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오(東吳) 역사상 3차례의 탁고(托孤): 1차례 성공, 2차례 실패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223년, 유비(劉備)는 백제성(白帝城)에서 탁고(托孤)한다. 같은 해,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 두 탁고대신은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즉위시킨다. 나중에 이엄은 제갈량과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파면당한다. 다만, 촉한은 제갈량의 통치하에 국력을 회복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조위에 적지 않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벡제성탁고는 비교적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동오의 역사에서도 3차례의 탁고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성공했지만, 두번은 실패하고 만다. 1. 손책탁고(孫策托孤) 건안5년 사월 사일(200년 5월 5일), 손책(孫策)은 단도산(丹徒山)에서 사냥하다가 허공(許貢) 문객의 암살을 당한다. 손책은 상세가 엄중했고,..
2022. 11. 17.
"정무기황(丁戊奇荒)": 양무파(洋務派)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다.
글: 자귤(紫橘) 청나라말기 열강이 침입하면서, 중국내부에서도 자강을 도모하는 양무운동이 일어난다. 1870년대 섬서, 산서, 산동, 하남, 직예등 지역에 큰 가뭄이 발생하여, 양무운동이 전기의 백화제방(百花齊放)이 후기의 만마제암(萬馬齊暗)으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된다. 조정내부의 진재파(賑災派, 재난구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파)는 양무파(洋務派, 서양을 본받아 산업을 건설해야 한다는 일파)의 경비에 눈독을 들이게 되고, 양무운동은 천재지변의 압력하에 자금상 곤란이 발생하게 되어 양무운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정무기황을 전환점으로 하여, 양무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결국 갑오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귀결된다. 1. 1870년대전기: 이홍장(李鴻章)의 양무운동이 흥성했다. 양무운동은 제2차아..
2022.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