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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석륵(石勒)": 노예에서 황제까지, 중국역사상 유일한 인물

by 중은우시 2025. 2. 20.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왕연(王衍)과 석륵(石勒)이 처음으로 서로 스쳐지나쳤는데, 하마터면 역사가 바뀔 뻔했다.

그때는 진무제(晋武帝) 태강9년(288년)의 평범한 어느 날이었고, 15살짜리 석륵은 마을의 부자 곽경(郭敬)을 따라 낙양(洛陽)으로 말을 팔기 위해 갔다.

당시 그의 이름은 석륵이 아니었다. 서진(西晋) 초기, 새외(塞外)지역은 가뭄과 장마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살기 어려워진 갈족(羯族)은 큰 강물을 따라 내려와 병주(幷州)일대로 옮겨올 수밖에 없었다. 석륵의 일가도 그러했다. 비록 그는 갈족 부락의 우두머리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석륵은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다. 부르기 편하도록, 집안사람들은 그에게 아명을 지어주었는데 매일 "아배(阿㔨)"라고 불렸다.

갈족의 힘들기 그지없는 생활환경과 비교하여, 그때의 도성 낙양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진무제 전기의 여정도치(勵精圖治)를 거쳐, 진나라는 천하통일을 이룩하였으며, 낙양성은 당시 세계에서 보기 드문 대도시였다. 매일 사방에서 몰려오는 상인들이 이곳에 모여서 물건을 사고 팔았다.

석륵등이 낙양성으로 들어온 후, 당시 사도(司徒)를 맡고 있던 왕연은 겨우 시간을 내어 낙양성내의 거리를 다니고 있었다.

빠른 시간내에 물건을 팔고 곽경에게 돈을 조금 받아서 떡이라도 사먹을 생각에 석륵은 성내로 들어가자 마자 힘껏 소리치면서 그가 데려온 준마를 팔았다.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호기심이 많은 백성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아니라, 수레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던 왕연의 관심도 끌게 된다.

왕연은 낭야왕씨(琅琊王氏) 출신의 청담명사(淸談名士)였다. 또한 "죽림칠현(竹林七賢)"중 한명인 왕융(王戎)의 당제(堂弟)이기도 했다. 아마도 평소에 계강(稽康), 완적(阮籍)등과 깊이 교류해서인지, 왕연은 석륵의 목소리에서 '탄금부장소(彈琴復長嘯,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조린다)'의 분세질속(憤世疾俗)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왕연은 이 오랑캐소년이 나중에 천하를 뒤흔들 풍운아가 될 것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왕연은 석륵의 존재가 서진왕조의 통치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리하여 왕연은 그의 목소리가 너무 멀어지기 전에 사람을 시켜 그를 쫓아가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하여 후환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왕연의 병사가 목소리를 따라 추격할 때, 석륵은 이미 행방이 묘연했다. 이들 병사들은 그저 다시 돌아와 왕연에게 찾지 못했다고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왕연은 이에 자신의 미래를 속으로 걱정하기 시작한다.

나중의 역사는 증명한다. 왕연의 안목은 확실히 독랄했다. "아배"가 말을 팔고나서 23년후에 석륵은 결국 서진왕조의 대문을 깨부수고, 왕연의 목숨을 거둔다.

석륵문도도(石勒問道圖)

1

말을 팔고 돌아오고나서 석륵은 고용주인 곽경 집안의 가장 충성스러운 소작농(佃農)으로 살아간다.

당시, 호인(胡人)들은 중원에서 지위가 보편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곽경이 석륵을 학대하지는 않았다. 곽경은 태원곽씨(太原郭氏) 집안이라는 사족(士族) 출신이었고, 집안에 밭과 재산이 많았다. 평소에는 석륵등 몇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관리했다. 석륵은 이 시기에 비교적 힘들게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안정된 생활이었다.

석륵의 감각과 청각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곽경의 집안에서 농사를 지을 때, 그는 자주 귓가에 북을 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피가 끓었다. 석륵은 그런 느낌이 익숙하지 않아서, 항상 가족들에게 주위가 너무 시끄럽다고 불평했으며, 심지어 스스로가 괴물이 아닌가 여기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그의 모친은 항상 아들을 다독여주었다. "아배는 어려서부터 배가 고프면 환청을 듣는다. 아배는 착한 아이이다."

모친의 말이 석륵을 안심시켜주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석륵이 낙양에서 말을 팔고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진다.

태희원년(290년), 진무제가 붕어하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물은 바보로 유명한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이었다. 진혜제는 비록 멍청했지만, 마음이 나쁘지는 않았다. 황제로서 조정의 국면을 장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황후인 가남풍(賈南風)이 그를 대신하여 천하를 호령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사마씨 종실왕들의 불만을 산다. 나중에 가남풍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황태자 사마휼(司馬遹)을 폐위시키고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러자 서진의 여러 왕과 후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태자의 복수를 명목으로 들고 일어나,"팔왕지란(八王之亂)"이 천하를 석권한다.

"팔왕지란"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병주일대에서는 역사상 보기 드문 대기근이 발생한다.

살아남기 위하여, 석륵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전농들과 함께 외지로 도망쳐서 살길을 찾게 된다. 그러나 천하가 대혼란에 빠져 있다보니 도처에서 군인들이 미친듯이 호인을 붙잡아서 끌고가 암시장에서 매매하여 돈을 챙겼다.

도망길에 석륵은 옛날의 주인 곽경을 만난다. 곽경은 석륵에 대해 동정을 표시하면서 석륵에게 2차취업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석륵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있었다. 그는 군인들의 인신매매를 배워서 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갈족 내에서 명망이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갈족을 기주(冀州)로 유인한 후, 팔아넘겼다. 이유는 그곳은 물산이 풍부하여, 갈족이 팔려간 후에도 지주집안의 농노(農奴)가 되면, 가뭄때의 소작농보다는 살기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석륵이 인신매매계획을 시행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인신매매된다.

석륵을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은 병주자사(幷州刺史) 사마등(司馬騰)의 부하인 염수(閻粹)였다. 염수가 하는 일은 관청이 인정한 "인구운송"업무였다. 호인을 붙잡아 산동으로 가서 판매하여 식량과 바꾸는 일이었다. 석륵등 붙잡은 호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염수는 특별히 큰 칼(大伽)을 준비하여 2인1조로 칼을 차고 걸어가게 했다.

다행히 곽경의 형인 곽양(郭陽)도 이번 호노(胡奴)의 압송업무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관계를 통하여 석륵은 도중에 여러 편의를 받게 되고, 최종적으로 기주 평원군 임평현(荏平縣)(지금의 산동성 요성시 임평구)에 자리잡고, 지주 사환(師驩)의 가장 가치있는 농노가 된다.

일반인이 농노로 전락하였다면, 더 이상 앞날에 희망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바닥에서 석륵은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석륵의 남다른 용모때문인지는 몰라도, 사환은 석륵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스스로 석륵의 농노신분을 풀어주고, 그를 부근의 양마장(養馬場)에 소개하여 일하게 한다. 그곳에서 석륵은 자신의 첫번째 파트너를 만나게 된다. 급상(汲桑)

이때의 급상은 겨우 이 목마장(牧馬場)의 목수(牧帥)에 불과했지만, 사서 기록에 따르면, 그의 능력은 석륵과 난형난제이다. "힘이 세서 백균(百鈞)의 무게를 들 수 있고, 몇 리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어서, 당시 사람들이 탄복했다" 아마도 서로 기질이 비슷해서인지, 석륵과 급상은 금방 서로 형제를 칭하게 된다.

급상의 추천으로 석륵은 다시 자신과 경력이 유사한 왕양(王陽), 기안(夔安), 지웅(支雄), 기보(冀保), 오예(吳豫)등 8명을 만나서 첫번째 소부대 "팔기(八騎)"를 조직한다. 급상의 목마방의 자원을 가지고 임평 일대에서 약탈을 하면서 지낸다.

"팔기"는 금방 명성을 떨친다. 나중에 곽오(郭敖), 유징(劉徵), 유보(劉寶), 장에복(張曀僕), 호연막(呼延莫)등 10명이 석륵의 대오에 가담하면서 이들은 "십팔기"라고 칭하는 토비(土匪)가 된다. 이때부터 사서에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2

이와 동시에 "팔왕지란"은 갈수록 혼란에 빠진다. 304년, 이미 황태제(皇太弟)에 오른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그의 부장(部將) 공사번(公師藩)은 주공을 구하기 위하여, 특별히 청하군(淸河郡)에서 거병하여 사마영을 맞아 다시 재기를 꿈꾸고자 한다.

이때, 석륵, 급상등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단순히 약탈만으로는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공사번이 평원군에서 병력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급상과 석륵은 "십팔기"를 이끌고 참가하여 "보가종용(保駕從龍)"의 대업을 성사시키고자 한다. 참가하기 전에 급상은 '아배'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석륵(石勒). 이때부터 이 이름은 십육국(十六國)의 풍운 속에서 들으면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름이 된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의 계산은 틀렸다.

"십팔기"가 참가하기로 선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병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명장 구희(苟晞)에게 죽임을 당한다. 급상, 석륵은 이로 인하여 관청의 지명수배범이 되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제1차시도는 실패했다. 그래도 석륵과 급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평원군으로 되돌아온 후, 그들은 각자의 사회관계를 이용하여 서서히 만명이 넘는 토비대부대로 발전시킨다. 다른 사람에 의존하는 것이 안되면, 우리가 독자적으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급상과 석륵은 첫 시험을 진행한다.

영가원년(307년), 급상은 임평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내건 기치는 사마영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대장군을 칭하고, 석륵은 소로장군(掃虜將軍)이 되어 부근의 군현을 공격하고, 죄수를 풀어주어, 병력을 보강한다.

이때, 서진의 조정은 이미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마월은 사람됨이 악랄하여, 진혜제의 지능수준이 가뭄이 들었을 때, "왜 고기를 먹지 않지?"라고 할 수준인 것을 알고 진혜제에게 "맥병(麥餠)"을 보내 독살한다. 진혜제가 죽은 후, 황태제 사마치(司馬熾)가 즉위하니, 그가 진회제(晋懷帝)이다. 진회제는 정치투쟁을 싫어했기 때문에 등극후, 국가대사는 사마월에게 맡겨버린다.

급상등이 병주, 기주 일대에서 폭동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사마월은 즉시 자신의 동생 사마등으로 하여금 명장 구희와 함께 대군을 조직하여 소탕에 나서도록 명한다. 그리고 급상, 석륵은 자신의 상대가 옛날의 원수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 속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생각지도 않고 사마등이 있는 업성(鄴城)으로 돌격한다.

사마등은 스스로 병주를 여러 해동안 경략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며, 이전에 대규모의 호인인신매매활동도 조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급상, 석륵을 상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석륵쪽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사마등은 집안에서 편안히 먹고 마시고 놀면서 전혀 목숨을 걸고 성을 수비해야하는 장수로 보이지않는 행동을 했다. 결과는 생각해보면 바로 알 것이다. 사마등은 목이 잘리고, 업성은 함락당한다. 석륵은 이렇게 하여 그의 군사생애에서 첫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후, 급상과 석륵은 창끝을 일찌기 공사번을 대패시킨 바 있는 구희로 향한다. 다만, 이 전투에서 전과를 확대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급상의 목숨까지 잃게 된다. 만명에 이르던 대부대는 어느 순간 최초의 '십팔기'로 쪼그라든다.

3

석륵은 강렬한 좌절감에 휩싸인다. 이때 그는 마침내 깨닫는다. 자신이 실패를 하게 된 것은 "십팔기"에게 거대한 목표와 강령이 없었기 때문에, 손쉽게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한 후에 그는 부대를 이끌고 한왕(漢王) 유연(劉淵)에게 간다.

유연은 원래 흉노귀족이고, 일찌기 진(晋)나라에서 괸리로 있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문무를 겸비하고, 팔힘이 남달라서" 진무제등 진나라 권력귀족들의 환심을 산다. 다만 진나라사람들은 '호한불양립(胡漢不兩立, 오랑캐와 한족은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서, 진무제가 죽은 후, 유연은 조정의 탄압과 배척을 받는다. 그리하여 "팔왕지란"이 발발하자, 유연은 그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다.

304년, 유연은 이석(離石, 지금의 산서성 여량시 이석구)에서 스스로 한왕에 오른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한인이든 호인이건 한(漢)나라에 대하여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존경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성을 유(劉)로 고치고, 자칭 유선(劉禪)의 후손이라고 하여, '유황손(劉皇孫)'으로 자처한다.

그런 책략은 성공적이었다. 그가 한왕을 칭한 다음 해부터, 대강남북의 여러 문인과 백성들이 그의 '한(漢)'이라는 기치 아래 몰려든다. 석륵을 제외하고도, 청주(靑州), 서주(徐州)일대에서 활동하던 왕미(王彌), 상군(上郡)에서 활동하던 탁발선비(拓拔鮮卑)도 한왕 유연의 신하가 된다.

이들 중에서 유연이 가장 높이 평가한 사람은 왕미와 석륵이다. 왕미는 유연과는 옛날부터 알고 지냈고, 석륵은 그의 지모로 유연이 괄목상대하게 만들었다.

당시에 장복리도(張伏利度)라는 오환(烏桓)의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자신의 무리가 많다는 것을 믿고 유연의 휘하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이로 인하여 유연은 머리가 아팠다. 석륵은 그 사실을 알고, 이것이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라 여긴다. 그는 유연에게 잘못을 저질러 쫓겨난 것처럼 가장하여, 장복리도에게 가서 '투항'한다. 장복리도는 그것이 계책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석륵을 형제로 대하고, 그에 대하여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 술에 취했을 때, 석륵은 장복리도를 체포하고, 그의 수하들을 압박하여 유연에게 투항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하여, 석륵은 유연에게 인정을 받아, 짧은 1년만에, 유연의 휘하에서 가장 신임받는 장수가 된다. 그는 평진왕(平晋王), 도독산동제군사(都督山東諸軍事)가 되어 노예에서 장군으로의 신분상의 변신을 완성하게 된다.

4

오랫동안 하층에서 살아오면서 석륵은 위진시대의 사대부계층에 대한 원한이 쌓여있었다. 그가 군대를 장악한 장군이 된 후, 상산(常山), 거록(巨鹿)등의 군을 정벌할 때 "성을 함락시키되 그 성을 지배하지 않고, 지방을 약탈하되 그 땅을 갖지 않는다. 순식간에 모였다가 순식간에 흩어진다"는 전격전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리고 사족을 도륙하고 약탈하는 것을 전술목표로 삼는다. 그리하여 북방의 사족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다만, 노약자나 부녀자에 대하여는 석륵이 '감위인주(堪爲人主)'라 할 만한 면을 보인다. 그는 부하들을 엄히 단속했고, 부대가 성안으로 진입할 때, 군중의 재물은 파괴시키지 못하도록 엄금했다. 군령을 어기면 즉시 참했다. 그리하여 석륵은 점령지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들은 일가족을 이끌고 그에게 의탁해왔다. 그리하여 석륵은 하북에서 십만이 넘는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그러나, 병마를 의외로 얻게 되는 것보다 석륵이 가장 기뻐한 일은 아마도 그가 "군자영(君子營)"을 조직한 일일 것이다. 군자영의 기능은 금위군(禁衛軍) 겸 모사집단이다.

"군자영"의 모주(謀主)는 장빈(張賓)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서진의 중산태수(中山太守) 장요(張瑤)의 아들이다. 사서에 따르면, "석륵의 기업을 이룬 것은 모두 장빈의 공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석륵이 환골탈태하여, 패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장빈의 존재때문일 것이다.

원래 장빈도 석륵에게는 도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담량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당대의 장량(張良)으로 자처했다. 오직 유방같은 인물만이 그와 같은 천하제일의 모사를 품을 수있다고 말했다. 여러 서진의 귀족들이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완곡하게 거절하거나,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한다. 석륵이 나타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장수들을 보아 왔는데, 오직 이 호장군(胡將軍)만이 함께 대사를 이룰 수 있겠다." 호장군은 바로 호족장수인 석륵을 가리킨다.

석륵에 투신하기 위하여, 장빈은 검 한 자루를 들고 석륵의 군영으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석륵에게 자신을 만나달라고 요구한다. 석륵은 눈앞의 그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러나 그는 서진의 사족은 멸시했으므로 석륵은 그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중용하지도 않았다.

다만, 장빈에게 기회는 금방 다가온다.

영가4년(310년), 유연이 사망하고, 거대한 '한(漢)'정권은 격렬한 내부투쟁에 들어간다. 유연의 넷째아들 유총(劉聰)이 최종적으로 무력으로 황위에 오른다. 유총은 석륵을 고관후록을 제시하며 자신을 위해 계속 일해주도록 요구한다.

석륵의 태도는 유총이 안심하도록 만들었다. 서진의 국면이 혼란한 틈을 타서, 석륵은 유총의 아들 유찬(劉粲)을 도와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쳐들어간다. 영가지란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그후 석륵은 연이어 남양(南陽), 양양(襄陽)를 함락시키고, 강서의 땅을 차지한다. 황하에서 장강까지. 이때의 석륵은 강남을 멀리 내려다보면서 야심이 팽창하게 된다.

당시, 서진에 더욱 큰 전략적인 이전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명상 왕도(王導)와 동해왕비 배씨(裴氏)는 사마월에게 강남으로 천도할 것을 권한 적이 있다. 그러나 사마월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나라이래, 새외의 각 부족은 비록 강대했지만, 한번도 중원을 침범하여 점령한 적은 없다. 그러나,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사마월은 자신의 보좌하는 낭야왕씨와 모종의 정치적 합의를 달성한다: 자신의 맹우이자 낭야왕인 사마예(司馬睿)와 왕도로 하여금 북방사족을 이끌고 남하하하고, 자신은 왕연과 함께 중원을 지킨다. 그런 방식으로 조당의 정치투쟁과 대외작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사마월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이 책략이 중원에서 "영가지란(永嘉之亂)"을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마예가 북방의 사대부를 한 무리 이끌고 남방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석륵은 남방을 점거하여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다만 왕도를 대표로 하는 사족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석륵이 고군(孤軍)을 이끌고 깊이 들어가자, 금방 왕도에 의해 '약점'을 발각당한다. 왕도는 병력을 보내 공격하고, 석륵은 군량미가 조달되지 않아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장빈이 나타난다. 그는 석륵의 철군계획에 극력 반대하며, 공격이 최선의 방어(以進爲退)라는 계책을 설명한다. 그는 이때 석륵이 뒤로 물러나면, 왕도에게 기회를 주게 되고, 남북에서 협공을 당해 꼼짝없이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석륵은 과감하게 장빈의 계책을 채택하여, 계속 전진하여, 면수(沔水)를 건너 강하(江夏)를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보급에 문제가 없어진 후 다시 북으로 돌아온다.

5

석륵의 수수께끼같은 병력이동에 사마월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낙양성에 머물러 있으면 석륵이 곧 쳐들어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리하여 정무를 모조리 진회제에게 돌려준 후, 자신은 석륵을 토벌한다는 이유를 붙여 낙양성을 빠져나온다. 그 결과 사마월이 진회제에게 정무를 물려주자마자, 진회제는 사마월을 토벌하라는 격서를 보내어 각지역의 군대들이 거병하여 근왕하도록 요구한다. 사마월은 원래 몸이 좋지 않았는데, 이를 보자 놀라서 도중에 급사하고 만다.

동해군은 군룡무수(群龍無首)의 상태가 되자, 이전에 사마월과 관계가 극히 좋았던 왕연을 모시게 된다. 그에게 전군을 지휘하여 석륵을 토벌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왕연은 이때까지는 석륵이 바로 옛날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대상인줄 몰랐다. 그러나 "적구봉기(賊寇蜂起)" 반란군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상황이 되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장수들의 요청을 거절하기 위해 그는 이런 핑계를 댄다: 관리가 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다만 동해왕의 영구를 고향까지 모시고 가는 것을 호위함으로써 충절을 다하겠다.

그렇기는 하지만, 왕연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셈이다.

영가5년(311년) 사월, 사마월의 관을 모시고 동해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왕연과 석륵은 고현(苦縣) 영평성(寧平城)(지금의 하남성 단성 동북)에서 조우한다. 사마월의 부장 전단(錢端)은 군내에서 전투를 잘하는 장수로 석륵에게 돌격한다. 결국 석륵기병의 포위하에 일찌기 동해왕을 모시고 낙양의 군정대권을 장악했던 부대는 모조리 섬멸당한다. 왕연등은 포로로 잡히게 된다.

살아남기 위하여 왕연은 체면불구하고 석륵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옛날의 '원수'였지만, 석륵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석륵은 왕연에게 서진이 패국에 이른데 대한 견해를 묻는다. 왕연은 단지 서진의 혼란은 그 자신과 관련이 없다는 말만 한다. 그리고 석륵이 만일 황제를 칭하려 하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한다. 전제는 물론 자신을 살려주는 것이다.

석륵은 왕연이 이토록 후안무치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는 분노하여 소리친다: "너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있고, 나라의 중요한 요직을 가지고 있으며, 젊었을 때부터 조정에 중용되어, 이제 백발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스스로 해야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냐? 천하가 대란에 빠진 것은 바로 너의 책임이다."

그후, 석륵은 병사로 하여금 한 밤중에 왕연등 서진의 신하들을 모조리 산채로 매장하게 한다.

6

새로운 천하가 석륵의 말발굽아래 서서히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왕연이 패망한 후, 서진왕조는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겨우 2달후, 유총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함락시킨다. 진회제는 도망가던 도중에 포로로 잡히고, '영가지란'은 서막을 열게 된다.

이때는 유총의 '한'정권이 중원을 통일하는 것이 대세의 추이였다. 그러나, 석륵은 장빈의 보좌를 받아, 실력이 크게 늘어났다. 장빈은 석륵에게 한단, 양국(襄國)의 두 곳중 하나를 골라서 본거지를 건립하도록 건의한다. 장빈은 또한 석륵에게 만일 영토를 넓게 가지려면,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내려보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사방으로 장수를 출정시키고(命將四出), 기발한 전략을 수여하고(授予奇略), 망할 곳은 무너뜨리고, 살려둘 곳은 공고히 하고(推亡固存), 약한 곳은 병합하고, 우매한 곳은 공격하여야 합니다(兼弱攻昧). 그렇게 하면 여러 흉적을 제거하고 왕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則群凶可除, 王業可圖矣)"

그렇게 하여, 양국(襄國, 하북성 형대)은 석륵정권의 통치중심지가 된다.

장빈의 도움하에, 이때의 석륵은 양국에 백관을 설치하고, 제도를 수립하며, 동으로는 왕준(王浚)을 싸우지 않고 흡수하며, 서로는 유곤(劉琨)을 격패시킨다.

석륵이 통치하는 지역은 호족과 한족이 섞여 있었다. 갈등을 줄이기 위해, 양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석륵은 자신의 영토하에서 호한분치제도(胡漢分治制度)를 실시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 군에 내사(內史)라는 관직을 두어 한인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호인들이 싸우거나 하는 난제는 모조리 "대선우대(大單于臺)"에서 주관한다. 한인들이 모여사는 지역내에서 석륵은 각지에 학궁(學宮)을 설치하게 하고, '군자영'의 모사 및 다른 학식있는 인사를 보내 학궁의 선생으로 삼아. 적령기의아동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나중에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한다. 동시에 '군자영'의 높은 수준의 운영을 유지하기 위해, 석륵은 서진 시기의 '구품중정제'를 본받아 자신의 관리들 중에서 '전정사족(典定士族)'들에게는 공경의 신분으로 쓸모있는 인재를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석륵은 춘풍을 만난 듯이 잘 나가고 있었지만, 낙양을 점령한 유총에게는 비극이 발생한다.

황태자를 세우는 문제를 놓고, 유총은 그의 부친 유연과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바로, 황태자를 책봉하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유총의 사후, 태자 유찬이 즉위하는데, 그는 포악무도하여 장인 근준(靳準)에게 황위를 찬탈당한다. 근준은 스스로 한천왕(漢天王)이라 칭하며, 거의 모든 유씨황족을 죽여버린다. 오직 유연의 양자 유요(劉曜)만이 화를 면했다.

한(漢)의 내란을 보면서 장빈과 석륵은 금방 왕도패업을 이룰 기회를 포착한다. 석륵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었는데 바로 유요이다.

석륵과 유요는 일찌기 유연, 유총을 따르던 천하의 맹장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온다는 말을 듣자, 근씨가족은 바로 내분이 일어난다. 근준의 아들 근명(靳明)은 전국옥새를 유요에게 바치고, 유요에게 투항한다. 석륵은 근명이 자신에게 투항하지 않자, 대노하여, 병력을 보내 근명을 격파한다. 근명은 유요에게 도움을 청했고, 유요는 병력을 보내 근명의 1,5만명인마를 접수한 후, 근명과 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전국옥새는 황제신분의 상징이다. 석륵의 분노는 그가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이라면, 유요는 근명으로부터 전국옥새를 받은 후, 유연의 '한(漢)'정권은 무효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유는 지금 서진이 이미 멸망했고, 진나라는 오행에서 '금덕(金德)'에 속한다. 금생수(金生水)이므로, 유오는 '수덕(水德)'을 대표하는 글자를 찾아서 칭제해야 했다. 그래야 천하가 그에게 귀순할 것이다. "조(趙)"라는 국호는 그렇게 "한(漢)"을 대체하여 십육국 중에서 또 하나의 신흥정권이 된다. 역사에서는 전조(前趙)라 부른다.

이와 동시에 유요는 신황제의 신분으로 석륵을 태재(太宰)에 임명한다. 그리고 하내이십사군(河內二十四郡)을 내리고 조왕(趙王)에 봉한다. 유요가 석륵에게 아무리 높은 관직과 두터운 재물을 내리더라도 ,두 사람의 결렬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319년 석륵은 대장군, 대선우, 기주목, 조왕을 칭하며, 양국에서 조왕에 오른다. 그리고 정식으로 후조(後趙)를 건립한다. 이해가 조왕원년이다.

328년, 석륵은 당질(堂侄) 석호(石虎)로 하여금 유요를 공격하게 한다. 유요는 전쟁터의 맹장에 남부끄럽지 않은 인물이다. 석호라는 나중의 '살인광마'를 상대하면서도 병력을 잘 이동시켜 한때는 석호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기도 했다. 다만 유요는 병력을 지휘하는데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승리한 후에 반드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대취한다는 것이다. 결국 석륵대군의 지원군이 몰려오자 유요는 패배하고 포로로 잡힌다.

석륵은 유요로 하여금 아들 유희(劉熙)에게 투항하라는 서신을 쓰게 한다. 그러나 유요는 서신에서 유희에게 "대신들과 사직을 유지하고, 나로 인하여 뜻을 바꾸지 말라"고 적는다. 석륵은 대노하여 유요를 죽여버린다.

이렇게 석륵의 전성기가 마침내 도래한다.

7

330년, 석륵은 정식으로 칭제하고 연호를 건평(建平)이라 하며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노예에서 황제로의 변신을 그는 해낸 것이다.

후조황제 석륵

석륵의 칭제는 대세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위가 바뀌면서, 후조의 내부에는 서로 다른 정도로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전에 석륵을 따라 남정북전했던 "십팔기"중 많은 사람은 후조군에서 무장으로 있었다. 그들은 공성략지에 뛰어났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업적이 없다. 북방의 전투가 점점 평정되면서, "십팔기"는 후조의 조정내에서 영향력이 점점 약화된다. 반대로 석륵은 초기에 사족을 우대하는 경향이 있었고, 후조시대에 이르러 사족과 군자영은 점차 치국의 중요역량이 된다.

특히 석륵이 황태자를 책봉할 때, 군공이 높은 조카 석호를 버리고 문약한 아들 석홍(石弘)을 선택하자, 더더욱 갈등은 극치로 치닫는다. 석홍이 황태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석호의 반응은 격렬했다: "대선우의 명망은 나에게 있는데, 어린 비녀의 자식에게 넘기다니 매번 이 일을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고 먹지도 못하겠다. 나중에 주상이 죽은 후에 씨도 남기지 않겠다."

석호의 놀라운 말에 자연스럽게 석륵도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조카에 대하여 석륵은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황태자 석홍으로 하여금 미리 국정을 대행하게 하고, 사전에 사람을 배치시켜, 미래 석호가 반란의 마음을 품더라도 국면을 뒤집기는 힘들게 만들려 했다.

아쉽게도, 석륵이 이번에는 잘못 판단했다.

333년, 60세의 석륵이 병사한다. 임종전에, 그는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르라고 요구한다. 석호와 석홍의 긴장된 관계에 대하여, 석륵은 특별히 당부한다. 두 형제가 서로 싸우지 말라고. 사마씨의 "팔왕지란"이 바로 그들의 전철이라고.

그 말을 석호는 그저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석륵이 죽은 후, 석호는 즉시 석홍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천왕에 오른다. 그리고 석륵의 자손, 처첩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후 석호는 후조황제에 오르고, 그의 영토내에서는 계속하여 살륙이 밝생한다.

석륵이 힘들게 닦아놓은 치세는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바뀐다. 후세인들은 이렇게 탄식한다: "전쟁과 강자의 시대에 역사는 항상 변수가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