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2차대전시기 진실한 중국: 저항파가 많았을까, 협력파가 많았을까?(2)

중은우시 2024. 10. 1. 23:41

글: 허검홍(許劍虹)

항전역사를 되돌아보면, 국군의 저항은 확실히 용맹했고, 중국군민의 희생은 확실히 참중했다. 다만 진정한 저항자는 엄격히 말해서 소수중의 소수이다. 국군사망총수는 320만이다. 당시 전국인구 4억을 놓고 보면, 실제 희생자는 1/100도 되지 않는다. 만일 다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본침략에 희생된 민중의 수량을 더해보면, 1,500만 내지 3,500만이다. 역시 1/10이 되지 않는다.

대후방은 제외하고 계산한다면, 즉 중경국민정부통치지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협력자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필자가 인터뷰한 항일공군전의 영웅이자 중앙항공학교 제5기졸업생인 장광명(張光明)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의 공항주변에는 자주 일반백성이 쏘는 신호탄이 일본폭격기에 목표를 알려주곤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이 점령하지 못한 중국영토에도 확실히 상당한 수량의 민중이 왕정위 선생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말이다.

전쟁터에서 일본군에 저항한 하층국군사병들중 많은 사람은 강제로 징용되어 온 것이었다. 만일 정말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었더라면 편안하게 사는 것을 선택하지 장개석을 위해 목숨을 걸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다시 눈을 일본점령구로 돌리면, 왕정위정권이 통치가 안정된 '치안구' 특히 상해, 남경, 북경, 천진, 제남과 청도등으로 대표되는 대도시는 거의 중국인이 들고 일어나 일본침략자에 반대하는 경우를 볼 수 없었다.

반대로,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혹은 싱가포르, 마닐라가 일본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중국에 전해졌을 때, 각 대도시의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길거리로 나와서 '대동아전쟁'의 승리를 축하했다. 일본인들의 '아시아인들이 아시아를 건립하자'는 구호는 확실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파고 들었다. 특히 홍콩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중국인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소위 '준치안구'와 '비치안구'의 국공양군유격대와 일본군간의 추악한 결탁도 더더욱 일상적이었다.

일본군의 소탕을 버티지 못하거나, 일본군과 공산군의 협공을 당한 국군장군들 사진원(謝晋元), 손전영(孫殿英), 방병훈(龐炳勛), 진효강(陳孝强) 및 방선각을 포함하여 모두 왕정위의 비호를 구하게 된다. 이를 보면, 중국항전의 역사는 전시동맹국 혹은 양안정권이 선전하는 것처럼 흑백이 분명했던 것이 아니다. 어쨌든 많은 우리가 알고 있는항일명장들은 왕정위를 철두철미한 '한간(매국노)'로 보지 않았다.

왕정위정권이 미국에 선전포고한 것은 자연히 일본군의 반미선전에 협력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상 당시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일본의 승리가 전체 유색인종의 승리라고 믿었다.

항일이 유일한 구국의 길이었던가?

필자가 접촉해본 국민당계열의 선배들 특히 일본점령구에 있었던 선배들은 왕정위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된다. 비록 동시에 아무도 항전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왕정위를 긍정하는 것이 반드시 2차대전의 일본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많은 경우 왕정위를 추종하는 선배들이 장개석을 추종하는 선배들보다 더욱 반일한다. 그리고 당금 대만사회의 '미일(媚日)'풍조를 더욱 한탄한다. 이를 보면, 왕정위의 명예회복을 지지하는 것과 친일은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독일계 스위스기자인 Werner Reins는 그가 1982년에 출판한 작품에서 유럽의 나치협력자들을 분류했다. 중립협력자, 무조건협력자, 유조건협력자 및 전술적협력자등 4개유형으로 나누었다. 그중 무조건협력자만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전면적으로 나치사상을 수용하였고, 적극적으로 나치점령군과 협력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생존의 이기주의 혹은 자체적인 전략목표의 실천을 위해 '적을 이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보원(趙保原)등 적후작전(敵後作戰)의 국군장군은 왕정위정권에 의해 화평건국군(和平建國軍)으로 개편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중경의 번호도 유지했다. 동시에 두 국민정부의 보급을 받아 산동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공산당무장을 억눌렀다. 즉 일종의 전술형의 협력자사고방식이다. 일본군을 이용하는 것은 일본군을 이용하는 것이지 절대로 일본군이 패전하는 상황하에서도 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를 끌어안지는 않는다. 단지 일본이 패전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항전진영으로 돌아온다. 이는 절대적으로 투기적인 행동이다.

도대체 중국인은 이데올로기에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받아들였던가? 필자는 지금까지도 답을 찾고 있다. 또한 테일러 교수에게 왕정위가 정말 자신은 일본군이 황인종을 '해방'하는 것으로 믿고 협력했는지의 문제를 물어보았다. 테일러교수는 왕정위는 일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필자는 절대다수의 왕정위신도들은 최소한 필자가 접촉해본 왕정위신도들은 중립협력자, 유조건협력자가 아니라 전술적협력자들이었다.

그들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보는 것처럼 그들은 장개석이 이끄는 항전이 처음부터 미국 혹은 소련에 속은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항전의 결과로 얻는 것은 단지 중국군민이 서방열강을 위해 헛되이 힘을 쓴 것이고, 중국영토주권의 완정을 지켜내지 못하였을 뿐아니라, 외몽골의 독립 및 양안의 영구분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대만의 광복 및 사강의 국제지위는 중국으로 하여금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유일한 성취는 미국과 소련의 제국패업이었다.

중국이 평화중립의 길로 가기를 기대한다.

진주만기습이 발발한 후, 장개석은 내심으로 중화민국이 맹방의 지지를 받는다고 믿었고, 고군분전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왕정위의 신도들은 이는 중국국민당이 실패로 가는 시작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중경국민정부는 이로 인하여 일본과 단독으로 평화협상을 진행할 기회를 잃었을 뿐아니라, 미국의 도움을 받게 되면 동맹국과의 조화를 유지해야 하기때문에, 무력으로 배후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는 중국공산당을 압박하여 국민당에 투항하도록 압박하여 국가민족의 통일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말할 때, 항전은 왕정위의 신도에 있어서 중화민족을 불의의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따. 일본이 나쁘기는 하지만 여전히 중국인과 동문동종(同文同種)의 동아시아민족이다. 미국인과 소련인등 서방민족이야말로 중일간에 다투는 것을 이용하여 '손아귀를 동아시아에 펼치려는' 동방의 최대적국이라는 것이다. 중국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것은 미국이나 일본 어느 한 진영에 거는 것보다 중국이 중립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평양전쟁은 중국인에 있어서 '개가 개를 무는' 전쟁이기 때문에 어느 진영이 좋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쟁패에 중국인이 개입할 필요는 전혀 없다. 미국과 일본이 스스로 싸우게 하면 된다. 전쟁의 불길이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면, 만주국등 영토를 잠시 일본에 넘겨주는 것도 참을 수 있다. 중국이 전쟁에 휘말리지만 않는다면, 미국과 일본은 어쨌든 양패구상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중국이 승리한 측과 같은 진영에 서면 된다. 그러면 협상을 통해 모든 손실을 회복할 수 있다. 손실을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간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대다수 왕정위신도들의 생각일 것이다. 다만 현재 정치정확의 배경하에서 말하지 못하는 신앙이 되었다.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침략에 굳건하게 대항하는 것을 보면서 조롱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실상 중공은 항전시기 일본군과의 충돌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미일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정책으로 이득을 보았다. 그리고 전후에 중화민국정부를 대만으로 쫓아내고, 전체 중국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다. 공산군의 소장인 서휘조차 젤렌스키가 마지막 한명까지 싸우겠다는 주장을 '우둔하기 그지없다'고 조소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국민당을 지지하건 공산당을 지지하건 중국인은 21세기인 현재 더 이상 약국 혹은 소국이 강국의 침략에 직면했을 때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고 보지 않고, 마땅히 '식시무자위준걸(識時務者爲俊傑,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이다)'이라는 선택을 하여 유리한 상황하에서 타협하는 거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것은 중립적이지 않고, 혹은 어느 외래강적의 '장기말'이 되는 것이니 따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런 논술은 아마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전 국공의 전통적인 선전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협력자가 되고 싶은 자들은 말을 하기 어렵다.

서휘가 젤렌스키를 견책하는 발언을 한 이후, 즉시 대륙의 네티즌들에 의해 당대왕정위라고 욕먹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항일드라마를 보면서 자라온 대륙의 네티즌들은 아마 자신의 선대들이 유럽의 그 선대협력자들보다 더욱 허위적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항일을 선전한 것은 진심으로 역사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애국주의교육에 의존하여 영원히 중국공산당일당독재를 유지하기 위함이며, 만일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 그들이 제일선으로 나가 항일영웅이 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중화민국정부는 권위주의시대에 항전역사를 선전한 것은 주로 중화민국정부가 대만을 통치하는 정당성을 팔년항전과 대만광복의 역사에 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를 추종하여 대만으로 오고 또한 당국체제하에서 대권을 장악하고, 교육선전을 장악한 사람은 많은 경우 전쟁시의 협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협력자신분이었다는 것을 감추거나 혹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더욱 정부의 항전선전에 힘을 쏟았고, 그리하여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드는 해프닝들이 많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팔백장사>의 감독 정선새(丁善璽)는 원래 산동 청도에서 일본제국해군과 결탁한 협력자가정출신이다. 1970년대에 많은 중영에서 애국영화의 감제(監制)를 맡은 고진보(辜振甫)는 일본점령시대 대만의 '황민전범(皇民典范)'이었다. 해협양안의 왜곡된 애국반일교육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그리고 불행하게 그런 교육으로 많은 비극적인 전랑소분홍 및 심람선배들을 키워냈다. 입으로는 항일구호를 크게 외치면서, 행위에서는 언제든지 협력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륙에서 "반미는 일이고, 친미는 생활이다"라는 쓰마난(司馬南)이 나온 것도 이해가 된다. 자칭 장개석신도라는 심람지지자들은 장개석의 방식을 본받아 댐을 폭파하는 '초토항전'을 벌이는 젤렌스키를 욕한다. 사람들이 모두 항전을 소리높여 외칠 때, 내심에는 모두 왕정위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중국인의 내심에서 진정 해결되지 않는 문제일 것이다. 존엄을 내려놓고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강적이 침입했을 때 협력자를 선택한 역사적 사실을 직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캐나다의 학자인 Diana Lary의 연구에서 나온 것처럼, 용감한 중국인은 모두 항전때 혹은 이어진 국공내전때 모조리 죽임을 당했고, 그래서 살아남은 중국인은 왕왕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비록 입으로는 소리높여 통치당국이 좋아할 말을 하면서, 마치 언제든지 공산당 혹은 국민당의 주의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할 것처럼 하지만, 사실상 이런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바로 '생존'이라는 두 글자이다.

"생존"은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이다.

양안의 중국인들이 반드시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면서, 일본인에 대하여는 '덕으로 원한을 갚는' 방식으로 용서하지만,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으로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대치했던 장개석이나 모택동과 비교하면, 왕정위가 선배세대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는 이유는 대동아공영권의 구호가 사람들에게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거나 혹은 왕정위의 전략이 더욱 중국인의 전체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자신의 내심의 생각을 감추지 않아도 되도록 하면서, 말과 생각을 일치하여 자신이 갖아 원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생존'이다.

왕정위가 통치하던 일본점령구에서만 중국인들은 자신이 '죽기 겁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범죄자로 취급되고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고 보면서, 욱일기를 높이 들고 '대동아성전만세'를 외치다가, 같은 이유로 미군이 일본을 폭격하면 역시 '자유민주만세'를 소리높여 외칠 수 있다. 왕정위의 화평건국군은 절대로 절대로 일본군 혹은 동맹군의 편을 들거나 혹은 양자간을 오간다고 해서 너를 죽이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온 장개석이나 모택동정권과 전혀 달랐다.

이를 보면, 왕정위정권의 존재는 진정으로 그 시대 다수 중국인들의 내심의 생각에 부합했다. 일본이 승리하건 미국이 승리하건 모두 중국인자신의 승리는 아니다. 설사 장개석이 이끄는 중화민국이 세계4강에 들어가더라도, 일반백성의 생활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심지어 중경의 군대가 일본점령구로 복귀한 후, 그들은 '망국노(亡國奴)'로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이것이 상해와 남경의 민중이 4년도 되지 않아 모택동을 지지하고 중화민국정부를 대만으로 쫓아낸 이유일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것은 순수한 저항자인 장개석도 아니고, 순수한 협력자인 왕정위도 아니며, 저항자와 협력자의 사이를 오간 모택동이었다. 마치 회색지대에 있을수록, 중국을 통치하는 패주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중국인의 '생존'이라는 생각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뿐아니라, 마찬가지로 중국인의 체면도 세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왕정위는 유일하게 중국인으로 하여금 당당하게 협력자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만든 지도자였다. 다만 이것은 그의 성공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실패와 '한간'이라는 오명도 얻게 만들었다.

왕정위사망80주년에 이른 지금, 해협양안의 정권은 다시 한번 양안인민에게 통일과 독립의 양극단중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단지 오늘날 대만에서 끝까지 저항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반공대륙(反攻大陸)을 외치던 장개석이 아니라, '무실한 대만독립공작자' 라이칭더(賴淸德)이다. 지금 많은 국민당지지자들은 더욱 당당하게 왕정위의 화평노선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한다. 게다가 중공은 동문동종의 중국인이다. 자연히 대만의 심람족군은 평화에 대한 추구에 전혀 레드라인이 없다.

왕정위의 유령은 영원히 흩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양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중국대륙은 민주로 향할 수 없다. 왕정위의 유령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열강이 다시 중국을 침략하지 않겠지만, 대만은 중공의 약소한 부분이다. 대륙인민은 마찬가지로 중공독재하의 '피통치자'이다. '생존'이 필요하면 항상 신시대의 '협력자'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설사 양안의 홍남록 3방이 선전에서 왕정위를 욕하지만, 3개진영내부에서는 모두 왕정위가 출현할 수 있다.

필자는 왕정위가 명예회복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양안의 홍남록 3방은 모두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한간' '미일마전졸(美日馬前卒, 앞잡이)' 및 '중공동로인(中共同路人)'의 모자를 마구 씌워버리지만, 아무도 자신이 강대한 적에 직면하여 타협을 선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국방부에서도 어떤 사람은 '통전지도'를 제기할 때 모두 대간(臺奸)이라는 모자가 씌워질까봐 조심한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대간'이라는 모자를 씌우는 사람중 몇 사람이나 진정 대만보위전투에서 마지막 1인이 되고자 할 것인가?

양안의 중국인 혹은 중국계가 만일 이런 표리부동, 사람들이 역겨워하는 전근대사고방식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체면이나 존엄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민족이 양안의 당국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마다 외적에 저항하는 애국열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추구하기 위하여 협력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고, 이는 우리가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현실이다. 다만 흑백이분론의 관점으로 협력자현상을 토론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오히려 시대의 사고방식을 초월하여 이런 현상이 나타난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같은 이치로, 1947년 2.28사건이 발발한 때로부터 1950년대 백색공포까지의 시기에서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대만적의 인사들은 '생존'을 위하여 국민당통치집단에 가입했거나, 심지어 이를 위해 많은 자기편의 사람을 배신했다. 유사한 역사에 직면하여 우리는 마찬가지로 시대를 초월하는 사고로 걸핏하면 상대방을 '대간'이란 모자를 씌우는 것에 대하여 연구해야 한다. 단지 도덕적으로 책망만 하면서 연구는 하지 않는다면, 왕왕 비극이 또 다른 형식으로 재연될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한 목적은 왕정위(汪精衛) 혹은 채효간(蔡孝干)등 50년대 국민당에 투항한 본토엘리트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필자의 사학분야의 조예는 아직 부족하다. 필자의 목적은 양안의 젊은 학자들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우리 민족의 '현실면(現實面)'과 '추루면(醜陋面)'을 인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민족우월감의 신화에 빠져있지 말고....생각해보라, 만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면, 절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오늘날처럼 반일을 외치고 있을까? 답안은 분명 부정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