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조약(南京條約)": 굴욕인가 외교승리인가?
글: 양금린(楊錦麟)1840년이래, 중국인은 눈물나는 탐색을 시작했다. 미망(迷茫)과 배회(徘徊) 속에서 항쟁, 학습, 융합, 개혁과 개량을 진행했다. 외부열강세력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내부정치투쟁이 끊이지 않고, 내외부의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양무운동이 시작되고, 새로운 지식인층이 성장하기 시작하고, 민중의 인식수준도 제고되고, 공업도 발전되었다. 여러가지 추진요소들이 합쳐지고 모이면서 변화는 계속되었다.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열강들의 교주만(膠州灣), 광주만(廣州灣)등의 조차는 중국인들을 자극했고, 이는 근대중국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러한 커다란 치욕은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놀라고 난 이후에는 회의, 방황, 곤혹과 분노를 느낀다. 이건 민족정신의 대각..
2024. 7. 23.
"만주(滿洲)" (3): 민족혁명 배경하의 "배만(排滿)"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3의 체결과 더불어, "중화민족은 가장 위험한 시기가 도래했다" 내우외환의 곤경에 혁명당인들은 보편적으로 폭력혁명만이 철저히 청나라 통치를 전복시키고,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런 시대적 배경하에서, 그들은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칠 뿐아니라, 사상등 분야에서 일련의 "배만(排滿)" 작업을 하게 된다. 첫째, "만주는 중국이 아니다"라는 점을 논증하다.청나라 통치를 전복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혁명당인들은 '만주인'들이 국가와 민족에 끼친 악랄한 죄악을 상세하게 드러낼 뿐아니라,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예를 들면, 추용(鄒容)은 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무릇 사람이 자신의 종족을 좋아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으로..
2024. 7. 22.
"만주(滿洲)" (2) : 17세기 서양인들이 본 '만주족'
글: 한팔리문예지성(汗八里文藝之聲)217세기에 들어선 이후, "만주굴기"와 명청왕조교체를 위시한 일련의 동아시아사건은 유럽각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이런 배경하에서 중국에 와 있던 유럽선교사들은 자신의 견문을 종합하여, "만주굴기"와 관련돤 저작을 적지 않게 남겼고,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왔다.서양인이 그린 아담샬과 순치첫째, 만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17세기 이전까지 유럽선교사들의 글에 나오는 "타타르인(韃靼人)"은 주로 장성 이북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수시로 명나라변경을 침범한 몽골인을 가리켰다. 오랫동안 백산흑수(장백산, 흑룡강)에 거주해오고 있던 여진인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예를 들어,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저술에는 거의..
2024.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