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천계(天啓)원년에 발발한 사안지란은 명말청초 서남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대동란이다. 이 반란은 17년이나 끌었으며, 그동안 중경(重慶)이 함락되고, 성도(成都)가 102일간 포위당하며, 준의(遵義)도 두 차례 함락되었다. 반란의 여파는 사천, 운남, 귀주등지에 미쳤으며, 명나라조정은 운귀총독(雲貴總督) 주섭원(朱燮原)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개성의 관군을 끌어모아 9년간 전투를 벌이고, 그후에도 다시 8년간 여파를 겪으면서, 17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비로소 평정할 수 있었다. 사안지란이 평정된 후, 명나라조정은 영녕(永寧)에 개토귀류(改土歸流)의 정책을 실시하여, 영녕사씨(永寧奢氏)라는 천년토사(千年土司)를 철저히 뿌리뽑는다.
- 영녕사씨
서남지역은 자고이래로 "철타토사(鐵打土司), 유수황제(流水皇帝)"라는 말이 있었다. 그 뜻은 중앙정부의 황제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토사는 항상 그 지역의 세습영주였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집안은 파주양가(播州楊家)이다. 그들 집안은 당, 송, 원, 명의 4개왕조에 걸쳐 파주지역을 지배했다. 만일 양응룡(楊應龍)이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명나라조정은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양씨집안은 파주를 700여년간 지배했다. 그러나 이들 집안도 서남토사들 중에서는 젊은측에 속한다. 사안지란의 두 주인공 사씨(奢氏)와 안씨(安氏)는 그 역사가 더욱 길다. 사씨는 이족(彛族)으로 기원24년에 영녕을 점거했다; 안씨도 이족으로 촉한후주223년에 수서(水西)를 차지한다. 두 집안은 천년의 역사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영녕은 당나라때 인지(藺地)로 불렸으며, 남조(南詔)에 복속된다; 송나라때는 대리(大理)에 귀속되고; 원나라때는 중앙정부에 귀순하여 영녕로(永寧路)를 설치한다. 나중에는 영녕선무사(永寧宣撫使)로 개칭된다. 명칭이 어떻게 변하든 사씨는 영녕을 핵심지역으로 하여 영토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했지만, 시종 영녕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서남에 대한 처리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선위사(宣慰使)를 1급토사관, 선무사를 2급토사관으로 한다. 사씨가족은 영녕선무사의 직위를 대대로 세습하였는데, 그 집안에서 유명한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봉황전기>에서 칭송받는그 "사향부인(奢香夫人)"이다. 그녀는 주원장의 홍무시기 민족단결과 국가통일에 노력했다. 사향부인은 멀리 귀주의 수서로 시집갔는데, 그녀로 인하여 영녕과 귀주수서토사간에는 인척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2. 사숭명(奢崇明)의 난
만력말기, 사숭명은 영녕사씨의 가주와 영녕선무사의 직위를 승계한다. 사숭명은 사람됨이 잔혹하고, 야심과 모략이 있었다. "이미 다른 뜻을 품고 있었으며, 병력을 움직인 것은 역모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가주 사숭주(奢崇周)는 아들이 없었는데, 사숭명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가주의 자리에 오른다.
천계원년, 요동의 상황이 악화되자, 사숭명은 적극적으로 조정에 상소를 올려 병사 2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가서 후금과 싸우겠다고 말한다. 명나라때, 토사의 병력을 동원하여 침입한 적과 맞서 싸우게 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가정(嘉靖)시기 동남연해에서 왜구와 싸울 때 서남의 낭병(狼兵)이 참전한 바 있다. 진량옥(秦良玉)의 백간병(白杆兵)도 토사병이다; 대명의 용호장군(龍虎將軍), 건주위지휘사(建州衛指揮使) 누르하치, 파주 양응룡도 모두 조선으로 가서 왜군과 싸우겠다고 청했다. 사숭명의 요청을 조정은 받아들인다. 사씨의 사병은 대규모로 중경으로 간다. 중경의 관료는 지원병이 도착한 것을 보자, 그들을 중경주변에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사씨의 병력은 중경을 떠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주둔하며 이동하지 않았다." 그후, 사숭명은 무기를 서둘러 제작하고, 영녕에서 더 많은 토사병을 중경으로 보낸다.
9월 17일에 이르러, 영녕의 여러 병마가 중경을 포위한다. 중경의 관리들은 이상함을 알아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바로 이 날, 사숭명은 사천순무(四川巡撫) 서가구(徐可求)와 중경지부(重慶知府) 장문병(章文炳)을 죽여버리고, 중경을 약탈한다. 그리고 중경에서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승상(丞相), 오부(五府), 육부(六部)를 설치하고 사방으로 출격한다. 그중 한 부대는 기주(夔州)의 제방을 파내서 기주를 물에 잠기게 한다; 한 부대는 준의를 점거하고, 한 부대는 노주(瀘州)를 점령하였으며, 한 부대는 천서잔도(川西棧道)를 끊어버린다. 사숭명은 수만명을 통솔하여, 성도를 향해 진공을 개시한다. 도중에 신도(新都), 내강(內江)을 함락시킨다. 사씨반군의 일부병력은 납계(納溪), 노주, 강안(江安)을 약탈하고 살륙한다. 바로 이때, 사천의 병마는 대부분 이미 요동으로 가서 후금과 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천 각지방은 병력이 비어 있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성도를 102일간 포위한다. <명사>에는 "십년동안, 하늘의 해를 볼 수 없었다"고 적었다.
3. 안씨의 가담
천계2년 이월이 되어, 사씨와 인척관계인 귀주수서의 토사 안방언(安邦彦)은 조정의 병력이 비어있는 틈을 보고, 반란에 호응한다. 안방언은 당시 수서선위사(水西宣慰使) 안위방(安位方)의 숙부이다. 안위방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안방언은 그에게 불복하고, 스스로 선위사에 오르고자 한다. 그러나 조정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정에 원한을 품게 된다.
일찌기 사숭명의 반란초기, 명나라는 반란이 귀주까지 만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귀주에 군비를 강화하도록 한다. 안방언은 사씨의 반란군을 막는다는 명목하에 병력을 필절(畢節)로 출동시킨다. 조정에서 필절의 방어를 강화하기는 했지만, 병력이 박약하여 결국은 함락된다.
필절을 점령한 후, 안방언은 필절을 핵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출격하여 필절 사방의 현성을 점령한다. 병력은 귀주의 수부(首府)인 귀양(貴陽)을 포위했고, 일시에 사천, 귀주가 위기일발의 상황에 몰린다.
4. 주섭원의 토벌
사숭명이 성도로 진군할 때, 당시 촉왕(蜀王)은 주섭원으로 하여금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주섭원은 만력때의 진사로, 사숭명이 반란을 일으킬 때 이미 관직이 사천우포정사(四川右布政使)에 이르고 관저는 성도에 있었다. 당시 성도의 수비병력은 겨우 2천명이고, 물자도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 주섭원은 급히 조정과 친한 여러 토사들에게 성도로 와서 반란을 막아주도록 요청했고, 석주토사(石柱土司) 진량옥등이 조정의 요청에 호응해서 와주었다. 그리하여 성도의 위기국면은 완화될 수 있었다.
성도의 포위망이 풀린 후, 명나라는 주섭원을 사천순무로 임명한다. 반란평정을 위하여, 주섭원은 병력을 훈련시켜야 했고, 병력을 훈련시키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사천의 부고(府庫)에는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주섭원은 한편으로 사천의 여러 번왕과 호족들에게 자금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하고, 다른 한편으로 중앙정부에 자금을 요청했다. 중경과 성도는 모두 조정이 서남을 통제하는 핵심요지이므로 잃어서는 안되었다. 주섭원의 요구에 사천의 호족들은 6만냥을 내놓았고, 조정의 병부와 호부도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이렇게 하여 주섭원은 겨우 반란군의 공세가 가장 맹렬했던 천계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반군을 상대할 때, 주섭원은 백련교(白蓮敎)의 그림자도 볼 수 있었다. 백련교는 명,청 두 왕조의 골치덩어리였다. 가장 심했던 것은 건륭말,가정초 천섬초예악(川陝楚豫鄂, 사천, 섬서, 호남, 호북, 하남)의 5개성에서 일어난 백련교의 난이다. 사안지란때 무수한 백성들은 거처를 잃고 유랑해야 했으며, 백련교는 그 틈을 파고 들어 많은 신도를 가입시킨다. 한때는 면주(綿州)를 포위하기도 했다. 백련교는 관군의 세력을 분산시켰고, 또한 사숭명반란의 규모를 더욱 확대시켰다. 주섭원은 철혈수단으로 백련교를 진압한다. 백련교의 두목은 사숭명에게 도망가서 "공모하여 반군이 된다" 백련교는 봉건미신을 이용하여 사숭명을 선전한다.
천계2년 오월에 이르러, 주섭원은 사숭명의 부하 나건상(羅建象)등을 회유하여, 중경을 수복한다. 사숭명은 영녕으로 물러난다. 영녕에서 주섭원은 다시 사숭명을 격패시킨다. 사숭명의 주력은 소멸되었지만, 그는 잔당을 이끌고 귀주 수서로 도망친다.
5. 사안지란이 평정되다.
사숭명과 안방언이 합쳐지자, 귀주의 반군은 병력이 크게 늘어난다. 귀주순무(貴州巡撫) 왕삼선(王三善)은 천계4년 반군에 살해당하고, 준의는 다시 함락된다. 그외에, 반군은 병력을 보내어 운남, 귀주 접경지역을 기습한다. 사숭명의 아들 사인(奢寅)은 시험적으로 영녕을 향해 공격을 진행한다. 이때 명나라의 정책은 각성의 순무로 하여금 자기 관한지역내의 반란군을 상대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천순무 주섭원은 귀주지역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후 명나라조정은 정책을 수정한다. 주섭원에게 병부상서직을 주어 천귀전계(川貴滇桂, 사천, 귀주, 운남, 광서)군무를 총괄하게 한다. 그리고 상방보검(尙方寶劍)을 하사한다. 그는 군대를 준의에 주둔시키고, 반군을 소탕한다. 천계6년 육월, 주섭원은 부모상을 당하고, 조정은 반군에 대한 초무(招撫)를 진행한다. 그러나 사숭명은 이를 기회로 삼아 지연전술을 쓰다가 1년후 사숭명, 안방언은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숭정원년, 주섭원은 다시 기용되고, 계속하여 병부상서의 직함을 달고, 운귀천악계(운남, 귀주, 사천, 호북, 광서)5개성의 군무를 총괄하고 귀주순무직을 겸임하며, 반란토벌에 주력한다. 숭정2년 팔월 십칠일, 사안은 피살되고, 반군의 주력은 기본적으로 소멸된다. 다만 사안의 잔여세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숭정10년에 이르러 주섭원은 수서토사를 다시 분할하여 일부는 개토귀류하고 일부는 다시 토사를 봉하여, 서남의 최대토사였던 수서안씨는 철저히 와해된다. 이렇게 하여 사안지란은 완전히 평정된다.
사안지란은 서남의 백성들에게 큰 재난이었다. 사안지란때, 운남, 귀주, 사천 3개성의 수백만명이 생활에 영향을 받는다. 반란평정과정에서, 주섭원은 토사를 다시 봉하는 방법을 써서 많은 소규모토사들이 새로 나타난다. 영녕과 수서의 대규모토사의 땅을 그들에게 나눠주고, 서로 견제하게 하여 명나라의 사천, 귀주의 토사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비록 사안지란에서 명나라조정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번 전쟁은 명나라의 내부소모를 가속화시켜, 유한한 역량과 자원을 서남에 소모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동북여진이 받는 압력을 감소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사안지란은 명나라를 붕괴시킨 최후의 지푸라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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