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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요(宋遼)백년평화시기: 300여차례의 외교활동과 민족의식의 맹아

by 중은우시 2022. 12. 27.

글: 추산산인(秋山散人)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논쟁이 많은 왕조이다. 어떤 학자들은 송나라를 "적빈적약(積貧積弱)"으로 평가하고, 어떤 학자는 상품경제가 발달했다고 찬양한다. 진인각(陳寅恪) 선생은 더더욱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중국문화의 수천년에 걸친 발전은 조송(趙宋)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런 서로 다른 평가는 송나라사회의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특징을 보여준다. 그중 송나라와 요나라간의 외교활동이 특히 눈길을 끈다. 송요간에 어떻게 하여 1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송나라는 "사대부와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與士大夫共治天下)"의 정치원칙을 가지고있었는데, 요나라와의 교류과정에서, 이들 사대부들은 어떤 심리를 지녔고, 구체적인 정책에는 또한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1. 북송의 북방변방형세

 

북송왕조는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난세끝에 세워진다. 조광윤(趙匡胤)이 진교병변(陳橋兵變)을 일으켜, 황포가신(黃袍加身)하여 황위를 성공적으로 탈취하였다. 그후 남전북정하면서, 기본적으로 옛 화하강역을 판도에 넣는다. 그러나,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는 송나라 군신의 마음 속에 "역사가 남겨놓은 문제"가 되었다. 

 

중원이 전란에 빠지고, 내부분쟁이 심각할 때, 북방유목정권의 지지를 획득하거나 혹은 직접 그 역량을 빌리는 것이 통상적인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이 전통은 최소한 주(周)왕조때부터 선례가 있었다. 오대십국시기,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석경당(石敬瑭)은 이런 전략을 따라했다. 후당(後唐)에 대항하기 위하여, 석경당은 요나라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그는 스스로를 "아황제(兒皇帝)"로 칭하며, 요나라에 세공(歲貢)을 바쳤을 뿐아니라, 더더욱 연운십육주를 요나라에 할양한다. 송나라가 건립되었을 때, 연운의 땅이 요나라에 넘어간지 이미 20여년이 지났었다.

 

연운의 땅은 자고이래로 한족과 이족을 나누는 천험(天險)이었다. 만일 연운을 장악하지 못하면, 화북대평원은 완전히 유목민족의 철기아래 노출되어버린다. 막 나라를 세운 북송은 자연히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연운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은 화하의 고유영토를 수복하는 것일 뿐아니라, 신왕조의 통치안전을 위하여도 필요했다. 그래서, 옹희(雍熙) 삼년, 송태종은 병력을 3로로 나누어, 요나라에 대한 북벌을 진행한다. 다만 이번 북벌은 실패로 끝난다. 고량하(高梁河)전투에서 송태종 본인은 황급히 도망쳐야 했었다. 이때부터 송나라와 요나라의 공수는 바뀌고, 송나라는 더 이상 연운의 실지를 회복할 마음을 먹지 못하게 된다.

연산산맥

송진종(宋眞宗)때, 요나라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밀고 내려온다. 이번에 요나라군대는 계속 남하하여 한때 황하(黃河)를 건너, 북송의 도성인 동경(東京)이 위기일발에 빠진다. 조정이 격렬한 논쟁을 거치면서 송진종의 심사숙고하에 송진종은 직접 전주(澶州)로 나가 직접 전투를 지휘한다. 황제가 직접 나서자, 송나라군대는 사기가 충천한다. 첫전투에서 요나라의 총사령관 소달늠(蕭撻凛)을 사살한다.

 

송나라국경을 넘어 깊이 들어온 요나라군대는 양초(糧草) 운송이 순조롭지 못해 지구전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송나라도 계속 요나라군대를 추격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양국간에는 화의(和議)를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사신으로 간 조이용(曹利用)은 사명을 욕되지 않게 하면서 쌍방간에 전연지맹(澶淵之盟)을 맺게 된다. 합의내용은 이러하다: 송나라와 요나라는 형제지국으로 한다. 백구하(白溝河)를 경계로 한다. 송나라는 매년 요나라에 세폐(歲弊)를 제공한다. 변경을 개방하여 호시무역(互市貿易)을 진행한다.

 

아마도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합의로 인하여 송요간에 백년간의 평화를 가져오게 될 줄은. 이런 국면은 이전의 왕조와는 크게 다르다.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이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은 생활상태가 다르다. 그리하여 고대중국의 중앙왕조와 유목민족간에는 경계선이 존재했다. 쌍방은 국력의 변화에 따라, 계속하여 공수의 입장이 바뀌어왔다. 예를 들어, 한나라초기에는 화친정책을 취하면서 인내하다가, 한무제시기에는 흉노를 쳐서 막남무왕정(漠南無王庭)으로 만들었다. 당나라때도 마찬가지였다. 성당때, 유목지대에 도호부, 기미주를 설치한다. 다만 당나라 중후기에 이르러 번진이 할거하게 되면서, 당왕조의 역량은 더 이상 유목정권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송나라는 마치 하나의 선례를 만들어낸 것같다. 연운십육주의 보호가 없는 상황하에서, 북방의 요나라에 제압당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요나라와 평화를 100여년간 지속시키면서 쌍방은 우호적으로 교류하여 정말 형제지국같았다. 송요간에는 마치 서로 상대방을 제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런 상태가 농경과 유목이라는 두 인류의 생존형태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하에서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사대부는 양국외교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송나라때의 사대부의 역사세계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2. 외교활동: 사대부의 요나라에 대한 인상

 

전연지맹을 체결한 후, 송요간에는 백여년간 300여차례의 외교활동이 이어진다. 쌍방은 황제, 황후가 사망하거나 신황제가 등극하는 중대한 행사가 있으면 서로 사절을 파견했다. 송나라의 사대부가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구체적인 활동에서 우리는 더욱 풍부한 역사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거란인 벽화

백구(白溝)에서 출발하여, 요나라의 중경(中京)에 도착하기까지 길은 멀다. 왕복에 2달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기간동안 송나라의 사대부는 요나라의 풍속을 관찰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요나라의 관리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비록 송나라사대부가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정치적 임무를 지닌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은 요나라의 땅으로 여행하는 것이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에 더욱 가까웠다. 송인종시기에, 진양(陳襄)이 요나라로 사신으로 갈 때, 60여일동안 줄곧 즐겁게 먹고 마셨다. 매번 역참을 지날 때마다, 모두 요나라측의 사절이 접대했고, 연회를 베풀었다. 북방유목민족은 성격이 호탕하여, 연회에서 그다지 격식을 따지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먹고 마시는 송나라관리들에게 호감을 나타냈다. 송나라사신 왕공진(王拱辰)은 요나라측이 마련한 연회에 참가해서, 격식을 따지지 않고, 거란인들과 같이 앉아서 시원시원하게 마셨고, 심지어 "깊은 밤에 미친 듯이 취하여, 술주정을 부렸다. 오랑캐의 손을 잡거나, 오랑캐의 어깨를 치거나, 혹은 서로 놀리는 시를 짓거나 혹은 시정잡배들의 말을 했다." 외교예절에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나라측은 아주 기뻐했고, 직적 그를 "왕견희(王見喜)"라고 불렀다. 이런 인물은 분명 소수였을 것이다. 다수의 송나라사신은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예의범절을 아주 중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라측이 열렬하게 술을 권하고, 연회에서 즐겁게 먹다보면 알콜의 작용으로, 송나라사신들도 호기있는 거동을 나타내곤 했었다. 상대적으로 냉정했던 진양도 술자리후에는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탄식했을 정도이다.

 

술자리에서 서로 격의없는 교류를 하는 외에 송나라와 요나라 관리들은 다른 방면에서의 교류도 아주 밀접했다. 도중에 송나라 요나라 쌍방의 사신은 여러가지 문제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 경사자집(經史子集)에서 천문지리에 이르기까지, 시사가부(詩詞歌賦)부터 이물술수(異物術數)까지 학술문제이건 일상적인 잡다한 일이건 모두 논의주제가 되었다. 이런 교류과정에서 송나라 사대부들은 점점 요나라의 풍속을 이해하게 된다. 요나라관리들은 중원의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창(劉敞)이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요나라측 관리는 연산(燕山)에 "기이한 짐승이 있는데 말같이 생겼는데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먹는다"고 말한다. 유창은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산해경>, <관자>등의 책을 이용하여 그 기이한 짐승의 이름이 "박(駁)"이라고 알려준다. 이런 자잘한 대화도 적지 않았다. 진양이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요나라의 관리들과 고향의 풍속, 부친은 어떤 관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남방의 리치(茘枝)의 생장등 문제도 얘기한다.

 

송나라사신은 매번 사신으로 갈 때 중원의 전적(典籍)을 선물로 요나라측에 주었다.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아, 요나라의 관리도 상당이 높은 문화수준을 지녔었다. 이는 양측의 관리들이 같은 수준에서 대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심지어 서로 시와 부를 지어 주면서, 우의를 맺기도 했다. 쌍방의 사신이 교류하는 중요한 한가지 내용은 바로 이전에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던 사대부들의 현황이었다. 진양이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계속하여 구양수(歐陽修), 범중엄(范仲淹)등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질문을 받았다. 이런 질문은 거의 친구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같았다. 이를 보면 당시 송요간의 상층인물간에는 연계가 밀접했고, 이미 관계망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교류의 과정에서, 송요의 사대부들은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되고, 서로를 인정했다. 진양은 이렇게 말했다: "소위 남북이 한 가족같다. 자고이래로 두 왕조가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이 이런 적이 없었다." 이것이 당시의 진실한 감정이다. 주목할 점은 송나라의 재상들 중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젊었을 때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는 것이다. 요나라에 좋은 인상을 가졌던 그들은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주화파'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송나라와 요나라간에 백년간의 평화가 지속된 원인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글에 송나라와 요나라간의 평화에 대한 칭송이 충만하다. 예를 들어 호숙(胡宿)은 이런 말을 했다: "변경에서 바람먼지가 이는 놀라움도 없고, 백성들도 전쟁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국가가 백년간 태평성세를 이루고, 그동안 서로 60년간 사이좋게 지낸 기간이 들어 있는데, 이는 사상유례없는 경우이다." 정거중(鄭居中)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한당에도 오랑캐와 화친한 적이 있었지만, 우리 송나라의 정책같은 것은 없었다."

 

3. 송나라의 "민족의식"의 형성

 

일반적으로 말해서, 민족의식은 근대민족국가의 산물이다. 다만 마치 송나라사대부들의 일부 사상에는 이미 민족의식의 의미가 초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같다. 이는 송나라사대부집단의 태도에서 어느 정도 드러난다. 대체적으로 주권국경의식과 '상상의 공동체'이다.

 

주권, 특히 영토에 대한 주권은 근대민족국가의 중요한 권력이다. 송나라사대부의 영토국경의식은 북부변방의 압력에서 나타난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연운십육주를 요나라가 장악하고 있으므로, 송나라는 기병을 방어할 수 있는 천험의 방어요새를 잃은 것이었다. 송나라의 군신은 부득이 북방의 기병을 방어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 현존국경을 지켜야 했다. 송나라때의 군신은 전왕조처럼 장성을 쌓는 방법은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방안을 마련하여 '기병이 평지를 이용하는 것을 제한'한다. 먼저, 북부지구에 당력체계(塘濼體係)를 건립한다. 연못과 습지를 이용하여 기병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변방에 주둔하는 병사들에게 관개의 이익도 제공한다. 다음으로, 북부지구에 나무를 많이 심는다. 이를 통해 격리대를 형성하여 기병이 통과할 수 없게 했다. 실제효과로 보면 이런 조치는 효과가 크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숨은 것은 구체적인 국경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이다.

 

더욱 현저한 것은 송신종(宋神宗)시기에 요나라와 국경(邊界)을 확정한 조치이다. 전왕조때 국경은 그저 모호한 개념이었다. 혹은 그저 모호한 지대였지 명확한 경계선은 아니었다. 다만 11세기 후기, 송나라는 많은 인력물력을 들여, 북방에서 요나라와 명확한 국경을 확정한다. 봉후(封堠, 봉화대), 호참(壕塹, 참호), 계비(界碑, 경계비)등을 표지로 하여, 송나라와 요나라간의 국경선을 계속 명확히 했다. 이와 동시에, 송나라조정에서는 지도를 작성하여 자료실에 보관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국경선에 대한 권위를 선양한다. "보천지하(普天之下), 막비왕토(莫非王土)". 중국은 명확한 경계선이 없는 천하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송나라에 이르러 그런 관념은 완전히 바뀐다. 북송의 군신은 명확한 경계선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소위 "명립계후(明立界堠)"에서 드러난 것은 송나라때의 특수한 형세하에서의 화이관념(華夷觀念)의 전환이었다.

 

사대부집단에서도 '상상의 공동체' 의식이 파생되어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비록 구체적인 정책에서 송나라때의 사대부들이 더 이상 연운십육주의 수복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감정적으로나 인식에서 그들은 여전히 연운지지는 화하의 옛땅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송나라 관리들은 반드시 연운의 땅을 지나야 했다. 현지의 '의관과 언어가 모두 옛날의 풍속 그대로'라는 것을 발견한다. 당연히 마음 속을 하나의 신념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 땅의 사람들은 여전히 송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송나라가 옛땅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들의 시에서 쓴 것과도 같이, "어양부로상수체(漁陽父老尙垂涕), 연암장군수청영(燕頷將軍誰請纓)" 마치 이는 연산북쪽에 사는 거란인들의 거주지와는 다른 것같았다. 여기에서 호한(胡漢)의 경계는 여전히 존재했고, 이는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의 연속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이들 연인(燕人)들은 여전히 중원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상상으로. 당연히 이런 "상상의 공동체"는 상당한 정도로 천하를 마음에 품은 사대부들의 일방적인 바램일 것이다. 연운지구에 사는 백성들은 송나라사대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님족에 대하여 분명하고 명확한 인식은 없었던 것같다.

 

결론

 

특수한 지연정치(地緣政治)의 국면하에서, 송왕조 내부의 사대부들의 사상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사상관념과 현실정국의 모순충돌은 사대부들의 화이관을 바꾸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한편으로, 송요간의 상호교류는 백여년의 평화를 가져왔고, 다른 한편으로, 송나라사대부들에게는 여전히 호한을 구분하는 전통이 남아 있었다. 문화전통과 현실이익에서 출발하여, 송나라사대부집단에서 민족사상의 핵심요소가 잉태된다. 국경선에 대한 명백한 요구 그리고 자신의 집단에 대한 상상은 북송의 민족의식의 맹아라 할 수 있다. 이는 남송에까지 이어진다. 다만 근대의 민족운동과는 달리, 이런 엘리트사상은 사회하층에까지 전파되지는 못했다. 진정한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의식"이 발생한 것은 아마도 청말 심지어 그 이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