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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우계마후(牛繼馬後): 사마예(司馬睿)는 우예(牛睿)였을까?

by 중은우시 2022. 10. 6.

글: 사해심진(史海尋珍)

 

서진(西晋)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족들간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한다. 역사에서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이라고 부른다. 거듭되는 혼전속에 동한말기이래 원래 심각하게 손상입은 국력이 더욱 소모된다. 북방이 머물던 유목민족은 그 기회를 틈타 남하하여 중원을 차지하고자 한다. 사마예는 세가대족(世家大族)의 보호하에, 남방의 건업(建鄴, 지금의 남경)으로 내려가 동진(東晋)을 세운다. 다만, 사마예의 즉위에 대하여는 말들이 많았다. 그중 중요한 하나의 원인은 바로 그가 사마씨(司馬氏)의 후손이 아니고, 우씨(牛氏)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 소문은 "우계마후(牛繼馬後)"로 불린다. 그렇다면, "우계마후"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서 전파된 것일까? 우리는 먼저 시간을 삼국시대 후기로 되돌려보아야 한다.

 

1. 참위설(讖緯說)로 억울하게 죽은 장군

 

양한(兩漢, 서한 및 동한)때 참위설이 아주 유행했다. 미신을 유가경전의 '위서'에 덧붙이는 일이 크게 성행했고, 참어(讖語), 민요(民謠)등을 모두 국운에 대한 예지(預知)로 여겼다. 왕망(王莽)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민간에서 널리 세력을 쌓아, 결국 "한(漢)"을 대체하여 "신(新)"을 세울 수 있었다.

 

동한말기와 삼국시대에 참위는 여전히 통치자들에게 중시되었다. 무슨 "대한자당도고(代漢者當塗高)"라든지, 무슨 "삼마식조(三馬食曹)"라든지 하는 것이 유명한 참어였다. 그리고 "우계마후"도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아주 의미있는 참어였다. 

 

사마의가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이미 찬역(簒逆)의 마음을 품었다. 다만 그때는 아직 위나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그는 서서히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민간에서 널리 전해지는 위서 <현석도(玄石圖)>가 나타난다. 그중 대부분의 내용은 지금 고증할 수 없지만, 하나의 내용이 사마의의 주의를 끈다. 그리하여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 그것은 바로 "우계마후"였다. 사마의가 보기에, 이 참어는 앞으로 우씨성의 사람이 사마씨의 강산을 빼앗는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사마의는 고평릉사변을 일으켜 위나라의 최고권력을 장악하자, 즉시 위나라의 명장 우금(牛金)을 주살해버린다.

 

사마의의 장남 사마사(司馬師)는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우금은 사람됨이 크게 쓸만한데, 왜 그를 죽이시는 겁니까?" 사마의는 참위설의 예언을 들어 사마사에게 경계하라고 말한다.

 

우금은 조인(曹仁)의 부하로 전쟁터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여러번 전공을 세운 대장이다. 그런데, "우계마후"라는 한 마디때문에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우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2. 사마예인가, 우예인가?

 

왕망이 참어의 계시를 받아, "유수(劉秀)"라는 인물이 그의 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것을 들은 후, '유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모조리 죽여버렸지만,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계마후'는 여전히 우금이 죽은 후에도 사마가의 정권에 영향을 끼친다.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司馬昭)의 아들인 사마염(司馬炎)은 가족 3대에 걸친 분투목표인 천하통일을 이루고 나라를 개국한다. 사마염이 건립한 서진정권은 한나라말기 삼국시대의 교훈을 받아들여, 황족을 대거 제후왕으로 봉하여, 그들이 중앙을 보호하도록 했다. 그중 사마의의 또 다른 손자인 사마근(司馬覲)이 낭야왕(琅琊王)에 봉해진다.

 

사마근은 안방치국(安邦治國)방면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가족내부관계는 잘 처리하지 못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처인 하후씨(夏侯氏)는 성격이 방탕하여 사마근이 외출했을 때 자주 집안의 우씨성을 지닌 하급관리 우흠(牛欽)과 통간했다. 그뿐 아니라, 우흠과의 사이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사마근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 사내아이가 자신과 하후씨 사이의 아들이라고 여겼으며, 사마예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서진이 멸망한 후, 사마예는 사마의의 직계후손으로 왕도(王導)등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건업에서 동진왕조를 개창하고 진나라의 수명을 이어간다.

 

바로 사마예에게 수수께끼같은 신세내력이 있어, 사람들은 그를 '우예'라고 비웃었다. 사마의가 온갖 방법으로 막으려 했더 '우계마후'가 이렇게 극적인 방식으로 실현된 것이다.

 

3. 고대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

 

중국고대에 한 왕조가 건립되면, 그중 가장 중요한 작업이 바로 자신의 '정통성'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소위 '정통성'은 국가의 '문화소프트파워'이다. 왕조교체때, 제왕은 천하에 공포하여, 자신의 정권이 전정권을 대체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위로는 하늘이 내린 명령에 따르는 것이며, 아래로는 백성들의 바램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느 왕조가 신속히 멸망했다면, 후세의 사가들은 정통성이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 동진이나 전체 진나라가 그러했다.

 

한나라이래로 '정통성'에 대한 중요한 요소는 세 가지이다: 첫째, 공간적인 통일, 둘째, 시간적인 오덕순환(五德循環), 셋째, 군주자신의 덕성(德性). 한나라가 진나라를 대체할 때, 진나라군주는 군주로서의 덕을 잃었고, 진이세를 끝으로 멸망한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유향(劉向) 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나라는 마땅히 유씨정권이 영씨정권(진나라)의 '수덕(水德)'을 건너뛰어 직접 주(周)나라의 '화덕(火德)'을 계승해야 한다고. 한나라는 그리하여 '염한(炎漢)'으로 불린다. 동한말기, 조조는 허창(許昌)으로 천도할 때, 조위의 '토덕(土德)'이 한왕조의 '화덕'을 대체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오덕종시학설(五德終始學說)은 지나치게 혼란스럽고, 버전도 가지각색이다. 그리하여, 후세에는 통일과 군주의 덕성으로 왕조가 정통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덕성은 양한 내지 위진때, 각종 참위설에 의해 좌우되었다. 왕망이 바로 전형적인 사례이다. "우계마후"는 일정한 정도로 후세의 진나라 정통성에 대한 멸시와 경시를 보여준다고 할 수있다.

 

"우계마후"는 남조 양(梁)나라의 사가(史家) 심약(沈約)의 <송서(宋書)>, 북제의 사가 위수(魏收)의 <위서(魏書)>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남조의 네개 왕조 송제양진(宋齊梁陳)은 모두 동진의 기초 위에서 건립된 것이다. 그리고 모두 신하가 군왕을 몰아내고 건립한 왕조들이다. 그들은 자신 정권의 정통성을 증명하고자 했고, 자연히 전왕조인 동진의 정통성을 깍아내렸다. 그리하여, 그들의 어용문인들이 대거 '우계마후'를 선양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조와 대립한 북조정권은 적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당나라때 만들어진 <진서(晋書)>에는 "우계마후"가 진나라의 정통성에 대한 부인이라고 기재했다. 서진왕조의 건립은 조위를 계승한 것인데, 이는 권신이 나라를 찬탈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진과 동진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능력이 부족하여, 결국 외족의 침입을 맞았고, 그 자체가 군주가 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후세의 사가들은 대다수가 진나라의 정통성을 비판하면서 "우계마후"를 동진정통성의 최대오점이라고 얘기하고, 항상 언급하게 된다.

 

그런데, 동진의 저명한 사가인 손성(孫盛)은 왜 <진양추(晋陽秋)>에 "우계마후"를 기록해 두었을까? 먼저, 손성 자신이 조위의 명문집안 출신이다. 그의 고조부등은 모두 조위때 고관을 지낸다. 그는 사마씨가 권력을 찬탈한데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손성은 강남으로 피난갔고, 진나라는 강남문제를 처리하는데 뜻은 있었지만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당패오당복(中國當敗吳當復)", "오마유도강(五馬遊渡江), 일마화위룡(一馬化爲龍)"과 같은 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참위설이 성행하게 된다. 이는 청담(淸淡)을 숭상하던 손성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그는 진나라의 정통성에 의문을 품는다. 결국 동진황실은 이미 환온(桓溫)등 권신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허수아비가 되었다. 이런 건주가 어찌 천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더구나 동진은 강동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편안자득(偏安自得)하고 있었다. 천하통일은 이미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여러가지 요소들로 인하여, 손성은 동진의 정통성에 의문을 품고, "우계마후"같이 널리 알려진 참위설을 그는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결론

 

우금을 정말 사마의가 '우계마후'의 참어를 두려워해서 죽인 것일까? 사마예는 정말 하후씨와 우흠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일까? 기실 이런 문제들을 지금와서 고증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계마후"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마씨의 혈통에 대한 의문이지만, 실제로는 후세 내지 당시의 사가들의 진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비판과 멸시이다. 사마씨가 건립한 왕조는 존속기간이 짧았고,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계속하여 '득국부정(得國不正)'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중국의 전통문화가 '덕'과 정통을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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