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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연(燕)": 팔백년 제후국...

by 중은우시 2025. 2. 28.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기원전 318년, 한 국군(國君)이 퇴위를 결정한다.

연(燕)나라는 중원의 동북에 위치하고, 계(薊, 지금의 북경 방산구)를 수도로 하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였다. 위치가 구석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중원, 관중지구에서 죽기살기로 싸우고 있던 제후국들은 영토쟁탈전을 벌일 때 이 구석진 국가는 기본적으로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에게 잊혀진 연나라는 천하를 잊지 않고 있었다.

국군의 지위가 희쾌(姬噲)"의 손에 들어왔을 때, 상고의 성왕인군(聖王仁君)을 본받기 위해, 재위기간이 3년도 되지 않는 그는 천하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결정을 내린다: "과인은 현명한 사람에게 국군의 자리를 양보하고자 한다. 국군을 안하겠다! 이후 국가의 대소사는 모두 승상 자지(子之)가 담당하고, 과인은 농사나 지으면서 살겠다."

이 결정이 나오자, 연나라의 상하는 들썩이게 된다. 연나라 "가천하"제도문화의 최대수익자인 연나라의 태자 희평(姬平)은 더더욱 분개한다. 그는 부친이 이런 천하의 도리를 어기는 결정을 내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선양(禪讓)은 국군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넘겨주는 것이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가 국군을 맡도록 하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상고시대의 요(堯), 순(舜), 우(禹)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왕도를 전승했다. 다만, 확실히 현왕처럼 왕도를 전승하려는 것은 단지 연왕 희쾌의 자작다정(自作多情)이다. 함부로 전설중의 왕위계승제도를 사용하는 것은 리스크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다시 왕위를 빼앗아 오기 위해, 연나라의 태자와 연나라의 승상간에 전쟁이 발발한다. 이번 내란으로 연나라는 망국에 이를 상황에 처하게 된다.

1

연나라의 기원은 진(秦)나라나 초(楚)나라처럼 비천하지 않다. 전국칠웅 가운데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연나라의 혈통은 가장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연나라는 연소공(燕召公)에서 시작한다. 연소공은 바로 희석(姬奭)으로,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의 아들이며,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 주공(周公) 희단(姬旦)의 동생이다.

당시 희석은 형인 주무왕 희발을 따라 목야지전(牧野之戰)에서 상(商)군을 격패시키고,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자분(自焚)하게 만들어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주왕조의 개국대전에서 소공 희석은 주공 희단과 함께 부월(斧鉞)을 잡고 좌우에서 주무왕을 보좌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주왕조의 건국을 선포했었다.

주무왕이 주왕조를 건립한 후,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하여, 공신과 종실을 널리 제후로 봉했다. 그리하여 희석은 계(薊)의 땅을 봉지로 받아 서주에 신속(臣屬)하는 제후국인 연나라를 건립한다. 다만 다른 희성(姬姓) 제후국들이 중원을 봉지로 받은 것과는 달리 소공의 연나라는 대체적인 위치가 오늘날의 하북, 요녕 및 조선의 일부지구를 포함하여 비교적 구석진 곳이었다.

연소공 희석

그러나, 동북지방을 봉지로 내린 것은 주왕실이 그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다. 어쨌든 소공과 함께 주무왕을 보필한 주공(周公)도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산동(山東)지구를 봉지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보좌에 공을 세운 강태공(姜太公) 역시 산동지구를 봉지로 받아 제(齊)나라를 건립한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주왕이 이 세 사람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이 인덕으로 그곳의 사람들을 감화시키길 희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도 확실히 그러했다. 서주 초기의 북경지구는 상나라가 남긴 문화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력했다. 당시 연나라 부근의 고죽국(孤竹國)에는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여 굶어죽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동북에 위치한 동이(東夷), 산융(山戎)등 부락은 상나라때부터 중원왕조와 진공관계(進貢關係)를 유지하며 관계가 밀접했었다. 중원지구의 왕조교체에 대하여,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소식을 반박자 늦게 듣게 된다. 게다가 그들은 상왕조와 감정이 깊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린 사건에 대하여 자신의 내부문화의 감정색채를 지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는 주왕조에 있어서 모두 방지하지 않으면 안될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소공을 연의 땅에 봉한 것이다.

후세의 고고학 발굴성과에 따르면, 주왕조가 처음에 봉한 연나라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만황지지(蠻荒之地)가 아니다. 일찌기 주왕조가 건립되기 전에, 역수문화(易水文化)가 이미 연의 땅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오늘날 보정시(保定市) 산하의 역현(易縣) 북복지(北福地)문화유적지에서 고고학자들은 8000년전의 원시촌락유적을 찾아냈다. 유적지에서는 도기로 만든 면구(面具), 옥기(玉器)의 잔편(殘片) 및 상당한 규모의 제사장소를 발굴했다. 이는 여기에 유구한 역사의 문명형태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하(夏)왕조때부터, 역수유역은 역씨(易氏), 백적(白狄), 선우(鮮虞)등 부락이 이곳에서 농경, 방목을 하며 살았다. 상왕조에 이르러, 연의 땅은 심지어 당시 왕조의 북방에서 중요한 방국(方國)중 하나가 된다.

주왕조의 천하통치를 위해 소공 및 그 후손은 연나라 800년 역사를 일구어낸다.

2

소공은 여전히 주왕조내의 왕실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무왕이 분봉해준 봉지에 연소공은 한번도 가볼 기회가 없었다. 봉지의 사무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연소공은 주공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장남을 봉지로 보내 통치하게 한다.

주무왕이 사망한 후, 소공과 주공은 주성왕(周成王)의 등극을 공동으로 보좌하며, 태보(太保)의 관직을 받아, 삼공(三公)의 반열에 든다.

소공은 고위직에 머물고 있었지만 생활은 비교적 검박했다. <사기>에 따르면, 그가 "향읍(鄕邑)을 순행할 때, 당수(棠樹)가 있으면, 그 아래에서 정무와 재판을 진행했다. 후, 백부터 서인까지 모두 공정하게 자리를 얻었고, 실직하는 자가 없었다." 천자를 대신하여 지방을 순행할 때도 소공은 절대로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고, 당수의 아래에 임시장막을 세우고, 일을 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질서정연하게 처리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그가 앞장서서 역할을 하면서, 주왕조는 주무왕이 죽은 후, "형조사십여년불용(刑措四十餘年不用)"의 "성강지치(成康之治)"를 맞이한다.

그를 대신하여 연나라로 가서 통치를 하던 장남 극(克)은 부친과 조부가 주도하여 만든 주문화를 연의 땅으로 가져온다. 오래된 연문화와 융합하여, 신선한 연문화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하여 주왕조 제후국인 연나라의 경제문화기반을 마련한다. 이렇게 연나라는 주왕조의 '왕도'의 아래에 신복한다.

그러나, 연나라를 세운 후 시종 왕기(王畿)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소공이래 연혜후(燕惠侯)에 이르기까지 9대의 시기에 대해 역사상 비교적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연나라는 나라를 세운 후, 시종 중원농경문화와 북방유목부락이 교차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북방의 산융, 동이부락과 다투어야 해서, 도성을 여러번 남으로 천도해야 했다. 춘추시대 중반에 이르러, 연나라의 국도는 이미 연환후(燕桓侯)가 건국한 초기의 유리하(琉璃河)일대에서 역수유역으로 물러나 임역(臨易)을 도성으로 삼는다. 이곳은 연(燕), 제(齊)의 국경과 상당히 가깝다. 두 나라의 선조가 함께 주왕조에서 관직에 있었던 점을 고려하여, 연, 제 두 나라는 황하를 경계로 하여, 제나라는 곤란해진 연나라 제후국에 비호를 제공한다.

이때 제나라의 국군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명인 제환공(齊桓公)이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기치로 내걸고 이미 주천자를 대표하여 각로제후들에게 명을 내리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웃한 제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보고, 연환후의 후임자인 연장공(燕莊公)은 제나라사람의 손을 빌어 산융을 몰아내고, 연나라를 되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제환공에게 도움을 청한다.

제환동은 당연히 "이신작칙(以身作則)"하여 자신의 '존왕양이'의 결심과 태도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산융을 토벌하고, 고죽으로 진격하여, 연나라북부의 위협을 제거해준다.

산융의 위협이 제거된 후, 연장공은 제환공에 대하여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직접 제나라군대를 국경까지 배웅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제환공을 따라 제나라땅으로 50리를 더 들어간다.

이에 대하여, 제환공은 "과인은 천자가 아니다. 연군의 행동은 예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멀리 배웅했으니, 급히 나라로 돌아가라." 말을 마치고 사람을 불러 그곳을 연과 제의 국경선으로 삼게 하고, 연장공을 돌려보낸다.

그후, 연장공은 특별히 제환공이 증여해준 토지에 연류성(燕留城, 지금의 하북성 창현 동북)을 건립하여, 제환공의 은혜에 보답했다.

우리가 오늘날은 이미 알 수가 없다. 연장공이 이렇게 한 것이 정말 제환공에게 감격해서인지 아니면 제환공이 돌아간 틈을 타서 제나라의 토지를 '차지'하려 한 것인지. 어쨌든 산융은 이미 멀리 도망쳤고, 연나라는 다시 천도를 한다. 남쪽의 임역에서 다시 북쪽의 계로 옮긴다. 이때부터 계를 중심으로 연나라의 역사는 400년간 지속된다.

3

"삼가분진(三家分晋)"후 연나라의 이웃인 강씨의 제나라에서도 "전씨대제(田氏代齊)"사건이 발생한다. 제나라는 그대로 제나라이지만, 국군은 성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전에는 대대로 사이가 좋았고 연나라에 대하여 포용적이던 제나라였지만, 갈수록 태도가 좋지 않게 바뀌게 된다.

주왕실의 쇠약과 더불어, 갈수록 많은 원래 주왕조에 신복했던 제후국들이 속속 주왕실의 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일부 실력과 담량이 있는 제후들은 더 이상 이전의 봉호를 쓰지 않고, 칭왕(稱王)하기 시작한다. 가장 전형적인 대표는 바로 "전국칠웅"이다.

희성(姬姓)종실제후국으로서, 연나라는 일찌기 방대한 수량의 희성제후국중 돋보이는 나라였다. 다른 나라들이 속속 칭왕할 때, 연나라도 동종인 주왕실의 왕호를 참월하여 스스로 왕에 오른다.

기원전320년, 연나라의 제38대 국군 연왕 쾌(噲)가 등극한다. 연나라에서 처음으로 칭왕을 하게 된 국군 연역왕(燕易王)의 후계자인 연왕쾌는 즉위초기에는 그대로 괜찮았다.

<한비자.설의(說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연나라의 국군 자쾌(子噲)는 소공(召公)의 후손이다. 지방은 수천리에, 병력이 수십만이다. 여색에 빠지지 않고(不安子女之樂), 음악에 심취하지도 않고(不聽鐘石之聲), 안으로 호화로운 궁전을 짓지도 않고(內不湮汚池臺榭), 밖으로 어로, 사냥에 빠지지도 않았다(外不罼戈田獵). 그리고 직접 가래와 호미를 들고 농사를 지었다(又親操耒耨以修畎畝)"

연왕 쾌는 근검하며 부지런하고, 전쟁을 좋아하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전심전력을 다했으며, 백성들과 함께 했다. 그리하여 연나라의 국력은 날로 상승한다. 이를 보면 연왕쾌는 혼군이 아니고 심지어 그는 업적도 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계속 이런 태도를 유지했더라면 후세에 "연나라의 인군(仁君)"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도 절대 꿈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증명한다. 연왕쾌는 "검주편봉(劍走偏鋒, 상대를 이기기 위해 통상적이지 않은 수법을 사용하다)"을 좋아했다.

연나라의 국운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연나라군주의 머리 속에는 계속하여 "요순우를 넘어서서 삼황오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꿈이 있었다. 그리하여, 즉위하고부터 연왕쾌는 자신이 만족할 만한 후계자를 물색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대왕의 마음을 눈치빠른 연나라대신들은 읽고 있었다. 연왕쾌의 상국(相國)인 자지(子之)는 대왕의 마음을 가장 잘 읽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지라는 인물은 <전국책>에서 "귀중주단(貴重主斷)"이라는 네 글자로 그의 집정기간의 능력을 표현했다. 이를 보면, 상국으로 있는 동안 자지는 상당히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하루빨리 "전씨대제"같은 위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후로 소대(蘇代)와 녹모수(鹿毛壽) 두 대신을 매수한다. 그 중 소대는 전국시대 합종가 소진(蘇秦)의 동생이다. 자지와는 인척간이었으며, 이때 연왕의 명을 받아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다.

성인군주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연왕쾌는 대신과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대가 제나라에서 돌아오자 연왕쾌는 즉시 그에게 제왕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인상을 받았는지 물어본다.

연왕의 질문에 소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의심스러우면 쓰지를 말고, 한번 쓰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疑人不用, 用人不疑). 신변의 대신을 믿으셔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큰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소대는 어느 정도 자지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대신한 면이 있다. 다만 뜻이 아주 명확하지는 않다. 그리하여, 그후 한동안 연왕쾌는 비록 대신들에 대한 신임을 강화했지만, 다음 단계 조치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시간이 그냥 흘러가자, 자지는 다시 또 다른 유세객을 보낸다. 녹모수. 그는 지난번 소대가 연왕과 얘기한 기초 위에서 다시 한번 부추기는 말을 한다. 직접적으로 연왕에게 "선양"이라는 개념을 제기한다. 그는 연왕쾌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께서는 요, 순, 우를 본받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차라리 직접 국가대사를 자지에게 맡기고, 왕께서는 막후로 물러나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그래도 왕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힘든 일은 자지가 하고, 공로는 왕께서 차지할 수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연왕은 그 말을 듣고, 이치에 맞는 말이라 여긴다. 그렇게 하여 요, 순, 우를 본받아 선양을 할 수도 있고, 연나라공족들이 자신이 실국오국(失國誤國)했다고 욕하지도 않을테니, 만전지책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자지의 정교한 기획하에, 머리가 이상해진 연왕쾌는 과감하게 "선양"을 선포하며, 자신의 마음 속 '인군'의 ㅡ이미지를 완성한다.

4

자지가 왕을 칭하자, 즉시 원래의 충성스럽고 백성들과 나라를 위하는 좋았던 이미지를 잃어버린다. <사기> 기록에 따르면, 자지가 칭왕하는 동안, 폭정을 행하여, 연나라 상하에 민원이 비등했다.

특히 연왕에게 속았다고 여기는 연나라의 공족(公族)들은 반응이 더욱 격렬했다. 자지의 가죽을 벗겨야만 한이 풀릴 정도였다. 그리고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위를 빼앗긴 연나라의 태자 희평이 직접 들고 일어서서 왕위쟁탈전을 벌인다. 연나라는 이로 인하여 상당한 혼란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웃나라 연나라의 혼란을 보고, 일찌기 '좋은 이웃'이었던 제나라가 다시 한번 나선다.

연나라의 태자 희평에 기술원조를 제공하는 동시에, 기원전315년, 제선왕(齊宣王)은 명을 내려, 광장(匡章)으로 하여금 제나라의 정예병을 이끌고, 연나라를 도운다는 기치하에, 연나라의 영토내로 진격한다. 연나라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자지의 찬위를 통한스럽게 여겼고, 제나라의 진격에 저항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성문을 열고 크게 환영한다. 그리하여, 제나라군대는 50여일만에 거의 모든 연나라영토를 점령하고, 연나라도성을 함락시킨다.

한때 왕을 칭했던 자지는 분노한 연나라의 군인들과 백성들에 의해 칼로 짓이겨져 육니(肉泥)가 된다. 연왕쾌도 이번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여, 자신의 코미디같은 일생을 마친다.

그러나, 제나라군대는 이번에 명목상으로 '도움'을 주었지만, 실제로는 드러내놓고 강탈행위를 벌인다. 제나라군대는 연나라를 '해방'시키는 임무를 완성한 후, 그들의 흉악한 면모를 드러낸다. 연나라에 왕이 없는 틈을 타서, 제나라군대는 연나라의 종묘로 침입하여 예기(禮器)를 모두 가져가고, 방화약탈하면서 온갖 나쁜 짓을 다한다.

연나라의 서쪽에 있던 중산국(中山國)도 제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자신의 군대를 보내어 연나라를 토벌한다. 이를 통해 중산국도 수백리의 영토를 확장한다.

제나라의 조치에 각국이 모두 강렬하게 질책했다. 당초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제나라군대를 맞이했던 연나라의 군인들과 백성들은 이제 속속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제나라군대에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하며 나라와 고향을 지키러 나선다.

이때, 마찬가지로 연나라의 혼란을 지켜보고 있던 나라가 있으니, 바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조(趙)나라이다.

조나라는 조무령왕(趙武靈王)의 호복기사(胡服騎射) 개혁후에, 국력이 급증하여, 주변의 나라들이 모두 꺼리는 상황이 된다. 조무령왕에 있어서, 제나라가 연나라를 병합해서 국토를 넓히게 되면, 연나라와 이웃한 조나라는 제나라가 강대해진 후에 완충지대를 잃게 되고, 제나라의 공격을 직접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연나라의 혼란을 틈타 이득을 취한 중산국은 원래 조나라와 대대로 원한이 있었다. 만일 제, 중산 두 나라가 손을 잡으면 조나라도 제2의 연나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무령왕은 급히 한(韓)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그곳에 망명해 있던 연나라의 또 다른 공자를 연나라로 돌아오도록 요청한다. 연, 조 동맹을 통하여, 중산국을 멸망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연왕쾌의 서자인 공자직(公子職)은 조나라에서 병력을 호위시켜 연나라로 보내준다. 그가 연소왕(燕昭王)이다.(연태자 희평은 자지에게 패배하여 이미 죽었다)

5

연소왕이 즉위한 후, 부친의 정책결정실패로 인한 민생문제에 크게 가슴아파 한다. 그러나 그때 그는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연나라의 외부에 두 명의 강도가 있는 것이다. 중산국과 제나라가 호시탐탐 연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소왕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복수였다. 연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어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나라를 강하게 만들 것인가? 연소왕이 생각한 것은 인재강국이다.

그러나 지금의 연나라는 영토도 없고, 돈도 없다. 어떻게 인재를 흡수할 것인가? 이 문제는 연소왕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연나라의 대부 곽외(郭隗)를 불러 대책을 논의한다. 대왕의 질문에 곽외는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상고시대 군주가 천금으로 천리마의 뼈를 산 이야기를 했다. 오직 현명한 인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못이룰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연소왕은 크게 깨닫고, 즉시 곽외를 스승으로 선포한다. 동시에 황금대(黃金臺)를 만들어 현명한 인재들을 모은다.

연왕에게 현명한 인재를 구하려는 갈망이 크다는 것을 보고, 당시 위나라의 군사가 악의(樂毅), 제나라의 음양가 추연(鄒衍), 조나라의 유세가 극신(劇辛)등이 속속 연나라에 투신한다. 이렇게 "사쟁주연(士爭湊燕, 선비들이 앞다투어 연나라에 모이는)"의 국면이 형성된다.

큰 돈을 들여서 모은 인재들을 연소왕은 아주 아낀다. 그리고 충분한 신뢰를 주고, 그들이 최대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연소왕의 인재전략은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후세에 깊이 영향을 끼치는 "황금대현상"을 남긴다.

이제 연나라에 인재는 있다. 연소왕은 오직 진정한 의미의 개혁만이 연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리고 개혁의 기초는 반드시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민심을 응집시켜야만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이고, 복수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소왕은 연나라경내에서 공제(公祭)를 지내, 백성들을 위문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해준다. 최대한도로 전란으로 백성들이 입은 심리적인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동시에 무(武)를 버리고 경(耕)을 취해, 생산을 크게 장려한다.

연나라는 금방 혼란에서 안정을 되찾는다. 국가는 부강해지고 백성들은 안거낙업(安居樂業)하게 된다.

다만, 이때 복수를 꿈꾸던 연소왕에 있어서 아직은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이전에, 연나라의 국도인 계는 전란으로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만일 연나라의 도성으로 재건하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하여 연소왕은 하도(下都)를 건설하여 연나라의 임시도성으로 삼아, 향후 제나라를 공격하는데 편리하게 한다.

연나라의 하도성의 대체적인 위치는 오늘날의 하북성 역현의 동남쪽이다. 이곳은 남으로 역수를 접하고, 동남으로 화북평원에 이른다. 북으로는 연나라의 도성에 가깝다. 그리고 동으로는 제나라, 남으로는 조나라, 중산국 두 나라와 통한다. 나아가면 공격하고, 물러나면 수비할 수 있다. 더욱 북쪽에 치우친 계에 비하여, 이곳은 시야가 넓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다른 여섯 나라들과 더욱 가깝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들과 연락하기 좋았고, 제나라의 동정을 탐지하기 편리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연소왕은 악의를 중용하여 개혁을 진행한다.

다른 육국이 속속 각종 층면의 개혁에 주력하던 것과는 다르게, 연소왕의 마음 속에는 오직 복수의 분노만이 있었다. 군사개혁이 그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악의의 개혁을 종합하면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명봉법(明奉法), 심관단(審官斷)". 법률법규를 제정하여, 관리에 대한 심사와 평가를 강화하고 적합한 관리를 선발한다.

둘째, "찰능이수관(察能而授官)"의 용인원칙(用人原則)을 확립한다. 관직과 작위를 공로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임인유친(任人唯親, 가까운 사람을 기용하는 것)의 용인전통을 버리게 된다.

셋째, "순법령(循法令), 순서얼자(順庶孼者), 시급맹예(施及萌隸)". 법을 지키는 사람에 대하여는 출신이 빈민이든 농예이건 모두 상을 내린다. 이를 통해 백성들이 법을 지키도록 하고, 사회질서를 안정시킨다.

넷째, 군대의 전법과 기율, 훈련을 중시하여, 연나라군대의 군기와 전투력을 제고시킨다.

당연히,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연나라는 개혁과정에서 오랫동안 권력을 가져온 귀족세력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다만 복수를 위해, 연소왕은 자신과 같은 조상의 친족들에게 하여도 과감하게 처형한다.

악의의 군사개혁성과를 검증하기 위하여, 연소왕은 북쪽 융적의 각 부락이 연나라국경을 침략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착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먼저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를 북쪽의 동호(東胡)부락으로 보내 인질로 삼게 한다. 표면적으로는 동호와 화해를 구하는 것이지만, 진정한 의도는 진개로 하여금 그 기회에 동호의 상황을 파악하게 하는 것이었다. 진개는 동호수령의 신임을 받은 후, 귀국하여 연소왕에게 모든 것을 보고한다.

연소왕12년(기원전300년), 진개는 군대를 이끌고 동호의 각부락을 격패시키고, 그들을 북으로 쫓아낸다. <사기.흉노열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기습격파하여 동호를 쫓아냈고, 동호는 천여리를 물러난다." 연나라군대는 북방의 위협을 철저히 해소시켰고, 동시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등 5부를 건립하고, 연북장성(燕北長城)을 쌓는다.

그렇기는 해도, 단독으로 싸우는 것은 복수를 추구하는 연소왕에게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연소왕은 악의가 제안한 "거천하이도지(擧天下而圖之)"의 책략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다른 제후국의 지지를 얻어내 반제연맹(反齊聯盟)을 형성한다.

악의는 이렇게 생각했다. 조나라와의 결맹은 다른 제후국들과의 연합에서 핵심이라고.

연소왕이 국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할 때, 조혜문왕(趙惠文王)은 병력을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연소왕은 급히 소대를 조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소대는 "휼방상쟁, 어옹득리(鷸蚌相爭, 漁翁得利)"의 이야기를 조나라에 하면서 연나라를 공격하여 양패구상하여 다른 강국이 앉아서 이득을 얻지 못하게 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하여 조혜문왕은 연나라를 공격하는것을 포기하고, 연소왕과의 연맹하는 편을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제나라가 실수하도록 만들기 위해 연소왕은 다시 조치를 취한다.

이전에 소대의 형인 소진은 자신의 "세치 혀"를 이용하여, 육국의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강대한 진나라에 대항하게 만든 바 있다. 그리하여 육국 가운데 어느 정도 명성이 있었다. 소진이 성공하기 전에, 생활이 극히 곤란했다. 만일 연나라의 국군이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소진은 절대로 오늘날의 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횡가의 눈에 연나라는 자신의 재생부모(再生父母)나 다름없다. 연나라를 위해서라면 부탕도화(赴湯蹈火)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 재나라에서 객경(客卿)으로 있던 소진은 자신의 마지막 간첩활동을 개시한다. 그는 한편으로 제나라왕의 자신에 대한 신임을 이용하여 연나라에 유리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한편으로 제왕에게 천하의 패주가 되도록 부추긴다.

당시 진소양왕(秦昭襄王)은 강대한 국력을 등에 업고, 제왕과 함께 서제(西帝), 동제(東帝)를 나란히 칭하면서 나누어 다스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왕의 요청을 받고, 제왕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소진은 그 틈을 타서 진언한다. 제왕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진나라를 치자고. 동시에 부유하지만 힘이 약한 송(宋)나라를 멸망시켜버리자고. 송나라의 부유함에 대하여 제왕은 일찌감치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소진의 건의를 듣자 깊이 생각지 않고 바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6

기원전288년, 제민왕(齊閔王)은 다른 다섯 나라와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한다. 동시에 이를 기화로 송나라를 병합해버린다.

제나라의 국력이 강성하기는 했지만, 송나라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정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리고 송나라를 격패시킨 후, 다른 여러 나라들은 속속 제왕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제나라는 내외로 적을 맞이하여 정국이 불안정해진다.

연소왕이 복수할 시기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기원전284년, 연소왕은 악의를 상장군으로 하여, 연나라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진, 한, 조, 위의 군대도 회합하였다. 조왕은 상국인(相國印)을 악의에게 수여한다. 악의는 연, 진, 위, 한, 조의 대군을 지휘하여 제나라군대에 공격을 개시한다.

제왕은 민심을 얻지 못하고, 수십년전 연나라경내에서 저지른 일이 이제 제나라의 영토안에서 상연된다. 악의가 이끄는 5국연합군은 반년만에 전체 제나라를 거의 모조리 점령해버린다.

연소왕은 목적을 달성했다. 여러 나라들이 제나라를 멸망시킨 후 창끝을 연나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소왕은 명을 내려, 악의에게 제나라의 2개 남은 성을 "포위만 하고 공격하지 말 것"을 명한다. 그리고 현지백성들은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허락한다. 그는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방식으로 제나라백성들이 스스로 투항해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그는 볼 수 없었다. 평생을 복수에 전념한 연소왕은 몇년이 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연소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연혜왕(燕惠王)이 즉위한다.

이는 연, 제 두 나라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연혜왕이 태자로 있을 때 악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나라의 주전파 전단(田單)은 그 사실을 알고난 후, 사람을 연나라로 보내 반간계를 쓴다. 악의가 병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기화로 반란을 도모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이다. 연혜왕은 원래 악의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를 기화로 악의의 병권을 회수한다.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악의는 조나라로 떠난다. 이 때부터 연나라는 상하가 불화하는 국면에 빠지게 된다.

그 기회를 노려, 전단은 "화우진(火牛陣)"을 펼쳐, 연군을 격패시키고, 제나라를 부흥시킨다.

이 전투를 겪으면서, 연나라는 불가피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서쪽의 강국인 진나라가 점차 연나라를 집어삼키려 하자, 연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무슨 내정을 발전시키고, 자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암살을 꾀하는 것이 된다. 한 사람의 힘으로 국면을 뒤집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헛수고로 돌아간다.

형가(荊軻)를 보내 진왕을 암살하려던 연나라는 결국 암살실패후 망국을 가속화하게 된다. 기원전222년, 진군은 마지막 군주 연왕희(燕王喜)를 포로로 잡고, 연나라는 멸망한다. 향년 팔백년이다!

八百年诸侯国,一把好牌打得稀烂-史海钩沉-万维读者网(电脑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