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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음모가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의 죄악의 일생

by 중은우시 2021. 11. 21.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하간왕 사마옹(?-306)은 안평왕(安平王) 사마부(司馬孚)의 손자이고, 태원왕(太原王) 사마괴(司馬瑰)의 아들이다. 즉 그는 사마의(司馬懿)의 질손(侄孫)이다. 진무제(晋武帝) 대에 이르러, 사마옹은 황제와의 관계가 이미 소원해졌다. 그런데 사마옹은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인재를 좋아하여, 젊었을 때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는다. 그리하여 진무제는 그를 "여러 제후의 의표(儀表)가 될만하다"고 말한다. 관중(關中)은 당시에 아주 부유한 곳이었고, 서진의 법에 따르면 "비친친부득도독관중(非親親不得都督關中)"이었다. 사마옹은 황제의 가까운 친척도 아니어서, 원래 관중도독의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현명한 인물로 추천받아" 평서장군(平西將軍), 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에 임명되어 장안에 부임한다.

 

사마옹은 '팔왕지란' 후기의 핵심인물이다.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이 죽은 것은 모두 사마옹과 밀접한 직접적 관계가 있다. 사마옹은 사람됨이 음험하고 변신을 잘하며, 권모술수와 음모를 잘 꾸몄다. 그는 팔왕지란에 가담하여, 대다수의 경우에 막후에 숨어서 국면을 조종했다. 그에게 이용당한 성도왕 사마영은 이용가치를 완전히 상실당하자, 그는 비로소 전면에 나서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과 패권을 다툰다.

팔왕분봉도

사마륜(司馬倫)이 황제를 칭하고, 사마경이 반군을 일으킬 때, 사마옹은 사마륜을 지지했다. 그는 심지어 장안에서 사마경을 지지하는 하후석(夏侯奭)의 허리를 베고, 사마경이 파견한 사신을 체포하여 사마륜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대장 장방(張方)으로 하여금 관중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낙양에 지원을 가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사마경의 병력이 강성하다는 말을 듣자, 교활한 사마옹은 즉시 방향을 바꾸어 장방에게 '의군(반군)'의 기치를 내걸고 전진하게 한다. 동관(潼關)에 도착했을 때는 사마륜이 이미 사망했다. 사마경은 원래 사마옹이 이리 붙었다 저리붙었다 하는 모습에 반감을 가졌지만, 관중의 병력이 강성함을 꺼려해서, 사마경은 여전히 사마옹에게 시중(侍中), 태위(太尉)등 높은 관직을 내린다.

 

그러나, 사마옹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마옹은 사마경이 점점 타락하며 인심을 잃어가는 것을 보자, 사마경을 제거할 생각을 한다. 이번에 그가 생각한 것은 독계였다. 즉 상소를 올려 장사왕 사마예에게 함께 거병하자고 호소한다. 이렇게 하여 사마경과 사마예의 관계를 이간질하여, 두 왕이 서로 싸우게 만들려 했다. 그렇게 되면 사마예의 병력이 비교적 적어 사마예가 사마경에게 피살당할 것이다. 그후에 사마옹은 이를 핑계로 사마경을 토벌하겠다고 나서고 황제를 폐위시킨 후 성도왕 사마영을 황제로 옹립하고, 사마옹은 스스로 재상이 되여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주무를 생각이었다.

 

다만, 사마예의 전투력은 사마옹의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두 왕의 싸움에서 사마예가 승리를 거두고 사마경이 피살당한다. 사마옹은 병력을 출동시킬 명분을 잃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잠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마옹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도왕 사마영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사마예를 친다. 마침내 사마예를 제거하고, 사마옹이 미리 조치한 바에 따라 사마영이 황태제(皇太弟)에 오른다. 사마옹은 태재(太宰), 대도독(大都督), 옹주목(雍州牧)의 관직을 얻는다.

 

그런데, 이때 오랫동안 힘을 키워온 의외의 강대한 세력이 등장한다. 바로 동해왕 사마월이다. 사마월은 먼저 진혜제(晋惠帝)의 명을 받아 사마영을 북정하러 나선다. 비록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조직력과 호소력을 선보인다. 북정에 실패한 후, 사마월은 봉지인 동해국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인 사마략(司馬略, 이때 고밀왕, 도독청주제군사였음), 사마등(司馬騰, 동영공, 도독병주제군사, 병주자사였음)등과 연락하여 사마영과 사마옹을 토벌하기 위해 거병한다. 사마등은 다시 도독유주제군사 왕준(王浚)과 연합하고 선비(鮮卑), 오환(烏桓)까지 불러들여 업(鄴)을 공격한다. 사마영은 전투를 벌여서는 불리하겠다고 여겨, 수십기를 이끌고 진혜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낙양에 주둔하던 장방은 진혜제와 사마영을 장안으로 모셔간다.

 

진혜제가 장안에 도착한 후, 사마옹은 사마월의 세력을 겁내어 사마월을 태부(太傅)에 임명하여, 자신과 함께 보정(輔政)이 되어 조정을 다스리도록 하고, 사마월의 형제들에게도 각각 관직과 작위를 올려주고 낙양, 업성등지에 주둔하게 하였다.

 

다만, 사마월은 이때 이미 더욱 야심이 커져 있었다. 그는 당연히 사마옹과 나란히 보정이 되는 것에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동해국 중위(中尉) 유흡(劉洽)의 계책을 받아들여, 장방이 어가를 납치했다는 것을 명목으로 삼아 사마옹을 토벌하기 위해 거병한다. 그는 격문을 산동각지에 보내어 "서영대가(西迎大駕, 서쪽에서 황제의 어가를 모셔오자)"는 것을 명복으로 내세워 병마를 모아 사마옹이 있는 관중지구로 진격한다. 이번의 기세는 대단했다. 서주도독, 동평왕 사마무(司馬楙)까지도 사마월의 기세에 겁을 먹고 서주도독의 지위를 사마월에게 넘겨준다. 범양왕(范陽王) 사마효(司馬虓), 왕준등이 속속 호응한다. 이들은 사마월을 맹주로 추대하고, 사마월은 각주의 자사등 여러 관료들으 지지까지 받아내서 문무가 모두 호응하여 대군은 보무당당하게 장안을 향한다.

 

그런데, 예주자사(豫州刺史) 유교(劉喬)는 사마월에 호응하지 않고, 병력을 일으켜 예주를 접수하러 온 범양왕 사마효를 막아내고, 허창으로 병력을 진격시킨다. 다시 장남 유우(劉祐)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영벽(靈壁)을 지키도록 하여, 사마월의 대군이 진격하지 못하게 막는다. 사마옹은 유교의 도움을 받고, 동시에 이미 폐출된 사마영을 다시 불러내어, 사마영으로 하여금 석초(石超), 노지(盧志)등 옛 부하를 이끌고 관중의 장수인 누포(樓褒), 왕천(王闡)등으로 하여금 하교(河橋)를 지키게 하여, 왕준과 강을 사이에 두고 교전을 벌이게 한다. 왕준은 독호 유근(劉根)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게 하여 왕천을 참한다. 사마영은 장방의 보루까지 물러나서 지킨다. 이때 범양왕 사마효의 부하인 사마(司馬) 유곤(劉琨)이 이미 북상하여 기주(冀州)를 접수한다. 사마효를 기주자사로 삼고, 유주의 선비족 기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유교, 유우 부자를 격패시킨다. 왕준은 다시 부하장수 기홍(祁弘)으로 하여금 선비, 오환의 병력을 이끌고 사마월과 회합하여 서쪽으로 진격하는 선봉에 서게 한다.

 

사마월의 진군은 순조로웠고, 사마옹은 아주 두려워했다. 그는 사마월과 화해하여 병력을 물러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월은 장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한 것이므로, 장방은 자신이 화해의 희생양이 될까 겁냈다. 장방은 그리하여 사마옹에게 계책을 낸다. 사마옹은 관중에 남아 지키고, 장방 자신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사마영을 따라 업으로 돌아가며 유곤, 왕준을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사마옹은 이미 장방을 신임하지 않고 있었고, 장방의 계책은 그로 하여금 장방이 군대를 자신이 장악하겠다는 취지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사마옹은 다시 그가 잘 쓰는 음모를 써서 장방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자 한다.

 

그는 고의로 장방의 가까운 친구인 질보(郅輔)를 부른다. 질보가 접견하기 전에 참군 필원(畢垣)을 보내 질보에게 이렇게 말한다: "장방이 지금 반란을 일으키려고 준비하는데, 모두가 너도 참가한다고 하고 있다. 만일 하간왕이 물으면 너는 어떻게 대답할 생각이냐?"

 

질보는 대경실식한다: "나는 장방이 반란을 일으키려는지는 정말 몰랐다. 내가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필원은 이때 비결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조금 있다가 하간왕이 무엇을 물으면 너는 그냥 '네!'라고만 대답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너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질보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그가 말한대로 하는 수밖에는.

그가 들어가자 사마옹이 묻는다: "장방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데, 너는 알고 있는가?"

질보가 답한다: "네"

사마옹이 또 묻는다: "나는 너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겠다. 네가 가서 장방을 죽여라. 그렇게 공으로 속죄해라. 그렇게 하겠느냐?"

질보가 답한다: "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질보는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신을 한통 들고, 장방의 집으로 찾아간다. 사마옹이 장방에게 보내는 서신이라고 하면서. 자주 내왕했기 때문에, 질보가 칼을 차고 들어가도 장방의 집을 지키는 호위들의 의심을 사지는 않았다. 장방이 서신을 받아들고, 등불 아래에서 펼쳐보려고 할 때, 질보가 날카로운 칼을 뽑아 한칼에 장방의 목을 벤다.

 

장방은 원래 사람됨이 잔혹했다. 낙양을 칠 때, 그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하도록 놔두어 엄청난 파괴를 조성했다. 양식이 부족할 때 그는 사람을 죽여서 사람고기로 군량을 삼을 정도로 인간성이 말살되었다. 사마예를 불에 태워죽이기도 해서 사람들의 혐오감을 샀다. 황제를 납치하고 황궁을 약탈하여 천하의 공적이 되었다. 사마옹이 이런 자를 기용한 것은 그가 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장방이 전투는 잘했다. 사마옹이 장방을 모살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 성공한 것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더구나 이는 사마옹에게 대지혜가 없고, 그저 소지혜의 천박함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마월은 수급 하나에 만족하여 곧 손에 넣을 수 있는 승리를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과연 사마옹이 장방의 수급을 사마월에게 보내면서 화해를 청했지만, 사마월을 단연코 거절한다.

 

사마옹이 화해를 모색하고 있을 때, 사마효의 부대는 이미 선비,오환의 기병의 도움을 받아 사마영과 사마옹의 부하대장인 누포를 격패시켰다. 사마옹은 원래 장안으로 도망치려고 생각했으나, 도중에 사마옹이 사마월과 화해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두려움에 화음에서 무관을 거쳐 남으로 신야까지 도망친다. 사마월을 지지하는 진남장군, 도독형주제군사 유홍은 형주에서 사마영을 찾기 위해 수색을 벌인다. 사마영은 놀라서 따르던 부하들도 모두 버리고, 두 아들과 함께 북으로 조가(朝歌)로 도망친다. 거기서 돈구태수 풍숭(馮嵩)에게 체포되어 업성의 사마효에게 보내어진다.

 

사마효는 사마영이 진무제의 아들임을 가련하게 여겨 단지 그를 연금시키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얼마후 사마효가 병으로 사망한다. 범양왕의 장사 유여(劉輿)등은 사마영이 업성에서 명망이 있어 그가 재기하여 보복할까봐 겁을 낸다(사람들은 그가 사마예를 격패시킨 후 낙양에서 금군장병을 도살한 공포스러운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상서대의 사신이라고 사칭하여 사마영을 사사에 처한다는 조서를 가져가게 한다. 사마영은 두 아들과 끌어안고 곡을 한 후 머리를 풀어헤치고 동쪽을 향해 누웠다. 수비병사 전휘(田徽)는 그와 두아들의 목을 졸라 죽인다. 사마영이 기주를 통치하는 동안 확실히 인심은 얻었던 것같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명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중에 업성이ㅡ 사람인 급상(汲桑)이 반란을 일으켜 사마월에 항거하는데, 그는 성도왕 사마영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리고 사마영의 관을 군중에 두고, 모든 일을 먼저 사마영의 혼령에 보고한 후에 집행했다. 사마영이 죽은지 몇년 후에는 개봉(開封)에 사마영의 아들이라는 십여세짜리 사내아이가 나타난다. 사마월은 불안해 하며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인다.

 

사마영이 죽은 후, 사마옹의 말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게 된다. 장방이 비록 잔혹했지만, 그는 용맹하고 전투를 잘했다. 사마월등도 장방은 꺼려했다. 사마옹은 스스로 자신의 장성을 무너뜨린 셈이다. 사마월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해준 셈이 되었다. 사마옹은 대장 여랑(呂朗)을 보내어 형양(滎陽)을 지키게 했다. 범양왕이 군사마 유곤은 장방의 수급을 진앞에 걸어두고 여랑에게 서신을 보낸다: "장방은 하간왕을 위하여 목숨을 다해 싸웠는데, 최후는 이렇다. 너는 네가 장방과 비교함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여랑은 사마옹이 간사하고 악독하며, 책임을 미루기 잘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지금은 형세가 불리하니 자신이 제2의 장방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겨 결국 유곤에게 투항한다.

 

여랑이 투항한 후, 사마옹은 비로소 자신이 장방을 죽인 것이 큰 실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사마옹은 수치가 분노로 변했고, 화를 풀 곳이 없자, 질보에게 풀게 된다. 그리하여 질보를 죽이게 된다. 질보는 아마도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네가 나보고 장방을 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형양을 잃자, 기홍등은 흉맹한 선비족 기병을 이끌고 관중으로 쳐들어간다. 사마옹 수하의 홍농태수 팽수(彭隨), 북지태수 조묵(刁默), 부장 마첨(馬瞻), 곽위(郭偉)는 모두 패전하여 뿔뿔이 흩어진다. 사마옹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단기필마로 장안성을 버리고 태백산으로 숨어들어간다.

 

기홍은 선비족기병을 이끌고 장안에 진입한다. 그리고는 한바탕 약탈을 벌인다. 그후 진혜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간다. 진서장군 양류(梁柳)를 장안에 남겨 관중을 지키게 한다. 원래 흩어졌던 마첨등 장수는 대군이 철수하는 것을 보자, 빈틈을 타서 장안으로 다시 들어가 양류를 죽이고, 태백산에 숨어 있던 사마옹을 모셔온다. 그러나 이때 사마옹은 이미 원기를 크게 상하여, 관중을 장악할 능력이 없었다. 원래 사마옹의 명을 듣던 안정태수 가필(賈疋)은 그에게 반기를 들고 사마월에게 간다. 그는 서북쪽에서 장안을 공격하여 마첨을 죽인다. 사마월도 독호 미황래(糜晃來)로 하여금 사마옹을 공격하게 한다. 사마옹은 동서 양쪽의 협공을 받자, 전혀 반격할 힘이 없었다. 그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장안성 하나뿐이었다. 

 

진혜제는 사마월의 손에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독살된다. 사마월은 황태제 사마치(司馬熾)를 옹립하니 그가 진회제(晋懷帝)이다. 사마월은 신황제의 직위를 계기로, 사마옹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부른다. 사마옹은 장안에서 이미 고립되어 있어, 이번 기회에 사마월과 화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마월은 그와 화해할 생각이 없었다. 사마월의 동생인 남양왕 사마모(司馬模)는 부하장수 양신(梁臣)을 파견하여 신안(新安)에서 사마옹을 영접하게 한다. 그리고 수레 위에서 사마옹의 목을 졸라 죽인다. 일대의 음모가는 결국 음모로 죽는다. 그가 죽을 곳에서 잘 죽은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팔왕지란은 이렇게 끝이 난다. 최종적으로 조정을 장악한 사람은 사마월이다. 그가 최후의 승리자일까?

파란색은 황제, 붉은색은 팔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