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청나라말기 열강이 침입하면서, 중국내부에서도 자강을 도모하는 양무운동이 일어난다. 1870년대 섬서, 산서, 산동, 하남, 직예등 지역에 큰 가뭄이 발생하여, 양무운동이 전기의 백화제방(百花齊放)이 후기의 만마제암(萬馬齊暗)으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된다. 조정내부의 진재파(賑災派, 재난구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파)는 양무파(洋務派, 서양을 본받아 산업을 건설해야 한다는 일파)의 경비에 눈독을 들이게 되고, 양무운동은 천재지변의 압력하에 자금상 곤란이 발생하게 되어 양무운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정무기황을 전환점으로 하여, 양무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결국 갑오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귀결된다.
1. 1870년대전기: 이홍장(李鴻章)의 양무운동이 흥성했다.
양무운동은 제2차아편전쟁이후에 나타나고, 이홍장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일찌기 1862년, 1863년 이홍장은 상해양포국(上海洋炮局), 소주양포국(蘇州洋炮局)을 만든다. 이것은 그가 양무운동에 투신하는 시작이었다. 1865년, 양국은 각각 상해제조국(上海製造局), 금릉제조국(金陵製造局)으로 확대된다. 1870년에 이르러, 이홍장은 직예총독으로 승진하고, 더욱 양무사업을 크게 벌이게 된다.
정무기황이 발생하기 이전을 보면, 이홍장은 양무운동에 아주 열심이었다. 그는 군사, 민생, 해군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한다.
군사공업분야에서, 이홍장은 군사공장을 새로 건설하거나 확장했다. 상해제조국, 금릉제조국등 이홍장이 직접 설립한 공장은 말할 것도 없고, 숭후(崇厚)의 천진제조국(天津製造局)에도 이홍장은 13만냥백은을 제공하여, 3개의 화약공장과 각종 신식설비를 확충하게 했다.
민생분야에서, 주로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이 있고, 나중에는 초상국이 미국기창윤선공사(美國旗昌輪船公司)를 합병한다; 1874년, 이홍장은 자주매광(磁州煤鑛, 석탄광산)을 건립하여 자본금 20만냥백은을 투입하고, 근대화설비로 석탄을 채굴한다; 1876년, 성선회(盛宣懷)에게 명하여 호북에서 철광을 채굴하게 한다. 경비는 직예의 군용비용에서 20만냥을 빌려주어 해결한다; 같은 해 구월, 다시 당정추(唐廷樞)에게 명하여 개평(開平)의 석탄자원을 조사하게 한다.
해군건설분야에서, 이홍장이 극력 주장하여, 조정은 1875년부터 북양, 남양에 합계 200만냥을 제공한다. 이홍장, 심보정(沈葆楨)은 각각 북양, 남양의 국방사업을 담당한다. 게다가 심보정은 둘 중 하나가 먼저 강해져야한다고 판단하여 남양의 경비를 모두 이홍장의 북양에 넘겨주어 북양을 먼저 발전시키게 한다. 북양이 강대해진 후에 다시 경비를 나누어 남양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결국 200만냥의 해군경비는 이홍장이 모두 차지한다.
2. 정무기황과 국가재정
그런데, 아무도 생각지 못했더 일이 벌어진다. 바로 다음해인 광서2년(1876년) 섬서, 산서, 산동, 하남, 직예의 5개성에 돌연 백년만의 큰가뭄이 발생한다. 나아가 그 영향은 강소, 안휘, 감숙동부, 사천북부등 인근지역까지 미친다. 이번 가뭄은 광서5년(1879년)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1877년, 1878년에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하여 역사에서는 "정무기황"이라고 부른다.
<중국근대10대재황>이라는 책에서 추정한 바에 따르면, 이번 대가뭄으로 사망한 인구는 900만 내지 2000만이다. 백년만의 대가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재난으로 지방관청은 재난구호자금이 부족했고, 결국 중앙정부가 통일적으로 마련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때 청나라조정의 국고에 충분한 재력이 있었을까?
<청재정고거(淸財政考據)>라는 책에 따르면, 동치13년(1874년), 국고수입은 6,080만냥이고, 국고지출은 7000만냥이다. 이 7000만냥의 지출은 조정의 일상지출, 대외배상금, 태평천국전투지역의 사후처리비용만 포함된다. 1875년, 청나라정부는 그래고 200만냥을 내놓아 이홍장에게 해군을 건설하게 했고, 동시에 좌종당(左宗棠)으로 하여금 신강을 수복하게 하였다. 이때만 해도 재정부족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같다. 다만 확실히 지출이 수입보다 많았다.
다시 양무파가 진행하는 양무사업을 보자. 여러가지 이유로 이익을 내지 못하면서, 국가의 보조금만 계속 투입하고 있었다. 양무기업은 국가에서 보조금만 받아가고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하는 '계륵'이 되어 있었다.
이런 자금부족, 지출초과의 재정상황하에서, 청나라정부가 재난구호에 얼마나 많은 돈을 낼 수 있었을까?
1876-1878년, 가뭄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정은 지방의 세금을 면제한다. 면제한 세금은 1800만냥을 넘었다. 이는 국고수입의 1/5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난구조에서 1876-1879년에 총재난구호자금이 아니라, 조정이 긴급구호한 자금만 250만냥백은과 100여만섬의 식량이 있다. 다만 이들 돈과 식량은 전체 성중에서 가뭄이 닥친 중원5성만 포함한 것이고, 부분적인 가뭄에 처한 인근의 몇개 성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이재민들을 제대로 구호하려면 훨씬 더 많은 돈과 양식이 필요하다.
확실히, 정무기황기간동안, 조정은 재정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3. 진재파의 양무파에 대한 압박
청류파(淸流派)는 동치,광서떄 굴기했고, 직언으로 간언하고, 관료사회을 쇄신하는 임무를 자처했다. 재해가 발생하자, 청류파는 바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진재파로 변신한다. 그러나 백성을 구휼하는 돈은 어디에서 조달할 것인가? 중앙재정은 원래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이제 천재지변까지 닥치니 어떻게 안그래도 부족한 돈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어쨌든 좌종당이 신강을 수복하기 위한 군사경비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양무파를 겨냥하게 된다.
광서3년(1877년), 진재파와 양무파간에 제1차격돌이 벌어진다. 태자세마(太子洗馬)는 칠월에 상소를 올려, "해군건설은 장기적인 일이지만,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눈앞의 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20만냥의 해군건설비용을 재난구호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의견을 조정이 받아들였고, 조정은 해군건설비용중 10만냥을 전용한다. 그후 진재파는 이홍장의 군사훈련비용도 시급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천진의 해군건설비용 20만냥을 가져간다. 이렇게 하여, 이홍장의 양무사업자금은 30만냥을 잃게 된다.
광서4년(1878년) 이월, 진재파는 다시 제2차공격을 벌인다. 장애령(張愛玲)의 조부이자 한림원 시강인 장패륜(張佩綸)은 청성조 강희제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재민을 구휼하는 것은 오랑캐를 토벌하는 것보다 더욱 긴요하다고 말한다. 이번 공격으로 조정은 양무파를 계속 압박하여 다시 이홍장으로 하여금 40만냥의 경비를 재난구호에 내놓게 한다.
이렇게 하여 정무기황으로 이홍장은 70만냥백은의 손실을 입는다.
4. 정무기황의 양무파에 대한 타격
정무기황의 재난구호를 거치면서, 양무사업경비는 심각하게 쪼들리게 된다. 이홍장의 해군건설사업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는다. 정무기황에 투입된 70만냥의 경비는 모두 북양의 해군경비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양경비는 실제로 남양과 북양 두 곳의 경비를 합친 것이다. 그래서 북양은 경비가 충분했었다. 그래서, 언관들은 이 돈을 노린 것이다.
두번의 결전에서 이홍장은 모두 패퇴한다. 그가 반격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광서4년(1878년) 삼월, 그는 조정에 상소를 올린다. 해군건설의 중요성과 경비의 부족을 얘기한다. 그러나 조정은 그래도 그 돈을 가져가려 했고, 이홍장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조정에 이런 돈은 건드려서는 안된다. 만일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때 후회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결국 갑오년 청일전쟁은 이홍장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해군경비는 원래 전용경비이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관련되는 돈이다. 함부로 전용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먼저 재난구호자금으로 전용되고, 다시 서태후에 의해 전용된다. 결국 이홍장은 필요한 돈이 부족하게 되어, 북양함대는 낙후되게 되고, 결국 북양함대가 전멸하는 원인이 된다.
정무기황의 타격은 전면적이었다. 군사적으로 경비가 감축되고, 자금이 전용되었다. 원래 선진적인 군함을 사들여야할 비용이 1881년까지 미루어진다. 양무민영기업의 경비도 압박을 받는다. 장기적인 양무사업에 돈을 쓸 것인가 아니면 눈앞의 재난구호에 돈을 쓸 것인가는 어려운 선택이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조정이 진재파를 지지하며 양무파를 압박한 원인이 바로 이홍장등이 양무사업으로 힘을 키워 애신각라의 통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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