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회역사(情懷歷史)
223년, 유비(劉備)는 백제성(白帝城)에서 탁고(托孤)한다. 같은 해,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諸葛亮)과 이엄(李嚴) 두 탁고대신은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즉위시킨다. 나중에 이엄은 제갈량과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파면당한다. 다만, 촉한은 제갈량의 통치하에 국력을 회복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조위에 적지 않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벡제성탁고는 비교적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동오의 역사에서도 3차례의 탁고가 있었다. 그러나 한번은 성공했지만, 두번은 실패하고 만다.
1. 손책탁고(孫策托孤)
건안5년 사월 사일(200년 5월 5일), 손책(孫策)은 단도산(丹徒山)에서 사냥하다가 허공(許貢) 문객의 암살을 당한다. 손책은 상세가 엄중했고, 스스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장소(張昭)등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다시 손권(孫權)을 불러 인수(印綬)를 그에게 넘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강동의 병사들과 무리를 이끌고 양진의 사이을 오가면서 천하를 횡행하고 쟁패하는데는 네가 나보다 못하다; 그러나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골라, 그들에게 각자에게 맡는 임무를 맡겨 강동을 지키는데는 내가 너보다 못하다." 그리고 밤이 되어 손책이 사망한다. 나이 26살이었다.
손책의 안배에 따라, 장소와 주유(周瑜)는 함께 탁고대신이 되어 손권을 보좌하여 즉위시킨다. 이 두 대신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젊은 손권이 손조롭게 강동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아니라, 동오의 강역도 확장했다. 229년, 손권은 무창(武昌)에서 황제로 등극하여 정식으로 조비(曹丕), 유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2. 손권탁고(孫權托孤)
신봉원년(252년) 정월, 손권은 다시 손화(孫和)를 남양왕으로 봉하고, 그의 자식인 손분(孫奮), 손휴(孫休)를 제왕(齊王), 낭야왕(琅邪王)에 봉한다. 이월,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신봉으로 고친다. 그의 병이 위중해지자 제갈각(諸葛恪)과 중서령 손홍(孫弘), 태상(太常) 등윤(滕胤), 장군 여거(呂據), 시중 손준(孫峻)으로 하여금 손량(孫亮)을 보좌하여 즉위하도록 부탁한다.
같은 해 사월, 손권이 내전에서 사망한다. 향년 71세이고, 재위23년이다. 시호는 대황제이고, 묘호는 태조이다. 칠월, 장릉(蔣陵)에 안장한다. 손권은 태자 손량에게 5명의 탁고대신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이들 다섯 탁고대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서로 싸우게 된다.
손권이 죽은 후, 손홍은 원래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손권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속이고, 조서를 고쳐 제갈각을 제거하려하나, 손준에게 들켜 실패한다. 나중에 제갈각은 손홍에게 정무를 논의하자고 부른 후, 그를 죽여버린다. 253년, 손준은 황제 손량과 연합하여 다시 제갈각을 제거한다.
256년에 이르러, 등윤과 여거 두 탁고대신도 손준에게 제거된다. 손준은 권력을 장악한 후, 종친을 대거 죽인다. 폐태자 손화, 손권의 딸 손노육(孫魯育), 선태자(宣太子) 손등(孫登)의 아들 손영(孫英)이 차례로 피살당한다. 태평원년(256년), 손준은 위나라를 정벌하는 도중에 병으로 사망하니 당시 나이 38살이었다. 그는 후사를 당제(堂弟) 손침(孫綝)에게 맡긴다. 손침은 손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그는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였을 뿐아니라, 황제 손량까지 폐위시킨다. 그리하여 손권이 고심하여 안배한 탁고는 철저하게 실패로 끝난다.
3. 손휴탁고(孫休托孤)
태평3년(258년), 손침이 쿠데타를 일으켜, 손량을 몰아내어 회계왕(會稽王)으로 끌어내리고, 손휴(孫休)를 모셔와 황제에 앉힌다. 손휴는 세번 사양한 후에야 즉위한다. 연호는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손휴가 등극한 후, 손침은 승상(丞相)이 된다. 손휴는 장포(張布), 정봉(丁奉)과 모의하여 손침을 제거한다.
영안7년(264년), 손휴의 병이 위중해진다. 그는 조서를 내려 승상 복양흥(濮陽興)을 입궁하게 한다. 그리고 태자 손출(孫出)로 하여금 복양흥을 맞이하게 한다. 손휴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복양흥의 팔을 꽉 붙잡고, 태자를 가리키며, 그와 장포에게 탁고한다. 즉, 손휴는 복양흥과 장포 두 사람을 탁고대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영안7년 칠월 이십오일(264년 9월 3일), 손휴가 사망하니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손휴가 사망한 후, 태자는 아직 10살정도였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은 좀더 나이많은 황제를 옹립하자고 요구한다. 그리하여 복양흥과 장포는 손휴의 뜻을 어기고, 그의 질손(侄孫)인 손호(孫皓)를 황제로 옹립한다. 나중에 두 사람은 손호에게 구실이 잡혀 처형당한다. 손휴의 황후와 태자도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하여 동오에서 있었던 제3차탁고도 큰 실패로 끝난다. 더욱 관건적인 것은 복양흥과 장포가 옹립한 손호는 더더욱 잔혹하기 그지없는 황제였던 것이다. 손호가 재위하는 동안 동오는 쇠락의 길을 걸었고, 결국 280년 서진에 멸망당한다. 이는 삼국시대가 철저히 종식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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