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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홍기거(紅旗渠, 홍치취)"의 진상은...?

by 중은우시 2022. 10. 31.

글: 주효휘(周曉輝)

연안에서 모택동을 참배한 후, 시진핑은 신임 정치국상위를 이끌고 다시 허난(河南), 안양(安陽) 린저우시(林州市, 옛 이름은 林縣)로 가서 또 다른 "홍색교육기지" 홍기거기념관(紅旗渠記念館)을 참관했다. 홍기거라는 이름에 대하여, 많은 중국인들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각종 '정신'을 창조하는데 뛰어나 정신병자라는 조롱을 받고 있는 중공은 일찌감치 1971년 <홍기거>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어 소위 '홍기거정신'을 대거 선전했다. 작년 중국당국이 내놓은 100부짜리 다큐멘터리 <백련성강(百煉成鋼): 중국공산당의 100년> 제36부에서도 역시 중공의 거짓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중국당국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홍기거는 1960년대, 현지인민들이 천수답의 열악한 생존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중공당국의 지지하에 태행산(太行山)의 산허리에 '인장입림(引漳入林, 장하의 물을 임현으로 끌어오다)'의 수리공정을 건설한다. 10년의 시간을 들여, 1,250개의 산을 평탄화하고, 264개의 절벽을 잘라서 211개의 터널을 뚫어 152개의 수로다리를 건설한 후, 총길이 1,500킬로미터에 달하는 홍기거를 마침내 완공했다. 이 '인공물길'인 홍기거는 임현의 60여만명, 54만무와 40만마리의 가축의 용수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생명거(生命渠)' '행복거(幸福渠)'라고 부른다고 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홍기거의 건설규모나 투입한 인력을 보면 확실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하다. AP통신은 이렇게 평론한 바 있다: "홍기거의 인공건설은 모택동의 의지가 홍색중국에서 나타난 전형적인 사례이고,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택동의 의지'라는 것이다. '인민의 의지'가 아니라.

 

2016년 대륙매체는 이런 글을 실은 바 있다. 모택동의 전 비서 이예(李銳)의 홍기거에 대한 견해이다. 글에 따르면, 이예는 <삼협공정을 논한다>라는 책에서 홍기거를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홍기거는 통일된 계획이 없이 맹목적으로 건설했다." "임현홍기거와 다른 인수(引水)공정은 상하류의 전체 강의 수량균형을 고려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홍기거는 "인유다대담(人有多大膽), 지유다대산(地有多大産)"시대의 정치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은 효용은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홍기거가 완공된 20년후, 공정은 파괴되고, 극히 심각한 노화현상이 나타난다. 한편으로, 주변의 다른 물부족지역에서 속속 이를 모방해서 인공물길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장하(漳河) 상류의 산서(山西)는 하류의 임현보다 지리적 위치가 훨씬 우월하므로, 한꺼번에 100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하류로 흘러가는 물이 점점 줄어든다. 임현에는 다시 심각한 물부족현상이 나타났다. 1990년에서 1992년 사이에, 장하 상하류의 백성들은 수차례 집단패싸움이 벌어지고, 그 영향은 극히 나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홍기거를 부수고, 파괴하여 반양촌(盤陽村)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나중에 홍기거는 비록 수리하고 보수했지만, 홍기거의 단수위기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고, 물이 끊어진 가장 긴 기간은 70일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으로, 공사 자체가 부실공사였다. 2008년, 현지에서 홍기거를 보수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기술적으로 건설당시보다 훨씬 앞선 오늘날임에도 품질은 전혀 보장되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배수, 준설, 조탁, 벽과 바닥청도등을 진행하는 것이었는데, 수급업체는 그 어느 하나도 해내지 못한다. 구거 바닥의 오수를 모래, 시멘트와 섞어서 콘크리트로 만들었고, 결국 나중에 홍기거가 무너지고 누수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홍기거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는 끌어올 물이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만일 현재 끌어올 물이 없다면, 그걸 만들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속에 숨은 의미는 홍기거는 쓸모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홍기거의 단명은 중공당국이 건설한 여러 수리공정의 축소판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2011년 대륙매체가 보도한 바 있다. 현재 홍기거는 물사용료가 주요수입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홍색관광수입이 연평균 1,200만위안이고, 물사용료는 가장 많은 해에도 300만위안을 넘지 않는다.

 

확실히 중국당국의 세뇌교육만 없다면, 홍기거의 수입은 일락천장할 것이다. 이러한 단명공정에 대하여 시진핑은 참관후에 이렇게 지시한다: "홍기거는 임현의 사람들이 운명을 인정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감히 전천투지(戰天鬪地)하는 영웅적인 기개를 기록했다." "홍기거정신으로 인민 특히 많은 청소년들을 교육하여, 사회주의는 분투하고, 해내고, 목숨으로 얻어낸 것이며, 과거에도 그러했고, 신시대에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연안에서 모택동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암시하며 여러가지 불길한 징조를 보였던 시진핑은 "감히 전천투지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모택동이야말로 바로 "여천투(與天鬪), 여지투(與地鬪)"하는 즐거움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홍양하고자 하는 홍기거정신의 실체인 홍기거는 일찌감치 폐기되었다. 이것은 그 정신에서 별로 배울게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시진핑은 일의고행(一意孤行)하며, 계속하여 홍양하고 있다. 다시 한번 그의 결말이 홍기거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예시하는 것일까? 실로 불길한 징조이다.

 

그외에 시진핑은 홍기거정신으로 백성 특히 청소년을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서 드러나는 냉막함은 사람을 전율케 만든다. 시진핑은 정말 모르고 있단 말인가. 이 거대한 공정의 배후에 얼마나 많은 임현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숨어 있는지?

 

이전에 중국의 공식자료를 보면, 홍기거를 건설하는데 참여한 사람은 10여만명이고, 직접사망한 사람이 60여명이며, 부상을 입은 사람이 300여명이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에서도 중국당국은 모두 81명의 간부와 민공이 사망했고,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60세이고, 가장 어린 사람은 17세였다고 밝혔다.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하여는 중국당국이 감히 공개하지 못할 것이다.

 

진실된 상황은 이러하다. 당시 임현의 현위서기를 맡았고, 나중에 안양지위부서기로 승진한 양귀(楊貴)는 진도를 내기 위하여, 백성들을 남녀노소불문하고 소말처럼 일하도록 강요했다. 그리하여 사상자가 아주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을 모욕하는 장면들도 나타났다.

 

현위의 지시에 따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린 처녀이건 젊은 부인이건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일률적으로 상하의를 모두 벗어야 한다. 오직 짧은 하의 하나만 입을 수 있다. 만일 여자들 중에서 벗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간부가 한마디하면 몇몇 청년이 달려들어 바닥에 눞이고  강제로 옷을 다 벗겨버린다. 그후에 광주리를 이고 둘맹이를 나른다. 많은 여자들은 이런 굴욕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설사 한겨울이라고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얼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신체가 허약하고, 노동효율이 높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았다. 무릎꿇고 있거나, 서 있거나, 굶거나. 굶기는 것은 자신에게 배정된 양식조차 먹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 무릎꿇고 있어야 했다. 많은 민공들이 저혈당, 심신쇠약과 여러 영양부족으로 죽거나 동사하거나 열사병으로 죽었다. 

 

1976년, 모택동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현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집회를 조직하여 소리친다: "파시스트 독부민적(獨夫民賊) 양귀(楊鬼, 楊貴를 가리킴)를 타도하자. 피빚은 피로 갚아라. 양귀를 천도만과(千刀萬剐)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달래라."

 

만일 시진핑이 홍기거정신을 홍양한다면 그것은 계속 백성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에 뭐 배울 가치가 있겠는가? 그저 중국당국이 백성들을 계속 세뇌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고의이든 아니면 자신도 속았을지 모르는 시진핑은 원래 홍기거와 함께 죽었어야할 홍기거정신을 다시 홍양하고 있다. 그러면서 모택동의 길을 가겠다고 암시한다. 이는 역사의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심히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