벌

남북조시대에 남북 쌍방은 세력이 비슷했다. 단지 7천의 인원을 가지고 한 나라를 가로질러 상대방의 절반국토를 점령한 경우는 오직 진경지 뿐이다.

기실 대통2년(528년)의 북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진경지의 공로가 아니라, 북조의 항장(降將) 원호(元顥)의 공리라고 본다.예를 들어, <천석원호입락여북위정치격국>과 <논원호북벌여북위상층지태도>가 있다. 여기에서는 직접 원호북벌이라고 부른다. 다만 이번 북벌의 구성원과 총사령관을 살펴보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양나라사람들이다. 북해왕 원호는 그저 몸만 남량에 의탁해왔고, 그가 요청한 것은 북방의 난국에 남조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양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통초년, 위의 북해왕 원호가 본조에 대란이 발생하여 스스로 찾아와서 투항했다. 그는 위나라의 황제로 세워달라고 청했고, 고조는 받아들였다." <통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황제는 위나라 북해왕 원호를 위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동궁직각장군(東宮直閣將軍) 진경지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그를 북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번의 북방의 대란은 이주영(爾朱榮)의 난을 가리킨다. 그런데 북위는 병마가 얼마나 되었는가? 진경지가 한 말에 따르면, "나의 무리는 겨우 칠천인데, 오랑캐의 무리는 삽십여만이었다" 북위의 30만대군, 양군은 겨우 7천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호송임무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

이 7천명이 일반병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통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진경지가 원호를 낙양까지 성공적으로 호송한 후, 양나라조정내에서는 논쟁이 벌어진다. 그들이 특히 두려워한 것은 진경지가 낙양을 점거하고 자립하는 것이다. "진경지의 병력이 수천에 불과한데도 이미 견제하기 힘든데, 지금 인원이 더욱 늘었는데, 그가 남의 밑에 있으려 하겠는가?" 겨우 수천명만으로도 남조는 걱정해 마지 않았다. 이를 보면 이들 칠천이 확실히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진경지가 적의 진영으로 깊이 들어가면서도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528년 이주영이 낙양을 점거하고, 북위종실을 도살한다. 북위의 북해왕 원호는 양에 투항하면서 남조에서 그의 복국을 도와줄 것을 청한다. 529년 4월, 진경지는 원호를 데리고 질현(銍縣)에서 출발하며, 정식으로 북상한다. <양서>, <통감>등 사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북상한 이후 진경지는 파죽지세였다. 주요 전과는 형성(滎城)을 점령하고, 수양(睢陽)을 취한다. 위나라의 도독 구대천(邱大千)을 격패시키고 그로 하여금 투항하게 만든다. 위나라의 제음왕(濟陰王) 원휘업(元暉業)이 지키는 고성(考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의 수비군을 궤멸시키고, 원휘업을 생포한다. 위나라의 동남도대도독(東南道大都督) 양욱(楊昱)이 지키는 형양을 함락시키고 양욱과 그의 휘하 300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위나라의 장수 원천목(元天穆), 이주토몰아(爾朱吐沒兒)를 대파하고 호뢰(虎牢)를 함락시키고, 위나라의 상서복야 이주세륭(爾朱世隆)을 격패시킨다. 최종적으로 원호를 성공적으로 낙양까지 데려가서 북상의 초보적인 계획을 성공시킨다. 더욱 신기한 점은 진경지는 자신의 병력을 거의 완전하게 보존하면서 임무를 완성한 것이다. 이 점은 <통감>, <남사>의 기록에 양군이 낙양에 진입한 후, "남인은 1만이 되지 않고, 위인은 열배이다."라는 문장에서도 확인된다. 여하한 사료에도 양나라에서 진경지에게 병력을 보충시켜주었다는 내용은 없다. 이를 보면 진경지의 군대에 사상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 낭패도명(狼狽逃命)

<양서>에 따르면, 낙양을 점거한 후, 전과를 통계냈는데, 거기에 따르면, 진경지는 북벌이후, "32개성을 취하고, 47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주영이 낙양으로 반격에 나선다. 소위 "3일간 11번 전투를 벌인다." 이주영은 병력이 많았지만, 진퇴가 질서정연하지는 못했다. 다만 진경지의 파트너인 원호가 이주영에게 격패당하였기 때문에, 진경지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모아 "동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만, 회군하는 길에 전쟁터에서는 거의 패배하지 않은 군대가 큰 물을 만난다. <통감>에서는 "숭고수창(嵩高水漲)"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홍수를 만나 전멸한 것으로 추측된다. 장수 진경지는 더욱 낭패했다. 그는 머리를 깍고 중으로 변장해서 겨우 혼자 도망쳐 남조로 돌아온다. 결과가 어떠하든지간에 이상의 전적을 보면 진경지는 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

진경지의 북벌은 결국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북벌은 원래 실지수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따. 그래서 진경지가 남으로 돌아온 후, 양무제는 그에게 크게 상을 내렸다.남조의 관리들도 그것이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다만 바로 이런 일련의 거동때문에 명나라때의 왕부지(王夫之)는 크게 비난한다. 그는 남조의 군신을 통박했따. 진경지가 원호를 받들어 북벌했고, 이미 낙양을 점령했는데도 증원군을 보내지 않고, 방어해주지도 않았다. 양나라가 큰 뜻을 잃은 것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임금은 자신이 중국의 임금임을 잊었고, 신하는 자신이 중국의 신하임을 잊었다. 진취심이 없기로 어찌 이 정도란 말인가. 이런 각도에서 보면 남조가 북방에 의해 통일되는 것이 필연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