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로(思蘆)
<정전이후(停戰以後)>라는 옛날 영화를 기억하는가?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은 국공내전(國共內戰)중의 안평사건(安平事件)이다. 영화의 주장은 이러하다: 1946년 미국의 마샬장군이 국공간의 정전을 조정하기 위해 중국으로 왔다. 다만 미국은 암중으로 장개석을 지지하며 평화협상을 깨트려버린다. 미국의 해병대 비첼 소령은 미군과 정부군을 이끌고 해방구인 안평진(安平鎭)을 습격한다. 그러나 중공군대에 의해 격퇴당하고, 쌍방은 모두 사상자를 낸다. 사건발생후, 미국과 중곡은 공동조사팀을 안평으로 보내어 조사를 벌인다. 미군과 장개석이 증거를 위조하다가 중공에 발각되어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다. 영화에서는 미군과 장개석이 중국의 내전을 도발했고, 유언비어를 퍼트렸으며, 그리하여 중공은 어쩔 수 없이 자위를 위해 반격했으며,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양규송(楊奎松)의 <역사의 인몰(湮沒)과 개사(改寫) - 1946년 안평사건진상과 중공의 대미교섭에 관한 재고찰>이라는 글을 보면, 사건의 진상은 당시 평진공로(平津公路, 북경-천진도로)는 미군이 정기적인 순찰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 순찰대는 매3일에 북경(당시 명칭은 북평)과 천진을 한번씩 왕래하며, 도로상황을 시찰했다. 그리고 북경의 해병대 및 미군집행부의 운송부대를 호위했다. 미군순찰대는 모두 장교 1인, 병사 41명이 있었으며, 각각 지프차 3대, 순찰트럭 2대, 중(重)화물트력 3대가 있었다. 운송부대에는 지휘차량 1대와 음식물과 군용물자를 싣는 트럭 7대가 있었다(여러 미군병사와 1명의 중국운전기사가 운전했다). 7월 29일 오전, 중공 기동군구(冀東軍區) 제14군분구(軍分區) 휘하의 53단(團)의 일부와 중공 통현(通縣)의 무장대대 일부는 미군의 운송차량부대가 평진공로를 거쳐 안평진을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미리 매복하여, 2대의 바퀴를 제거한 큰 수레를 도로에 가로로 놓아두어 장애물을 설치한다. 미군차량이 정차하여 장애물을 제거하는 틈을 타서, 돌연 도로 양측의 경작지안에서 십여개의 수류탄을 던지고 공격을 감행하여, 물자를 약탈하고자 한다. 미군은 즉시 반격했고, 3시간여가 지난 후에 중공군대는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든다. 한 해병대원이 통역인원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돌연 다리에 총알 한방을 맞느다. 중공부대는 바로 철수한다. 미군은 3명 사망, 4명 중상, 경상 8명의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사상자는 처음에 수류탄공격을 받아서 발생한 것이다. 중공방면의 사상자수는 그날 기동군구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사망1명, 부상 7명에서 2주후에는 사망 6명 부상 18명으로 바뀐다. 다음 날 국군은 평진공로의 교통안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중공점령구인 향하현성(香河縣城)을 공격한다.
당시의 배경은 미국대통령특사이닌 마샬장군의 조정하에, 국공쌍방이 1946년 1월 5일 정전(停戰)에 합의했고, 1월 10일 기본적으로 평화를 실현했다. 마샬은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추진하기로 하고, 군대정돈을 포함한 5개항목의 평화합의를 달성한다. 이미 취득한 성과를 파괴하지 않기 위하여, 마샬은 사태를 확대시키 않고, 이 사건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대응원칙을 정한다. 최대한 자제하는 태도를 보이고, 미국의 중립적인 지위에 의심받지 않도록 하며, 내전의 발발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7월 29일 당일, 기동군구는 당중앙에 보고하여, 미군과 장개석군이 연합하여, 해방구인 안평진일대를 소탕하고 식량을 약탈하였다고 하였다. 미군과 장개석이 먼저 공격하였고, 아군 사망1명, 부상7명이며, 미군은 사망 29명, 부상 10명, 장개석군은 사망 4명, 부상 6명이라고 하였다. 무기와 자동차 약간을 탈취했다고 보고한다. 신화사는 천진주대 미해병군 140여명과 국민당군일부가 7월 29일 기동해방구 향하현 안평진을 공격했고, 현지의 중공부대는 어쩔 수 없이 자위반격했다고 하였다. 섭검영은 중공중앙을 지시에 따라, 북평군조부(北平軍調部)에서 같은 내용으로 미군측에 항의한다. 북평군조부는 미국측, 국민정부, 중공의 3자 공동팀을 조직하여 증인을 찾고 증거를 조사하여 진상을 밝히기로 한다.
조사팀의 중공 부대표 뇌임민(雷任民)의 회고에 따르면, 진상을 감추기 위해, 중공은 사람을 보내 도로에 놓여 있던 낡은 소달구지를 "가로방향에서 세로 방향으로 돌려놓고" 바퀴를 찾아서 가져다 놓아 "우마차의 취치와 수레바퀴자국은 도로진행방향이고, 수레바퀴가 손상되었다"는 현장모습을 보이려 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상황은 "지나가던 우마차가 도로 중앙에 고장나서 망가져 있어서, 미군의 차량을 막았고, 이로 인하여 충돌일 발생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특별히 7월 29일 충돌의 현장을 수백미터 떨어진 다음날 국민당군이 공격하여 점령한 안평진의 전투현장과 연결시켜, "미군이 총을 쏘아 아군 초병을 습격한 후, 즉시 평진공로에서 안평진의 중공수비군에게 진격하였고, 이로 인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게 된다. 중공은 학식도 있고, 머리도 좋고, 말도 잘하는 간부를 증인으로 내세웠다. 부대는 단장이 영장이라고 주장하고, 배장은 전사라고 주장했다; 지방에서 지방위원회가 선별하여 파견한 간부는 일반백성으로 분장했다. 뇌임민은 그들을 소집하여, 이 임무의 정치적 의미와 필요성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후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 질문에 대답해야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리고 조사원의 입장으로 질문하고 그들에게 대답하게 하면서 여러번 반복훈련시켰다. 국민당측의 일처리는 헛점이 많았다. 그들은 단지 향하현의 현장으로 하여금 주위 각 마을의 농민을 불러서 회의를 열고, 각 마을의 지도자들에게 증인을 보내도록 강제했다. 그리하여, 청문회에서 국민정부측의 증인들이 과장하여 상황을 얘기하게 되고, 중공측에서는 그 기회를 틈타 미군과 장개석측이 증거를 위조한다고 공격했다. 조사는 중단된다. 그러나 드러난 확실한 증거 앞에서 중공측도 부득이 미군과 장개석이 연합하여 해방구를 공격하고, 중공은 어쩔 수 없이 자위적으로 방어했다는 주장에서 후퇴하여 타협을 준비한다. 오해라는 주장을 미국측이 받아들이도록 하려 했다. 단지 당시 내전은 이미 발생했고, 마샬은 조정이 실패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미해병대는 대륙에서 철수한다. 그리하여 안평사건조사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중공의 모든 역사서, 영화와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안평사건이 미군과 장개석이 도발하였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안평사건과 심숭강간사건(沈崇强奸案)은 중국당국니 반미세뇌에 이용하는 선전자료이다.
안평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당시 중공중앙은 내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미국정부에 적대시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중공중앙은 각 중앙국 및 각 지방당조직에 즉시 군중적인 반미투쟁을 전개하도록 지시한다. 반드시 군중들로 하여금 미국의 대중군사간섭의 실질을 인식하게 하고, 장개석정부의 미국식민지성격을 강조하도록 하면서, 미국정부의 대중반동정책을 시정하고, 주중미군철수, 대중군사지원법안을 부결시킬 것을 요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부대에서 반미교육이 진행되고, 이로 인해 하급관병들은 미군을 적대시하게 되어, 미군을 손봐주겠다는 심리를 갖게 된다. 부대의 장병들은 반미정서가 고양된다. 며칠동안 도로의 미군자동차는 공산군병사들의 사격을 받아야 했다. 하층지휘관은 미군을 공격하는 것이 전공이 된다고 여긴다. 사건발생후, 공산군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전공을 과장하여 보고하며, 진상을 숨기고 중공고위층을 오도한다. 그리하여 중공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이치를 주장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공은 대외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후에는 할 수 없이 하급에게 끌려다니면서 억지주장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전형적인 위에서 아래를 오해하게 만들고, 아래는 다시 위를 오해하게 만드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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