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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의 멸망은 얼마나 참혹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22. 12. 26.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중국고대에 가장 명성이 높은 왕조는 당나라일 것이다. 대당의 태평성세때 팔방에서 조공을 바쳐 동방의 주인 내지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로서 존경을 받았다.

 

당나라의 황제는 아주 개명하여, 천하의 현사들을 불러모았다. 출신이나 국적을 가리지 않았고, 재능만 있다면 모두 대당을 위해 공헌하도록 남겨서 일하고 생활하게 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대당이 번영했을 때의 모습이다. 그러나 대당이 멸망하는 참상에 대하여는 별다른 인상이 없다. 실제 당나라의 최후는 참열(慘烈)이라고 형용해도 지나치지 않다.

 

907년, 당나라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다.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 양왕(梁王) 주온(朱溫)이 권력을 찬탈하면서, 이씨의 당왕조정권은 붕괴하게 된다. 두 명의 당나라황제가 피살당하고, 30명의 관료는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시신이 황하에 버려진다. 나머지 종실 구성원들도 속속 살해되었다. 세계에 이름을 떨쳤던 당왕조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주온이라는 자가 어떻게 이렇게 큰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당에 충성하는 그렇게 많은 장수와 대신들이 그 한명을 당해내지 못했단 말인가?

 

기실 그렇지 않다. 왕조교체는 자주 있는 일이다. 하나의 왕조가 멸망에 이르는 것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

 

천리지제훼어의혈(千里之堤毁於蟻穴). 천리 제방도 개미구멍 하나로 무너진다. 당나라가 여러 해동안 많은 사회적 모순을 축적하지 않았더라면, 주온의 세력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조정의 대군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함께 무엇이 당나라의 멸망을 불러왔고, 당나라가 멸망할 때 어떤 놀라운 일들이 발생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수(隋)나라 말기, 수양제의 친척인 이연(李淵)은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건립했으며, 강역을 확장하여 사상유례없이 광활했다.

 

서로는 아랄해(咸海)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이칼호에 이르고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지금의 베트남에 이른다. 전체 판도면적은 1,237만평방킬로미터로 동방의 패주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당나라의 면적이 이렇게 커지면서, 많은 소수민족의 서식지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황제는 한나라의 기미제도(羇縻制度)를 받아들여 관리를 진행하면서 번진(藩鎭)을 건립하고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여 관리했다.

 

일부 호인(胡人)은 진심으로 당나라이 신복(臣服)하면서 대당천자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며, 당나라를 위하여 전쟁에 참여하거나 다른 행정관리권을 행사했다. 

 

당현종시기에 재상 이임보(李林甫)는 호인 대장을 기용하기를 좋아하여, 안록산(安祿山)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어, 당나라를 위협하는 시한폭탄이 되었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당나라는 이때부터 유성급쇠(由盛及衰)하게 된다. 안사의 난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당나라에서 드러난 각종 문제는 이미 바로잡기 어려웠고,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당나라말기,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반란군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황소(黃巢)이다. 그는 875년 왕선지(王仙芝)의 난에 호응하여 참가했고 나중에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웠다.

 

878년, 왕선지가 죽은 후, 황소는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는 계속하여 성을 점령했고, 880년에는 낙양(洛陽)까지 쳐들어가고, 당나라의 가장 중요한 관문인 동관(潼關)까지 돌파당한다. 다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장안(長安)까지 무너질 터였다.

 

당나라를 무너뜨린 주온은 바로 왕선지와 황소의 반란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882년, 군벌 이극용(李克用)이 두 차례에 걸쳐 근왕(勤王)하면서, 황소를 격패시킨다. 황소는 어쩔 수 없이 퇴각했고, 주온은 당나라에 귀순하여 방향을 바꿔 이극용과 손을 잡고 황소의 반란군을 진압한다.

 

전공을 표창하기 위하여, 당희종(唐僖宗)은 주온에게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니 바로 주전충(朱全忠)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이름의 주인공인 그는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당나라를 무너뜨리게 된다.

 

주온은 당희종에 의하여 변주자사(汴州刺史),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로 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양왕(梁王)으로 올려준다. 권력이 생기자, 주온은 급속히 자신의 군대를 확충하여 당시 최대의 할거세력이 되어, 당나라조정이 제거하고자 하는 눈엣가시가 되어 버린다.

 

901년, 주온은 병력을 이끌고 관중으로 쳐들어가 조정의 정권을 장악한다. 당나라황제는 허수아비가 된다. 904년, 주온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황제에 오르고 싶었다. 그리하여 당소종(唐昭宗)을 낙양으로 쫓아버리고, 그후 그를 죽여버린다. 또한 당소종의 아들 이축(李柷)을 황위에 올려 쉽게 통제하고자 한다.

 

이어서 주온은 이축의 다른 형제들을 죽인다. 이축보다 지위가 높은 황자들의 존재는 그에게 불리하였으므로 반드시 참초제근(斬草除根)해야 했다.

 

이축이 등극한 후, 당왕조는 완전히 명존실망(名存實亡, 이름만 남고 실질은 없어짐)하게 된다. 그러나 주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905년, 그는 각종 핑계를 대어, 여전히 당나라황제에 충성하던 대신들을 죽여버린다.

 

당나라의 대신중에는 많은 권세를 가진 문벌사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원래 주온을 눈에 거슬러했기 때문에, 그들이 만일 거병했더라면 주온을 이기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주온이 한동안 고생하도록 할 수는 있었다.

 

경조윤(京兆尹) 배추(裴樞)는 당나라말기의 삼보(三輔)관리중 하나로 지위도 높고 권력도 컸다. 주온은 먼저 그에게 손을 쓴다. 그를 위시한 30여명의 대신을 붙잡는다. 정해군절도사(定海軍節度使), 우복야(右僕射), 이부상서(吏部尙書) 및 공부상서(工部尙書)등 중요한 대신들이 포함해서, 모조리 백마역(白馬驛)으로 끌고가서 한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후에 시신을 모조리 황하에 던져버린다. 이 피비린내나는 참상은 나중에 "백마역지화(白馬驛之禍)"라고 부른다.

 

시기가 성숙되자, 주온은 907년, 당애제(唐哀帝) 이축을 핍박하여 황위를 선양받는다. 그렇게 합법적인 형식을 빌어 이당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고 국호를 양(梁)으로 고치고, 연호를 개평(開平)이라 하며, 황제에 오른다.

 

주온이 등극한 후, 나이 겨우 16살된 이축은 폐위되어 여음왕(汝陰王)에 봉해져 조주(曹州)로 쫓겨난다. 다음해에는 이축을 죽여버린다. 이제 주온은 더 이상 위협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황위를 찬탈하였지만, 삼국시기에 한나라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조가(曹家)와 위나라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사마가(司馬家)는 모두 주온만큼 잔혹하지 않았다.

 

황제, 황자, 대신을 죽이고, 주온은 가장 악독한 짓이라는 짓은 다했다. 그리하여, 그도 마찬가지로 참혹한 최후를 피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친아들에게 시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