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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북송 "모요안(帽妖案)": 정사(正史)에 기록된 UFO사건일까?

by 중은우시 2025. 2. 19.

글: 뇌동오탁방(腦洞烏托邦)

송진종(宋眞宗) 천희2년(1018년) 오월, 낙양고성(洛陽古城)은 사상유례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하나의 괴이한 소문이 도시 구석구석까지 퍼진다: 한 시민이 밤중에 모양이 밀집모자(席帽)같은 요물이 공중을 떠다녔고, 이 요물은 하늘을 날아다닐 뿐아니라, 땅으로 내려와서는 견랑(犬狼)으로 변신해 사람을 해친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모두 삽같은 물건을 무기로 삼아 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저명한 북송의 "모요안(帽妖案)"이다.

이 사건은 정사에 기록된 고대의 UFO목격사건일까? 아니면 인위적인 귀신놀음이었을까? 모요안은 또 어떻게 요란한 "엽요(獵妖)"행동으로 옮아가게 되었을까? 심지어 하마터면 북송의 정변까지 일으킬 지경에 처했을까? 오늘은 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신곤황제(神棍皇帝)

모요안을 상세히 검토해보기 전에 먼저 당시의 시대배경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모요안은 북송 송진종 천희연간에 일어났다. 송진종의 이름은 조항(趙恒)이고, 송나라의 제3대황제이다. 그는 중국역사상 여러 제왕들 중에서 존재감이 그다지 강하지는 않고, 후세게 그에 대한 평가도 의견이 갈린다. 어떤 사람은 그가 현명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혼용(昏庸)했다고 말한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송진종은 즉위초기 정무를 열심히 보고, 백성들을 보살핀 좋은 황제였다. 그는 현명한 신하를 기용하고,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우수한 농작물을 도입하고, 황무지개간을 장려하여 대송의 농경면적을 5.2억무에 달하게 발전시켰다.

수공업, 상업도 이 시기에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어, 국고수입이 당나라를 훨씬 넘어서서 역사에서는 "함평지치(咸平之治)"라 불렀다.

그러나 집정후반기에 이르러, 송진종은 갈수록 엉망이 되어갔다. 이는 그의 연약한 성격 그리고 미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1005년 전연지맹(澶淵之盟)은 송진종의 제왕생애에서 중대한 전환점이다. 북송초기,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회복하기 위하여 송나라는 요나라와 수십년간 전쟁을 지속해왔다.

북송의 제2대 황제인 송태종은 즉위후 두 차례의 대규모 대요전쟁에 나선다. 그러나 모두 실패로 끝났따. 그후 북송은 기본적으로 무력으로 연운십육주를 수복하려는 꿈을 포기하고, 대요정책은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된다.

다만, 송나라는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요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함평2년(999년)부터, 요나라는 연이어 병력을 변방에 보내어 도발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도살한다. 이는 변경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큰 재난이었다.

1004년, 요나라의 소태후(蕭太后)는 요성종(遼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와 함께 20만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전주(澶州, 지금의 하남성 복양)에 이른다.

북송조정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신 왕흠약(王欽若)은 전주와는 강 하나를 사이에둔 동경(東京) 변량(汴梁)을 포기하고,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재상 구준(寇準)은 송진종의 어가친정(御駕親征)을 권한다. 송진종은 어쩔 수 없이 북상했고, 이로 인해 송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간다.

요나라방면에서 대장 소달름(蕭撻凛)이 전투개시전에 지형을 시찰하다가 송군의 화살에 맞아 사망한다. 이로 인해 요나라군대의 사기는 크게 꺾인다.

소태후는 상황을 파악한 후, 사람을 보내 송진종에게 평화회담을 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다. 결국 송, 요 두 나라는 송나라가 매년 거란에 백은 10만냥, 견(絹) 20만필을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전쟁을 끝낸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저명한 "전연지맹"이다.

북송의 당시 군사력으로는 요나라와 장기간 대치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전연지맹은 북송이 잠시동안 안정을 준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합의는 북송에게는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송나라는 천조상국(天朝上國)이고, 북송사람들의 눈에 요나라는 그저 오랑캐소국이다. 그런데 어찌 천조상국이 매년 오랑캐소국에 재물을 바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보면, 전연지맹은 송진종의 체면을 상당히 떨어뜨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송진종의 심복인 왕흠약은 송진종의 어가친정을 주장한 재상 구준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왕흠약은 기회를 틈타 전연지맹은 성하지맹(城下之盟, 패배한 측이 굴욕적으로 맺은 화약)이며, 대송의 치욕이라고 진언한다.

그렇다면 이런 치욕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왕흠약이 제안한 방법은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해야만 사해를 누르고 외국에 위세를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산봉선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업적이 탁월한 제왕이 여러 신하를 이끌고 태산의 정상에 올라서 진행하는 제천(祭天)의식이다. 하늘에 공로를 보고하고, 자신의 영명신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전에 모두 5명의 제왕이 태산봉선을 진행했다: 진시황(秦始皇), 한무제(漢武帝), 광무제(光武帝), 당고종(唐高宗)과 당현종(唐玄宗).

사마천(司馬遷)은 <사기.봉선서>에서 제왕이 봉선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즉 태평성세(太平盛世) 혹은 천강상서(天降祥瑞). 이 둘 중 한가지늘 갖추어야 봉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 한무제와 비교하면, 송진종의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슨 자격으로 봉선한단 말인가? 왕흠약은 눈알을 굴린 후, 이런 생각을 한다. 공적은 위조하기 어렵지만, 상서는 조작할 여지가 많다.

정직한 재상 왕단(王旦)의 태도가 우려되었기 때문에, 송진종은 미리 큰 돈을 써서 왕단을 매수한다. 그는 왕단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거하게 대접한 후, 왕단에게 한 단지의 술도 보낸다.

왕단이 집으로 돌아온 후에 살펴보니 술독안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봉선을 위하여 대신까지 매수하다니, 송진종의 이런 조치는 아마도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일일 것이다.

무대는 마련되었고, 응원단도 준비되었다. 이제는 주인공이 등장할 때이다. 1008년 정월 초사흘, 조조(早朝)가 끝났을 때, 황성사(皇城司)의 관리가 돌연 보고한다. 궁성의 좌승천문(左承天門)의 남쪽 귀퉁이에 2장 길이의 황색 비단(黃帛)이 걸려 있는데 그 위에 글자흔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송진종은 머뭇거리면서 신하들에게 말한다. 얼마 전에 그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천신이 그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대중상부(大中祥符)> 천서3권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황색비단이 바로 그 천서를 내려준 것같다고.

미리 뇌물을 받은 왕단은 바로 눈치를 채고 앞장서서 송진종에게 절을 하면서 송진종이 "천서"를 무릎꿇고 받을 것을 청한다. 천서라는 상서가 있으니 봉선을 할 수 있는 기초는 닦은 것이다.

1008년 11월 23일, 송진종 조항은 태산에 봉선한다. 성대한 의식은 앞뒤로 47일간 진행된다.

송진종은 스스로 연출한 극에 완전히 심취했고, 스스로 개인의 정치생애에서 정점을 이루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의 각도에서 돌아보면, 이번 봉선은 남부끄러운 짓이었다.

왜냐하면, 송진종은 진시황, 한무제같은 위대한 업적을 세우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후세의 군주들은 송진종의 이번 봉선사태로 인하여 철저히 봉선의식을 취소시켜버린다. 이는 송진종에 대한 적나라한 풍자라 할 수 있다.

태산봉선은 송진종의 현학(玄學) 놀이의 서막이었다. 그는 스스로 도교신지(道敎神祗)의 조종(祖宗)을 만들어낸다. 조씨의 시조인 조현랑(趙玄朗)이 인황구황(人皇九皇)중 한명이고, 그가 세상에 환생하여 헌원제(軒轅帝)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교의 신학체계에는 아예 '조현랑'이라는 인물이 없다. 여러 신하들은 송진종이 헛소리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일시에 모든 '현랑'이라는 명사는 피휘사(避諱詞)가 되었다.

공자의 봉호인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은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고쳐야만 했고, 궁성의 현무문(玄武門)은 공진문(拱辰門)으로 바꿔야만 했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더 심한 법이다. 각지의 도관과 소위 천사(天師)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오늘은 돌맹이에 글자가 나타나고, 내일은 수많은 새가 하늘을 맴돈다. 관리들은 앞다투어 상서를 보고하니 정말 태평성세가 광림하고 여러 신선이 축하하러 오는 것같았다.

관리들이 이런 일을 할 줄 모르면 관리로서 출세하기 어려웠다.

<송사.진종기>에는 이런 광경에 대하여, "한 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이 미친 것같았다(一國君臣如病狂)"라고 적었다. 1018년에 이르러, 거국적으로 상하에서 10년간 미신활동을 진행한 후에야 겨우 끝이 났다.

모요출현(帽妖出現)

천희2년(1018년) 오월, 북송의 서경(西京)인 낙양의 주민들은 한밤중에 외형이 모자처럼 생긴 요괴를 목격한다. 공중에서 빠르게 비행했고, 그 소문은 금방 전체 낙양성에 퍼져서 인심은 뒤숭숭하게 된다.

이건 무슨 야사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사건은 정사인 <송사.진종기>에 기록되어 있다. 비록 짧은 14자에 불과하지만, 대체로 사건의 전모는 묘사되어 있다.

남송의 사가(史家) 이도(李燾)가 편찬한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鑒長編)>에는 '모요안'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들어 있다: 이 모요(帽妖)는 달이 없고 바람이 센 밤중에 백성의 집으로 날아들어와 견랑(犬狼)으로 변신하여 사람을 경미하게 상처입혔다고 한다.

민중들은 공황에 빠져, 날이 어두워지면 대문과 창을 걸어닫았다. 약간 담이 큰 자는 사람을 끌어모아 병기를 들고 사방으로 모요를 수색하러 다녔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사료의 '모요'에 관한 묘사는 아주 재미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민간전설이건 문학작품이건, 요괴의 모양은 가지각색이다. 다만 '모자'의 형상으로 출현한 것은 북송의 '모요안'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외형은 밀집모자같고, 날아다닐 수 있으며, 주민들이 야간에 볼 수 있다. 이는 그것이 빛을 발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건 UFO 아니야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상, 모요안을 제외하고도, 송나라때는 여러 건의 UFO목격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있다.

예를 들면, 북송의 저명한 문학가 소동파(蘇東坡)가 희녕4년(1071년)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부임할 때, 금산사(金山寺)를 지나게 되었고, 절에서 하룻 밤을 유숙한다. 그리고 후세인들이 여러가지 추측을 하게 만드는 "유금산사(遊金山寺)"라는 시를 남긴다.

그중의 몇 구절은 이러하다: "강심사유거화명(江心似有炬火明), 비염조산서조경(飛焰照山棲鳥驚)"

이경(二更)에 이르러 밤이 깊어 적막했고, 소식은 쉬려고 했는데, 돌연 강 한가운데에서 화염이 나타난다. 밤중이어서 아주 또렸하게 보였고, 이 화염은 날아서 금산을 모두 밝게 비춘다. 그리하여 새집에서 쉬고 있던 새들까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소식은 "비귀비인경하물(非鬼非人竟何物)?"(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말하게 된다.

<송사.오행사>에는 남송 건도6년, 서안의 관당(官塘, 연못)에 높이 1장여의 닭머리에 사람몸을 한 물건이 하늘에서 내려와 대낮에 밭과 들을 걸어다니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려 시도한다. 후세사람들은 이것도 아마 외계인일 것이라고 말한다.

북송의 관리이며 과학애호가인 심괄(沈括)은 <몽계필담(夢溪筆談)>의 권21에서 물 속에서 빛을 내는 물건에 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양주(揚州)지역에 기괴한 큰 구슬이 있는데, 거대한 방각(蚌殼, 조개껍질)안에 있고, 눈부신 빛을 뿜어낸다. 날아가는 것처럼 다니고, 수면위에 떠 있을 수 있다. 이것도 전형적인 USO가 아닌가.

모요안을 되돌아보면, 만일 이것이 단순히 간단한 UFO목격사건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굳이 그 역사배경까지 힘들여 알아볼 필요가 없다. 이 사건의 핵심은 그후에 발생한 일련의 나비효과이다.

가장 먼저 모요가 출몰한 장소는 서경 낙양성이다. 낙양의 최고행정장관은 왕사종(王嗣宗)이다. 그의 최대특징은 미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왕사종은 송태조 개보8년(975년)에 과거에서 장원을 한 인물로, 문장이 뛰어날 뿐아니라, 무술실력도 상당했다.

북송초기에는 장원급제하려면 문장의 수준도 뛰어나야 하지만, 답안을 제출하는 속도도 중시했다. 왕사종과 진식(陳識)은 동시에 답을 완성하였고, 송태조 조광윤이 답안을 살펴보게 된다.

송태조는 두 사람의 문장이 모두 뛰어나 일시에 어느 것을 장원으로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는데, 두 사람에게 싸우게 해서, 싸워서 이긴 사람을 장원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진식은 무슨 일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왕사종은 이미 소매를 떨치고 싸울 준비를 했다. 결국 진식은 왕사종에게 맞아 땅바닥에 쓰러졌고, 왕사종이 순조롭게 그 해의 장원이 된 것이다.

당시의 문인협객들중 적지 않은 사람은 왕사종의 그런 거친 행동을 멸시하여, 그를 "수박장원(手搏狀元)"이라고 부르며 놀렸다.

성격이 강직하고 고집이 있어, 왕사종은 우귀사신같은 것들을 가장 멸시했다.

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記聞)>에 따르면, 한번은 왕사종이 병에 들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종이돈을 불태워 그의 쾌유를 위해 귀신에게 그를 보우하여 하루빨리 회복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왕사종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무슨 귀신이 감히 우리 왕씨집안의 돈을 받아간단 말인가? 왕사종의 눈에, 병이 나면 약을 먹어아지 귀신에게 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사료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일찌기 왕사종이 빈주지주(邠州知州)로 있을 때, 현지의 호왕묘(狐王廟)에 호왕(狐王)을 모시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현지의 평민백성이건 아니면 글읽는 선비든 모두 호왕의 신통력이 대단하다고 믿고 있었다. 신임관리가 일단 빈주에 들어오면, 호왕묘로 가서 경건하게 절을 하지 않으면, 향후 관운이 좋지 않고, 재액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가벼우면 승진길이 막히는 것이고, 심하면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사종은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호왕묘를 철거하고, 호리와(狐狸窩)를 불태운다. 이렇게 하여 신통력이 있다고 전해지는 호리 수십마리를 죽여버린다.

그런 조치에 현지 백성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 그들은 왕사종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왕사종은 여전히 멀쩡했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건강해 보였다. 그후 빈주 현지의 미신활동은 급격히 감소한다.

지금 낙양성을 통치하고 있는데, 왕사종은 성내에 모요에 관한 소문이 돌자 콧방귀를 꼈다. 그는 그런 황당무계한 소문은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시간만 흐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즉, 왕사종은 이 사건에 대하여 방임하며 신경쓰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사종이 모요안을 너무 경시한 것이다. 혹은 모요안 배후의 군중들의 영향력을 너무 낮게 평가했던 것이다.

송나라의 백성들은 오늘날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팔괘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각종 소보(小報, 찌라시)가 만들어졌다.

송나라때의 소보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비관방 신문이다. 그 시작은 북송이고, 남송때 성행한다. 전문적으로 백성들이 관심을 가지는 시사뉴스를 실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속보가 중요했고, 진실성은 그다지 따지지 않았다.

'모요'와 같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뉴스는 자연스럽게 소보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는 핫이슈가 된다. 이렇게 점차 사건이 발효되면서, 서경 낙양에서 동경 변량에까지 전해진다. 결국은 삼경(三京)을 뒤흔들고, 관가(官家, 송나라때 황제를 부르는 명칭)까지도 뒤흔들게 된다.

삼경공황(三京恐慌)

"유언비어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왕사종은 '모요안'과 관련된 사항을 조정에 전혀 보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왕사종은 보고하지 않았지만, 다른 관리들까지도 모두 그와 같이 굳건한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오월 이십오일, 하남삼성절도사(河南三城節度使) 장민(張旻)이 서경 낙양의 '모요소문'을 송진종에게 보고한다. 하남삼성절도사는 태행산이남, 황하고도이북 그리고 황하남안의 일부지역을 관할했고, 낙양의 업무에 대해 책임지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낙양에 사건이 터졌는데, 낙양의 관리는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오히려 정주(鄭州)를 관할하는 관리가 그 사실을 보고한 것이다.

이 해는 송진종이 태산봉정을 한 때로부터 꼬박 10년이 되는 해였다. 장민은 송진종이 천서상서(天書祥瑞)에 열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꺼리는 것은 재이(灾異)에 관한 소문이었다.

과연, 송진종은 상소를 읽자마자 즉시 어사(御史) 여언(呂言)을 서경 낙양으로 보내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시킨다. 동시에 왕사종에게 사정이 이렇게 엄중한데 왜 보고하지 않았는지 질책한다.

여언이 낙양에 도착한 후, 왕사종은 그의 모든 일정에 동행했다.

여언은 민간에서 시끄러운 모요안에 대하여 일찌감치 들은 바가 있었고, 마음 속으로 의문이 충만했다. 그러나 왕사종은 확신을 가지고 여언에게 말했다. 모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민중들이 소문을 전하면서 와전된 것일 뿐이라고.

여대인이 만일 믿지 못하겠으면 낙양의 민간에 깊이 들어가 직접 조사해보시고 진위를 판별하시면 될 것이라고. 괴이하게도 여언이 낙양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 소문의 모요는 마치 무슨 밀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언은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설마 모요안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런 근거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럼 자신은 이번에 헛걸음만 한 것이다.

그는 낙양성의 민심을 다독이고나서, 경사 변량으로 돌아가서 보고하고자 마음먹는다.

송나라가 건립되었을 때, 오대(五代)의 제도를 이어받아 천하에 사경(四京)을 두었다.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는 변량이고 북송의 수도이다; 낙양하남부(洛陽河南府)는 서경이다. 그외에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는 오늘날의 하남 상구(商丘)이고, 북경대명부(北京大名府)는 지금의 하북 한단(邯鄲)의 대명현(大名縣)이다.

여언이 변량으로 되돌아오자마자, 소문 속의 모요가 그를 따라 천자가 살고 있는 변량에 출현한다.

변량의 소보에서는 더더욱 크게 쓴다. 모요가 이미 경사로 왔을 뿐아니라, 모요의 위력도 낙양성에서는 '사람을 약간 다치게 할' 정도였는데, 이제 변량에서는 '민가에 들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

변량성의 백성들은 매일 아침 일찍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소보를 사거 모요에 관한 뉴스를 보는 것이었다. 일시에 소보의 판매량을 급증하고, 출판상은 큰 돈을 번다.

오늘 누군가 모요가 이웃집으로 들어가서 일가족을 모조리 먹어치웠다고 말하고; 내일은 누군가가 어젯밤에 모요가 그의 집을 방문하였고, 그의 일가족이 힘껏 소리치고, 죽어라 동분(銅盆)을 때려서 모요를 쫓아냈다고 말한다.

일설에 따르면 시끄러운 소리는 사람을 잡아먹는 이 괴물을 쫓아낼 수 있다고 했다. 변량의 백성들은 속속 종족을 단위로, 밤이 되면 길거리로 나와 밤새도록 북과 징을 쳤다.

소문은 마찬가지로 경성의 금군(禁軍)에게도 퍼진다. 그들의 반응은 변량성의 일반백성들보다 더욱 격렬했다. 밤이 되면, 그들은 무기를 들고 함께 모여서 소리친다. 그렇게 되니 송진종은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처럼 군대에서 무기를 들고 모여있는 사태는 사회의 안전에 큰 우려사항이다.

<수호전>의 임충(林冲)은 송나라말기 팔십만금군교두이다. 비록 <수호전>이 소설이기는 하지만, 송진종시기에, 금군의 불필요한 인원은 후기처럼 심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송진종이 천서, 상서를 미신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말이 있다: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祥瑞)가 있다; 나라가 망하려면 반드시 요얼(妖孼)이 있다." 만일 백성들과 병사들도 모두 이번 모요를 천강이상(天降異象, 하늘에서 내려준 이상현상)이라고 여겨, 세간의 천자가 무도하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정말 무슨 "창천이사(蒼天已死), 황천당립(黃天當立)"같은 반란사건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렇게 되면 송진종은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점까지 생각하니, 용상의 송진종은 정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신속하게 낙양 현지의 여러 관리를 조치하고, 현지의 전운사(轉運使), 제점형옥사(提點刑獄司)등에 대해서도 책임을 추궁하고, 왕사종은 불찰지죄(不察之罪)로 섬주지주(陝州知州)로 좌천당한다.

확실히, 왕사종이 미신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개인의 각도에서 평가하자면 칭찬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보살펴야하는 부모관으로서, 국면을 다독이고 통제하지 않아, 공황정서가 만연하게 만든 점에 대하여는 그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낙양의 관리들을 문책하는 외에, 다른 한편으로 송진종은 제단을 설치하여 법사를 행한다. "이현제현(以玄制玄)". 초자연적인 역량으로 이런 초자연적인 재난을 억누르려는 것이다.

그러나 법사의 효과는 예상처럼 좋지 않았다. 백성들이 이를 보고는 황제까지도 제단을 만들어 법사를 벌이는데, 이를 보면 모요는 분명히 진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소문은 더욱 미친 듯이 퍼져나간다.

조급해진 송진종은 아예 현상령까지 내려서, 주민들에게 모요의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을 고발하게 하고, 소문을 퍼트리는 자를 처벌했다.

상금이 크면 용기있는 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금방 백성들은 조정에 화상(和尙) 천상(天賞), 도사(道士) 경개(耿槪), 장강(張崗)을 고발한다.

고발자들에 따르면, 이 세 사람은 행적이 궤이하고, 무술(巫術)을 쓸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언비어를 퍼트리는데 적격이라는 것이다. 송진종은 그 자리에서 기거사인(起居舍人) 여이간(呂夷簡)과 심복환관 주회정(周懷政)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심리하게 한다.

여이간은 나중에 재상이 되는 인물로 일처리가 아주 깔끔했다. 조사를 거쳐, 이 몇명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민간에서 널리 제자를 끌어모으고, 요사한 이야기를 전파했다.

여이간, 주회정의 심문으로 이 세 사람은 장자원(張子元)이라는 산인(散人)이 같이 참여했다고 자백한다.

<송조제신주의(宋朝諸臣奏議)>의 기록에 따르면, 이번 고발사건으로 인하여 최종적으로 6명이 길거리에서 참수당한다. 동시에 몇 사람은 유배를 보낸다.

다만 사건조사과정에서, 여이간등은 발견했다. 이들이 비록 아주 나쁜 놈들이기는 하지만, 모요안에 대하여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치 배후에 더욱 깊은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듯했다.

송ㅇ진종의 현상령은 이때 이미 변량성내에서 "전민엽요행동(全民獵妖行動)"이 나오게 만들었다. 백성들은 원래 모요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무서웠는데, 이제는 오히려 모요의 유언비어를 퍼트린다고 관청에 붙잡혀 죽을까봐 겁을 내게 된 것이다.

간관(諫官) 유욱(劉煜)은 민심이 미묘하게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또 다른 예상못한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여겨, 송진종에게 모요안과 관련한 추가적인 조사는 중단해줄 것을 청한다.

송진종은 유욱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늘 이전에 죄를 범한 자는 모두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전에 모요에 관해 소문을 퍼트린 자들에 대하여는 향후 다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불문에 부치겠다는 것이다. 변량의 백성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경낙양과 동경변량을 뒤집어 놓은 후에, 모요공황은 남경응천부로 옮겨간다. 당시 응천부의 1인자는 '연중삼원(連中三元)', 즉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에서 모두 1등을 차지한 바 있는 왕증(王曾)이었다.

왕사종이나 송진종과 비교하면, 왕증의 모요를 대하는 수단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도록 방치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붙잡아 죽이지도 않았다.

그는 먼저 전체 백성들에게 밤에는 반드시 열어 둘 것을 명령한다. 어쨌든 아무도 모요를 보지 못했으니, 차라리 우리가 문을 열고 그를 맞이하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왕증은 아문순라대(衙門巡邏隊)를 조직하여, 잠에는 성안의 치안을 유지하여, 백성들이 안심하게 했다.

다음으로, 만일 누군가 모요가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잡아먹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면, 즉시 붙잡아 들여서 상세한 경위를 물어본다. 시간, 장소, 인물, 발생과정등등 하나하나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진술을 다 하고 나면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고난 후에야 비로소 떠날 수 있었다.

만일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면, "조용요서요언죄(造用妖書妖言罪)"로 처벌했다. 이는 북송에서는 큰 죄명이었다. 유언비어로 3명이상을 고혹시키면 교형(絞刑)에 처하게 되고, 가장 가벼운 요언죄도 곤장 60대였다.

누구든지 전파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렇게 조치를 취하게 되니, 응천부의 모요에 관한 유언비어는 사라지게 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민심이 안정되고, 요괴에 대한 소문이 그쳤다"

왕증은 나중에 고속승진하여 부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다만 왕증은 응천부의 민심은 다독였지만, 천자의 발아래에 있는 변량성의 국면은 구해줄 수가 없었다. 결국 송진종은 다시 제단을 만들어 제사지낸다. 그리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는 모조리 처형했다. 왕증은 황제가 하는 일에 뭐라고 할 수는 없었고, 그저 송진종이 하는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요공황이 사라지기도 전에, 변량성의 하늘에는 시의에 아주 부적절하게 소파성(掃把星)이 나타난다. 이건 문무백관과 전체백성들이 모두 보게 된 대흉지조(大凶之兆)였다. 송진종은 좌불안석이 된다.

천강이상(天降異象)

모요안은 천희2년 오월에 발생하고, 육월에 극성을 부린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모요소문이 삼경을 뒤흔들고 있을 때 혜성(慧星)이 돌현 출현했다.

하늘의 이상현상과 인간의 괴이한 현상이 미묘하게도 연결된 것이다.

<송사.천문지>의 기록에 따르면, 천희2년 육월 신해일, 북두칠성의 두괴제이성(斗魁第二星) 즉 천선성(天璇星)의 동북쪽에 길이 3자의 혜성이 출현하여 북쪽을 가로질러 직선이동했다.

혜성은 고대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했다. 길다란 혜성의 꼬리때문에 "소파성"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일찌기 전국시대에 쓰여진 <좌전(左傳)>에는 "하늘에 혜성이 나타난 것은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면, 하늘이 사회질서에 위해를 가하는 악의 세력을 청소한다는 것을 대표한다. 매번 혜성이 나타나면, 통치자들은 경각심을 가지고 중시하거나 정국을 정돈한다. 혹은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 혜성이 예시한 재난국면을 막고자 한다.

이번의 혜성은 모요의 공황에 더해져서 송진종은 한시도 늦출 수가 없었다. 즉시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유배이하의 모든 범죄자들을 사면해준다. 사형은 1등을 감하여 처벌했다. 이를 통해 은혜와 인덕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십악(十惡)에 혹사는 범죄는 여전히 율법대로 처벌했다.

재미있는 점이라면, 이번 특사령에서는 특별히 "조요혹중자(造妖惑衆者), 논여률(論如律)" 즉 요사한 유언비어로 혹세무민한 자들은 특사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송진종은 이번 사면령으로 모요안의 영향범위가 더욱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 한 것같다.

그러나,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지만, 혜성은 여전히 하늘에서 빛을 내고 있었고, 37일간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송진종은 마음이 더욱 조급해져서 대신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본다. 구준, 향민중(向敏中), 왕단등의 노신은 송진종에게 하루빨리 황태자를 세서 조정국면을 안정시키라고 진언한다.

당시 송신종은 이미 나이 50을 넘겼을 때이다. 고대에는 이미 고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말년에 송진종은 자주 몸이 좋지 않아서, 걸핏하면 실수를 했다. 그리하여 많은 정무는 황후인 유아(劉娥)가 대신 처리했다.

이는 조씨집안에 충성하는 노신들에게는 가시가 등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芒刺在背),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천하가 암탉이 우는 상태가 되면 조송강산의 사직에 불리하게 될 것이다.

송진종 조항은 원래 아들이 6명이었는데, 그중 5명이 요절하고, 모요안이 발생했을 때에는 오직 아들 1명 조수익(趙受益)만이 살아있었다.

이치대로라면 그가 황태자에 오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후세인들의 추측에 따르면, 송진종이 황태자를 세우는 일을 늦춰온 것은 아마도 황후 유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유아는 조수익의 명목상의 모후(母后)이지만 생모는 아니다. 조수익의 생모는 서비(庶妃) 이씨(李氏)이다. 즉, 이신비(李晨妃)이다.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의 민간이야기는 바로 이와 관련된 역사이다.

<송사.후비전>에 따르면, 송진종의 두번째 황후 곽씨(郭氏)가 사망한 후, 그는 유덕비(劉德妃) 유아를 황후로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유아는 출신이 비천하고 자식도 없었다. 그리하여 대신들이 반대했다.

그리하여, 송진종은 유덕비의 곁에 시녀 이씨가 낳은 아들 조수익을 유덕비에게 넘겨주고, 그리하여 유덕비는 순조롭게 황후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이묘환태자"의 민간이야기와 다른 점이라면, 송진종이 살아있을 때, 이씨의 품계는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정이품(正二品) 완의(婉儀)였고, 송진종과의 사이에 낳은 공주가 있었다. 그리고 냉궁(冷宮)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송진종이 죽은 후, 이씨는 임종전에, 당시 이미 황태후가 된 유아가 그녀를 신비로 승격시켜준다. 이를 보면, 송진종과 유아는 조수익의 생모를 박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아는 송진종이 평생 사랑했던 여인이다. 송진종의 비빈이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적이 있었다. 이는 고대 제왕에게서는 보기 힘든 경우이다.

비록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유아는 송진종과의 사이에 자식을 전혀 낳지 못했다. 송진종이 말년까지도 황태자를 세우는 것을 미룬 이유는 유아때문이 아니었을까

후세의 유아에 대한 평가는 포대어폄(褒大於貶, 좋게 평가하는 것이 나쁘게 평가하는 것보다 많다)이다. 그녀에 대하여 "유여무지재(有呂武之才), 각무여무지악(却無呂武之惡)"(여후, 무측천의 재능을 가졌지만, 여후, 무척천의 나쁜 점은 가지지 않았다)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말년의 유아는 일찌기 천자의 곤면(袞冕, 곤룡포와 면류관)을 입고 태묘에 제사지냈다.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용포를 입었지만 황제를 칭하지 않은 여인이다. 그녀에게 아무런 야심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시간을 다시 천희연간으로 되돌리면, 모요와 혜성의 연이은 출현은 송진종의 내심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오주지주(梧州知州) 진집중(陳執中)이 <연요(演要)> 3편의 상소를 올려, 천하의 근본을 일찌감치 확정하는 것을 논점으로 하여 황태자를 세우는 것과 당금의 모요, 혜성의 관계를 얘기한 후에 송진종은 약간 안도한다.

그리하여 천희2년(1018년) 중추절에 허세(虛歲) 9살의 조수익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조정(趙禎)이라는 이름을 내린다. 그가 바로 나중에 "인종성치(仁宗盛治)"를 이루고, "성명유도당우세(聖明有道唐虞世), 일월무사천지춘(日月無私天地春)"으로 칭송받는 송인종(宋仁宗)이다.(唐虞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즉 요임금과 순임금을 가리킴).

그런데, 후계자를 세운지 1년이 지난 후인 천희3년(1019년) 북송의 하늘에 다시 한번 이상현상이 나타난다. 흠천감(欽天監)에서는 태백주현(太白晝現)이 일어났다고 보고한 것이다(태백성 즉 금성이 낮에 나타난 것으로 이는 대란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구준을 위시한 노신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태백성이 대낮에 출현한 것은 여주(女主)가 창성할 상이니 송진종에게 "태자감국(太子監國)"을 허용해달라고 청하고, 송진종도 동의한다.

구준이 이렇게 진언한 목적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바로 황후 유아 일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송사.구준전>에 따르면, 구준은 일찌기 궁으로 들어가 송진종과 밀담을 나눈다. 그는 송진종에게 방정지신(方正之臣)를 골라 태자감국을 보좌하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특별히 정위(丁謂)와 전유연(錢惟演)은 간신이니 어린 태자를 보좌하도록 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위와 전유연은 황후 유아 일파의 일당이었다. 구준의 이 말은 겉으로는 정위, 전유연을 폄훼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함사사영(含沙射影)으로 후궁이 조정에 간섭할 수 없다는 취지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송진종은 구준의 건의를 받아들였는데, 그후에 스스로 만족해하던 구준이 한번은 술에 취하여 실수로 자신이 송진종에게 아뢰어 송진종의 윤허를 받은 사실을 토로하고 만다.

황후 유아가 그 일을 알고난 후에 가만히 송진종에게 배겟머리송사를 해서 구준을 재상에서 파면하고, 태자태부로 강등시킨다. 네가 방정지신으로 하여금 태자를 보좌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럼 네가 직접 해라. 전제는 너는 더 이상 재상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준이 재상에서 쫓겨난 후, 정위가 조정을 주재한다. 유아는 이제 마음놓고 잠들 수 있었다. 그라나 송진종의 심복환관 주회정(周懷政)은 구준과 사이가 좋았었고, 그리하여 정위 일당의 타격대상이 된다.

마음이 조급해진 주회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변을 일으키기로 한다. 그는 직접 황태자 조정을 옹립하여 등극시키고, 송진종을 태상황으로 모시고, 유아를 황후에서 폐위시키고, 다시 구준을 모셔와서 재상의 직무를 맡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 주회정 진영의 두 명이 돌연 배신하고, 소식을 정위에게 누설한다. 결국 이번 정변은 시작하기도 전에 진압당한다.

주회정은 피살되고, 구준은 다시 한번 좌천되어 안주(安州)로 유배를 간다. 구준이 다시 한번 좌천당한 것에 대하여 송진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지 못했다. 사건발생후, 그는 단지 주회정만 처분하려고 했지, 노신 구준까지 연루시키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송진종은 근시(近侍)에게 물어서 왜 요즘 구준이 보이지 않느냐고 하지만, 근시는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임종전에 송진종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구준과 이적(李迪)은 어린 황태자를 보좌할만한 대신들이다.

1022년, 송진종이 붕어하고, 유아는 어린 군주 조정을 등극시키고, 11년에 걸친 수렴청정의 생애를 연다.

<송사>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유아가 직접 발탁한 명신 노종도(魯宗道)에게 이렇게 묻는다: 무측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노종도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유아가 이렇게 묻는 의도는 아주 명백하다: 내가 만일 황제에 오른다면, 천하인들이 어떻게 나를 볼 것인가? 노종도는 4글자로 대답했다: "당지죄인(唐之罪人)"

바로 그 네 글자는 유아의 마음 속에 싹트던 생각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현재는 자신이 천하를 주재하고 있지만, 천하는 어쨌든 조정의 것이다. 조씨집안의 것이다. 어쨌든 유씨집안의 것은 아니다.

유아는 대송이라는 회사에서 그저 CEO에 불과하다. 영원히 황위를 노릴 수는 없는 것이다.

1033년 이월, 유태후는 스스로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임종전에 필생의 바램을 만족시킨다. 그녀는 곤룡포와 면류관을 쓰고 태묘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의식에서, 유태후는 신하들이 자신에게 바친 존호를 받는다: 응천제성현공숭덕자인보후황태후(應天齊聖顯功崇德慈仁保壽皇太后). 그 후 그녀는 권한을 송인종에게 철저히 물려준다. 1개월여후에 유태후는 서거한다.

다시 되돌아가서 모요안을 당시의 복잡한 정치환경속에서 다시 살펴보면, 처음에 모요의 출현은 정말 우연히 발생한 UFO목격사건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대규모로 공황정서이 만연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노신들이 고농현허(故弄玄虛)하면서 송진종에게 경계심을 갖게 하려는 것이고, 나중에 일어난 혜성사건도 더더욱 하늘이 도운 것이다; 아마도 역사의 은밀한 곳에 숨어있는 어느 권신 혹은 사교의 교주가 혼란을 틈타 공황상태를 만들고 그 와중에 이익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를 만든 인물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히 송진종이 미신을 믿는다는 점과 호대희공(好大喜功)하는 특징을 잘 파악했던 것이다.

"천인감응(天人感應)"이 사회와 정치에 의미를 부여한 후에는 그것은 통치자가 수중의 권력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 뿐아니라, 조정신하들이 제왕의 행위를 속박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를 보면, 자고이래로 여론의 역량은 항상 양날의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