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이성량(李成梁)의 군현조선론(郡縣朝鮮論)

중은우시 2024. 9. 4. 14:59

글: 자귤(紫橘)

명나라말기에 이성량은 동북아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그가 요동(遼東)에 있는 동안 여진(女眞)의 굴기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명나라에 충성한 장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8년의 한 사건은 이성량의 허약과 야심을 보여준다. 이성량이 조선을 군현으로 삼으려한 거동은 이미 명말군벌할거의 싹이 드러난 것이다.

  1. 광해군의 계위를 둘러싼 갈등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은 조선 선조(宣祖)의 차남(次男)이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도 않은 상황하에 1608년에 왕으로 등극한다. 급히 등극하게 되고, 게다가 명나라에서 그를 세자(世子)로 책봉하는 것을 거절당하자, 광해군의 통치는 불안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통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광해군은 즉위ㅜ 즉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어 승인해줄 것을 요청한다. 다만, 명나라조정은 이때 '국본지쟁(國本之爭)'의 여파가 남아 있었고, 조정신하들은 선조에게 장남 임해군(臨海君)이 있는데 왜 그에게 왕위를 잇게 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표시한다. 예부에서 이렇게 추궁하자 조선의 사신 이호민(李好閔)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부관리의 추궁에 대답하는 과정에 여러가지 잘못된 말을 하게 된다. 그는 임해군이 '중풍에 걸렸으며, 상(喪)을 지키고 있다" "이미 물러났다" 그렇게 스스로 왕위를 광해군에게 넘겨주었다고 거짓말을 하고만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예부는 요동도사(遼東都使) 엄일괴(嚴一魁)와 자재주지부(自在州知府) 만애민(萬愛民)을 육월 십오일 조선으로 보내어 조사하도록 한다.

명나라의 조사단이 오자, 조선내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다. 임해군은 이미 광해군에 의해 역모죄로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조사단이 진상을 조사하게 되면, 광해군의 지위를 지키기 어렵게 될 수 있었다. 결국 조선조정은 거액의 돈과 인삼등 토산품으로 조사단을 접대한다. 엄일괴등은 조선의 재물을 받은 다음 북경에 보고하여 조선사신의 말이 맞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10월이 되어 명나라는 광해군을 책봉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명나라의 이런 조치로 광해군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이는 그가 나중에 명나라를 멀리하고 후금을 가까이하게 된 원인이 된다.

2. 군현조선(郡縣朝鮮)

명나라의 조사단이 조선에 들어가서 조사하기를 전후하여, 요동총병(遼東總兵) 이성량은 "조선의 혼란을 틈타 조선을 군현으로 삼자"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광해군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성량과 순무(巡撫) 조즙(趙楫)이 함께 올린 <밀게(密揭)>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조선은 형제가 사로 써우고 있다. 청컨대 병력을 일으켜 공격하여 취한 다음 군현을 설치하자". 여기의 형제가 서로 싸운다는 것은 임해군, 광해군 및 2살짜리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간의 싸움을 말한다. 이성량은 이런 갈등을 이용하여 명나라와 조선간의 책봉관계를 타파하여, 외번 조선을 내지 성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성량의 <밀게>를 둘러싼 의도는 사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주류견해는 이성량이 조선이 요동의 진실한 소식을 명나라조정에 보고할 것을 겁내어, 조선을 없애고자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력제 후기에 명나라는 국력이 날로 쇠락했다. 1601년, 이성량이 제2차로 요동총병을 맡았던 시기에, 요동의 국면은 이미 위기일발이었다. 소위, "여덟번이나 장수를 바꾸었고(八易將), 군사업무는 모조리 느슨해졌고, 전쟁물자는 남아 있지 않아, 요동의 일은 크게 무너졌다." 이성량은 요동여신의 굴기를 민감하게 포착했고, 심지어 그것이 명나라의 통치에도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이성량은 국면을 만회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광감세사(鑛監稅使) 고준(高準), 순무 조즙과 결탁하여 대거 수탈한다. 세 사람은 당시에 "요좌삼악(遼左三惡)"으로 불렸다. 당시 요동의 민요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요의 사람은 뇌가 없다. 모두 고준이 파갔기 때문이다; 요동의 사람은 뇌수가 없다. 모두 고준이 빨아갔기 때문이다. 실은 이성량이 대신 파가고, 대신 빨아간 것이다."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한광우(韓光佑)는 일찌기 조정에 "건추교횡(建酋驕橫. 건주여진의 우두머리는 교만하고 횡행한다)"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 조정의 경계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이성량은 양민을 죽여서 전공으로 보고하여 중앙정부를 속이고, 건주여진과 결탁하여, 쌍방의 세력을 나누었다. '건주여진과 결탁하여' '영토를 나눠주고 비석을 세웠다' 그렇게 일시의 안정을 얻었다.

이성량이 요동총병으로 있던 8년간, 누르하치를 다독이는데 능했고, 중앙에는 천하가 태평하다는 겉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누르하치의 세력은 이미 억제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누르하치의 굴기에 대하여 이성량이 가장 잘 알고 있었고, 여긴에 가까운 조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직 북경의 중앙조정만 전혀 모를 뿐이었다.

조선은 여러번 명나라에 누르하치에 대한 위험을 경고한 바있다. 예를 들어, 1605년, 조선은 명나라의 여러 관리들에게 "노정(虜情)" 자문(諮文)을 보낸다. 그러나, 이 소식은 니우입해(泥牛入海,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로 들어가다)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조선이 이런 정보보고를 하는데 대하여 이성량은 매우 골치아파했다. 특히 그가 '할지입비(割地立碑)'한 일은 그러했다. 이성량은 밤에 재대로 잠들 수가 없었고, 조선이 직접 북경에 보고할까봐 우려했다. 그리하여, '군현조현'이라는 아이디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3. 명나라조정의 군현조선에 대한 반응

조선은 명태조의 불정지국(不征之國)이다.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이성량이 "군현조선"을 제안한 중국측문서는 만력36년(1608년) 오월 병과급사중 송일한(宋一韓)의 "직진요좌수병지원소(直陳遼左受病之原疏)"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성량은 조선이 천조의 성지를 위배하여 폐장입유(廢長立幼)했으니, 그 죄는 옛날 고구려 연개소문이 시군한 것과 같고, 마땅히 나라를 없애야 한다고 했다.

<신종실록. 만력삼십육년육월을측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과급사중 왕원한(王元翰)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이성량은 조선의 왕위가 정해지지 않은 틈을 타서, 그 기회에 조선을 군현으로 삼고자 한다. 이성량의 말에 대하여 조정은 명확히 반대하지 않았고, 이것은 조정이 이성량으로 하여금 조선을 멸망시키게 만들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정의 망설임은 웅정필(熊廷弼)의 상소로 철저히 사라진다.

요동순안(遼東巡按) 웅정필은 상소를 올려, 이성량, 조즙등은 사사로이 영토를 할양하고 경계비석을 세워 건주에 땅을 내주었다고 말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비문의 내용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너희 중국, 우리 외국의 양가는 일가이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명나라의 토사이고, 건주좌위지휘사, 정2품용호장군, 오군도독부도독첨사이다. 그런데 '외국'으로 표시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웅정필은 이성량이 건주여진을 종용했을 뿐아니라, 외적과 통모하여 매국했다고 고발한 것이다.

4. 조선의 이성량의 "밀게"에 대한 반응

명나라말기의 조정에 비밀이라는 것은 없었다. '군현조선'의 토론도 당연히 당사국인 조선에 알려지게 된다. 조선의 조정은 깜짝 놀라서 속속 '이는 큰 화의 징조이다'라고 말한다. 이성량의 군현조선은 결국 조선에 할거하며, 조선의 부유한 토지와 부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은 외번으로 북경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고, 그저 북경조정의 결정을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웅정필의 상소가 중앙정부에 올라가면서 요동의 실제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1609년 6월, 북경은 이성량의 '군현조선'에 대한 입장이 통일된다. 모두 이성량이 "오랑캐에 잘보이기 위해 건주와 결탁하고, 망녕되게 조선을 취하여 대대로 차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성량의 가족은 원래 조선에서 왔다.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선왕이 되고자 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이성량이 누르하치와 결탁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결국 이렇게 보면 이성량은 야심가이고 군벌인 것이다.

6월 19일, 이성량은 "관직에서 해임되고 북경으로 돌아온다" 군현조선의 일은 이렇게 끝났다. 다만 밀게사건과 누르하치가 굴기한 것에 대하여, 조선으로서는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만력36년하반기이후 압록강의 변방수비를 강화하는데, 방비하는 것은 후금만이 아니라, 명나라까지 포함된다.

5. 이성량의 군현조선이 남긴 문제

비록 이성량의 군현조선 음모는 실패했지만, 여진의 굴기에 대하여 명나라는 좋은 대응방안이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전략적인 지위는 더욱 종요해진다. 그리하여, 이성량의 군현조선의 안건이 다시 부상하게 된다.

1608년 12월, 급사중 송일한, 한광우는 "건추교횡", "지금 누르하치의 정예병사가 이미 3만이 넘는다." 그러나 요동에서 싸울 수 있는 명나라군사는 "팔천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다음 해 3월, 웅정필은 현지조사를 거친 후 조정에 보고하여 말한다. 지금 건주는 몽골을 위협하고 있다. 몽골은 우리에게 돈만 달라고 하지만, 건주여진은 우리에게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식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력수단으로 건주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의 근거지를 치기 위하여, 조선도 반드시 대명의 전략에 포함시켜야 한다. "암중으로 지원을 받아서 의각지조(犄角之助)를 이루어야 한다"

1609냔, 명나라는 마침내 광해군을 책봉한다.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건주여진을 포위공격해주기를 희망했다. 다만, 누르하치가 훌룬(忽剌溫)여진과 싸울 때, 누르하치는 조선에게 길을 빌려 훌룬여진을 친다. 그러자 명나라의 병부는 조선이 이미 건주여진의 통제를 받는다고 여기고, 방어벽의 역할을 잃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건주의 굴기, 요동의 곤경, 광해군의 원명친금(遠明親金), 이 모든 것은 송일한등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군현조선의 방안을 고민하게 만든다. 서광계(徐光啓)는 "조선감호론(朝鮮監護論)"을 내놓아, 조선의 내정에는 관여하지 않고, 조선의 외교 ,군사는 대명이 직접 처리하자고 한다. 웅정필은 "조선변통론(朝鮮變通論)"을 내놓는데, 직접 조선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병력을 훈련시키고, 전통적인 책봉체계를 타파하자고 주장한다. 이들 주장은 모두 이성량의 군현조선의 여파라 할 수 있다.

결론

이성량이 조선에 할거하겠다는 야심은 비록 맹아단계에서 말살되었지만, 동북아관계에는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만력36년 이성량의 군현조선제안의 도화선은 겉으로 보기에 명나라가 광해군책봉을 거절하여 이성량에게 이용할 틈을 준 것이지만, 이는 이성량이 건주세력의 성장에 무력하고, 그저 영토를 떼어주며 안정을 도모하며, 일이 터질까봐 우려하면서, 다른 속셈을 품게 된 것이다. 만일 명나라가 이성량의 제안대로 집행했더라면, 조선은 아마도 명나라의 하나의 성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