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1356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민국(閩國): 망국의 조짐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글: 춘추소력(春秋小歷)오대십국시기에 복건은 민국이 할거하고 있었다. 민국의 경내에는 세 개의 중요한 성이 있다. 각각 복주(福州), 천주(泉州)와 건주(建州)였다.복주는 민국의 도성이니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천주는 민국의 왕씨(王氏)가 발원한 곳이고, 경제도 가장 발달한 지역이니 중요한 세금원이었다. 건주는 군사요충지로,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전국이 영향을 받을 정도이니,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복주는 황제 왕연희(王延羲)가 차지하고 있고, 건주를 다스리는 사람은 자사(刺史) 왕연정(王延政)이며, 천주는 자사 왕계업(王繼業)이 관리하고 있었다.왕연희와 왕연정은 이전에 여러번 갈등이 있었고,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쨌든 두 사람은 형제간이고, 금방 관계를 회복하고, 군신관계도 .. 2024. 8. 20. 사보의 난(沙普之亂): 명나라말기 운남(雲南)의 혼란상황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의 혼란한 국면에서 이자성(李自成), 장헌충(張獻忠), 후금(後金)등 유명한 반란세력을 제외하고, 사라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서남토사(西南土司)들도 있다. 중앙정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들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후로 36년간 지속된 사보의 난(沙普之亂)이다. 사보의 난은 운남(雲南)지구에 침중한 재난을 가져왔을 뿐아니라, 운남에서 이백년간 지속되고, 거의 명나라의 존속시기와 나란히 했던 목씨(沐氏)가족의 운남통치도 끝장내게 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명나라말기의 운남사보의 난은 운남 남부에서 발생했다. 이곳은 토사(土司)가 많고, 한인(漢人)은 비교적 적었다. 게다가 외국에 이웃하고 있었으며, 당시는 국경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늘 .. 2024. 8. 19. 명나라말기의 "가정병(家丁兵)": 유일하게 전투력이 있던 부대이며 명나라멸망의 원인이 되다.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의 소설을 보거나 TV드라마를 보면, 명나라말기에 위소병(衛所兵)은 이미 완전한 거지군대(乞丐軍)가 되어 버렸고, 변군(邊軍)도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유일한 역량은 각 장군들의 개인무장세력인 가정병(家丁兵)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가정군을 기르는 돈은 부정부패로 얻은 군비였다. 그렇게 하여 악순환이 이어진다. 군대의 전투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가정의 전투력은 갈수록 강해진다. 그렇다면, 가정병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명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켰을까, 아니면 늦춰주었을까?명나라 가정의 탄생가정제(嘉靖帝)때의 신하인 전미(錢薇)가 쓴 에 따르면, 가정의 기원은 정통제(正統帝)때부터이다. 정통시기 선대순무(宣大巡撫) 나형신(羅亨信)은 가장 먼저 가정군을 두자고 건의한 인물.. 2024. 8. 19. "네르친스크조약(尼布楚條約)": 왜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이를 국치(國恥)로 여길까?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청나라초기 강희(康熙)연간에 중국역사상 첫번째로 중요한 대외조약이 체결된다. 그것은 바로 네르친스크조약이다. 이 조약은 역대이래로 논쟁이 많다. 그리고 그 논쟁은 아주 재미있다. 즉 조약을 체결한 쌍방은 모두 공식적으로 이 조약이 불평등조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만, 쌍방의 학술계와 민간에서는 시종 두 가지 전혀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이 조약이 러시아에 불평등한 조약이어서 러시아의 국치라고 보고, 청나라쪽에서는 더더욱 이 조약은 전형적인 치욕조약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네르친스크조약의 내력에 대하여는 아마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러시아는 16세기이래 대외확장을 추구해왔다. 소위 쌍두응(雙頭鷹)으로 유럽을 공략하는 것은 놔두고라도, 동방에 대하여 우랄산맥을.. 2024. 7. 29. 명나라때의 "왜구(倭寇)"는 일본인이었을까? 글: 조대부(趙大夫)왜환(倭患)의 근원대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명나라때 창궐했던 왜구는 당시의 "해금(海禁)"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명나라가 건립된 후, 엄격한 "해금정책"을 실행한다. 정부와 해외국가간에 조공무역관계를 유지하는 외에 나머지 민간해상무역은 일률적으로 금지되었다. 명태조 주원장의 홍무(洪武)시기에 여러번 명을 내린다: "바다에 인접한 백성들이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바다에 인접한 백성이 사사로이 해외 여러 나라와 통상하는 것을 금지한다." "인민이 마음대로 바다로 나아가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한다." 명성조 영락(永樂)시기에 약간 느슨해지는 했지만, 여전히 "해금"정책은 위배할 수 없는 '조훈(祖訓)'이었다.그후, "해금"정책은 조이기도 하고 느슨해지기도 .. 2024. 7. 26. 진실한 이릉지전(夷陵之戰): 유비는 겨우 5만을 거느렸고, 제갈량은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글: 역사전쟁(歷史戰爭)이릉지전은 삼국시대 "3대전투"중 마지막 전투이다. 는 이릉지전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했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관우의 피살로 인하여, 제갈량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분개하여 70만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육손에게 화소연영(火燒連營)당하며 전군이 몰살당한다. 육손은 오군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제갈량의 팔진도에 격퇴당하고, 촉군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연의에서는 이릉지전을 아주 재미있게 묘사했다. 그 변화무쌍하고 곡절이 많은 스토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역사상 진실한 이릉지전은 도대체 어떠했을까?이릉지전의 원인연의에서는 유비가 온 나라의 힘을 모아서 동오를 공격한 원인에 대하여 동오가 관우를 죽였기 때문에 유비는 의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2024. 7. 26. 이전 1 ··· 6 7 8 9 10 11 12 ··· 22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