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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서로군(西路軍)의 전멸은 누구의 책임인가?

by 중은우시 2025. 2. 10.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어릴 때 본 영화가 있는데, <기련산의 메아리(祁連山的回聲)>라는 제목이었고, 기억하기로 니핑(倪萍)등이 주연을 맡았다. 그 비장한 장면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서로군(西路軍)은 중공당사에서 거의 '비장(悲壯)'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6년 10월, 홍사방면군(紅四方面軍)의 2만여명(당시 홍군총수의 거의 절반에 상당함)이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고, 나중에 "서로군"으로 명명된다. 150여일동안 이 군대는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거의 전멸하고, 최종적으로 겨우 서향전(徐向前), 이선념(李先念)등만이 생존한다.

이는 일찌기 언급하기 꺼렸던 역사이고, 오랫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공군사에서 이렇게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라고 적고 있을까? 모택동(毛澤東) 아니면 장국도(張國濤)?

  1. 모택동 및 모택동옹호자의 견해

1937년 12월, 모택동은 서로군의 생존지휘관을 접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서로군의 실패는 주로 장국도의 기회주의적 착오의 결과이다. 그는 중앙의 정확한 노선을 집행하지 않았고, 그는 국민당의 반동역량을 두려워했으며, 또한 일본제국주의를 두려워했다. 중앙의 결정을 거치지 않고, 부대원을 몰래 황하를 넘게 했고, 서북에서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으며, 지방을 장악하여 칭왕쟁패하면서, 중앙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이런 잘못된 노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결론은 향후 여러 해동안 주류견해가 된다.

사실상, 당시 중공에 "서로군"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1936년 11월 8일, 중공중앙은 비밀리에 <작전신계획>을 제정하는데, 이 신계획에서 중공중앙은 홍군을 다시 배치하여 남로군(南路軍), 북로군(北路軍)으로 나누어 각각 돌파하도록 했다. 기실 섬서,감숙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산서(山西)로 들어가는 것이고, 다시 한번 새로운 장정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남로군, 북로군에 대응하여, <작전신계획>에서 도하부대를 서로군이라 칭했다. "서로군"의 명칭은 이렇게 정식으로 확립된다. 진창호(陳昌浩)는 서로군 군정위원회주석이 되고, 서향전은 부주석이 된다. 서로군의 산하에 3개 군을 두는데, 5군군장 동진당(董振堂), 정위 황초(黃超), 9군 군장 손옥청(孫玉淸), 정위 진송매(陳松梅), 30군 군장 정세재(程世才), 정위 이선념(李先念)이었다.

나머지 로군은 비록 손실이 있었지만, 주력부대는 남아 있었다. 오직 서로군만 전멸을 당한다. 장국도는 홍사방면군을 오랫동안 지휘해 왔으니, 자연스럽게 그 책임을 면하기 힘들다.

장국도의 목적은 감숙을 점령하는 것이고, 홍사군, 홍구군을 남겨 마보방(馬步芳)의 부대에 대적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그는 홍9군과 홍5군으로 하여금 황하를 건너 영하(寧夏) 경내로 진입하게 했다. 이 기정사실에 직면하여, 당중앙은 부득이 장국도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국도는 그후 홍31군과 홍33군도 황하서쪽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목적은 감숙에 독자권력을 수립하려는 것이다.

장국도의 이런 일련의 행동은 그가 감숙에 독립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장국도 자신은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일부 사람들은 그저 모택동이 정보를 공유받지 못했다고만 말하지만, 모택동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향전, 진창호는 단지 장국도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고, 팽덕회의 2차례에 걸친 연합작전계획에도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약간의 건의성전보를 보낸 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휴지취급을 당했다. 서향전은 단지 장국도의 소위 중앙의 말만 들었다. 그리고 한가지 가장 중요한 정보는 장국도가 서진하여 도망치는 것에 대한 가장 좋은 변명은 모스크바의 비준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모택동이 서로군을 서북으로 보내어 모두 죽게 만들 수 있겠는가?

2. 장국도의 견해

장국도는 <나의 회고(我的回憶)>에서 자연스럽게 서로군과 그 실패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군의 실패는 중공이후의 발전과 당시 서북의 국세에 모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이 홍4방면군의 지도자인 나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중공당내투쟁의 창끝은 이로 인하여 나를 향하게 된다. 내가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었고, 동시에 모택동씨의 투쟁이 극히 야만적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나중에 서로군은 겨우 400여명이 남아서 신강으로 도망쳤다. 그외에 일부 소그룹이 살아남았는데, 수명에서 십수명까지 서로 달랐다. 이들은 동으로 황하를 넘어서 섬북으로 귀대했다. 만일 홍1방면군이 2만5천리의 장정을 거쳐 겨우 뼈만 남았다면, 서로군은 뼈조차도 적군에 의해 부러뜨려졌다.

당시 나는 책임을 지고, 내가 서로군실패의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미룬 적이 없다. 그저 모든 잘못은 모두 직접 간접적으로 나와 관련이 있다고만 말했다. 나는 일찌기 중공중앙고위간부회의소집하여 서로군사건을 검토하자고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모택동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공중앙은 이 사건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바 없다. 모든 비판은 임의로 하는 것이다.

모택동은 자연스럽게 나를 공격할 기회를 늦추지 않았고, 그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은 함부로 아무런 근거없이 말들을 했다. 총괄해보면, 당시 이들 비판적인 언사의 요점은 세 가지이다: (1) 서진군사계획은 근본적으로 도망주의이다. 최소한 도망주의의 색채를 띄고 있다; (2) 장국도의 홍4방면군에 대한 지휘는 완전히 파산했고, 결국 하나도 옳은 것이 없었다. (3) 서로군의 실패는 아주 창피한 일이고, 장씨(장개석)는 더욱 홍군을 무시했으며, 서안사변이후 이날까지 장개석씨의 보복과 공격을 유발시켜, 전당과 전군에 해를 끼쳤다.

일반적으로 나를 동정하고 지지하는 동지들은 주로 홍4방면군의 간부들이다. 즉 서로군의 실패는 진창호 동지의 지휘잘못이다. 만일 장국도 동지도 황하를 건너서 직접 기획하고 지휘했더라면, 실패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들은 비판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1) 서진계획은 모스크바에서 비준한 것인데, 어떻게 도망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2) 홍4방면군은 중공의 핵심강군인데, 어떻게 헐뜯을(毁謗) 수 있겠는가; (3) 장개석씨의 소탕을 유발시켰다는 설은 고의로 책임을 떠넘기는 짓이고, 시선을 바꾸게 하는 것이며, 대외적인 일을 대내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동지들은 모택동이 군사위원회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고, 서로군이 갈망하는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으며, 지원에 힘을 쓰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모택동씨가 음험하고, 남의 불행을 기뻐하며, 홍4방면군에 대하여 전혀 동지의 정이 없었다고 질책한다. 이런 지적은 당시에 비록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시비는 인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장국도는 말했다. 주덕(朱德)은 긍정적으로 말했다. 서로군은 노련한 지도자가 가까이서 지휘하지 않았다. 병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치지 못했다. 그리고 기병작전기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실패의 주요원인이다.

이렇게 보면 장국도는 책임을 완전히 모택동에게 떠넘기지는 않았다.

3. 서향전의 견해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서로군문제는 계속하여 서향전에게 가실 수 없는 마음의 아픔이라는 것을.

서향전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로군이 실패한 것은 "고군(孤軍, 고립된 부대)이 외선에서 작전하면서, 임무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것은 실로 병가의 금기이다. 그런데 서로군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4. 전문가의 견해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서로군군사연구 전문가인 진철건(陳鐵健)은 이렇게 본다. 중앙군사위의 6대실수가 서로군의 전멸을 불러왔다고.

(1) 서로군이 황하를 건넌 후, 중앙군사위의 명령을 받아, 20일간 체류하면서 전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속히 서진할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다.

(2) 중앙군사위의 명령을 받아, 서로군은 40일간 전진을 멈추고 머물러 있으면서, 영량(永凉, 永昌과 凉州)근거지를 건립했고, 홍9군의 고랑(古浪)전투에서의 패배로 전군은 18,000명으로 감소되었다.

(3) 서로군은 다시 며칠간 서진한 후, 중앙군사위원회는 서로군으로 하여금 고대(高臺), 임택(臨澤)에 집결하여, 하동(河東)을 책응하고, 근거지를 건립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홍5군은 고대에서 패전하고 군장 동진당은 전사한다.

(4) 서로군은 예가영자(倪家營子)에서 반달간 혈전을 벌인 후, 병력이 10,000명으로 감소한다. 포위망을 돌파하여 동진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중앙군사위는 요청을 거부하고, 서로군으로 하여금 현지에서 적을 섬멸하고 스스로 살 길을 찾으라고 한다. 서로군의 정확한 의견에 대하여, 중앙군사위는 들어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더욱 큰 정치적 압력을 가한다. 중앙군사위는 전보에서 엄중하게 질책했다: "너희는 과거에 범한 정치적 잘못에 대하여, 도대체 어느 정도나 인식하고 있느냐? 어느 정도의 자아비판과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는가? 우리는 생각한다. 너희의 금후 승리와 과거의 정치적 잘못에 대한 정확한 인식 및 철저한 변화는 관계가 있다고. 너희는 그렇다고 여기지 않는가?" 중앙군사위로부터의 거대한 압력에 직면하여, 그리고 중앙군사위의 잘못된 지령에 대하여, 서로군 군정위원회주석 진창호는 부득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5) 서로군은 스스로의 힘으로 예가영자의 포위망을 돌파한 후, 상황은 갈수록 위급해졌다. 서로군 총지휘관 서향전은 계속하여 중앙군사위에 긴급보고를 올리며, 구원병을 신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중앙군사위는 그러나 서로군에게 "50일간 고수하고" "최후의 1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분투하라"는 전령을 보낸다. 서로군은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예가영자로 돌아가서 힘들게 버티면서 계속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6) 서로군이 중앙군사위에 서로군구원병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황하이동의 홍4군, 홍31군의 병사들은 2달이나 서쪽으로 지원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군사위는 3월 2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원서군(援西軍)을 긴립할 것을 결정하고, 5일에 순화(淳化)로 전진하고, 9일에는 서로군과 천리나 떨어져 있는 진원(鎭原)에 도착한다. 13일, 서향전, 진창호는 전보로 서로군의 병력이 이미 3개단(대대)밖에 남지 않았고, "총탄은 모두 떨어졌다", "원서군이 신속히 전진해주기를 바란다"고 알린다. 그러나, 중앙군사위는 여전히 원서군이 천리밖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역사의 진상은 서로군이 황하를 건너서 서로군을 구성하고, 서로군이라고 명명될 때까지, 계속하여 부대는 전진, 후퇴, 행군, 정지를 거듭했다. 모두 중앙군사위의 지시에 따른 것이거나 혹은 중앙군사위에 보고하여 비준을 얻은 것이다.

150일동안 고전하는 가운데, 장국도는 단지 2통의 전보만 보냈다. 단지 진창호, 서향전에게 중앙군사위의 지시를 따르고, 다른 생각을 품지 말고, 과거의 잘못을 다시 범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5. 사인방이 분쇄된 후의 조치

1980년 12월 2일, <서향전전>의 편찬위원회 성원인 주옥(朱玉)이 죽욱(竹郁)이라는 필명으로 <"서로군"의("西路軍)"疑)>라는 글을 써서, 내부간행물에 발표한다. 이 글에서 서로군이 황하를 건너 영량근거지를 건립하고, 동쪽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절당한 것등에 대한 의문점을 언급한다.

우연한 기회에 등소평(鄧小平)이 주옥의 글을 본다. 1981년 10월 30일, 등소평은 비시를 내린다. 이선념에게 이 문제에 대해 추가로 연구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1981년 11월 22일, 진운(陳雲)도 이선념과 서로군문제를 얘기한다. "이 문제는 회피할 수 없다. 서로군이 황하를 건넌 것은 당중앙이 영하전투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결정한 것이다. 장국도의 분열노선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선념은 등소평의 비시를 본 후 그의 비서 정진성(程振聲)을 보내 원시자료를 찾는다. 정진성은 전후로 31차례나 자료관으로 가서 대량의 전보원문을 조사한다.

1983년 2월, 이선념이 주재하여 <서로군역사상 몇 가지 문제에 관한 설명>을 초안한다. 그 결론은 이러하다:

"서로군이 집행한 임무는 중앙이 결정한 것이다. 서로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앙군사위의 영도하에 중요군사행동도 중앙군사위의 지시 혹은 중앙군사위의 동의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군의 문제는 장국도가 1935년 9월 임의로 홍4방면군이 남하하도록 명령한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서로군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하서주랑에 근거지를 만들고 소련과 연락하려고 한 것이고, 장국도노선을 집행하려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선념은 이상의 "설명"을 당시 중앙의 29건의 전보와 함께 진운에게 보내어 살펴보게 한 후, 진운의 동의를 받는다. 그후 이선념은 "설명"과 중앙전보원문 및 진운의 의견을 등소평에게 보내어 살펴보게 한다.

1983년 3월 22일, 등소평은 이렇게 비시를 내린다: "이 <설명>에 찬성한다. 전체 문건을 보관할 것에 동의한다." 등소평의 비시이후, 나머지 중공중앙정치국상위도 이 <설명>을 읽어보고 동의한다.

당시의 중공정치국상위는 모두 6명이다. 각각 호요방(胡耀邦), 섭검영(葉劍英), 등소평, 조자양(趙紫陽), 이선념(李先念), 진운(陳雲)

즉, 이선념이 주재하여 초안한 <서로군역사상 몇가지 문제에 관한 설명>은 전체 12기 중공정치국상위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서로군실패의 지휘책임은 주로 중공중앙에 있고, 중앙군사위에 있으며, 중앙군사위주석 모택동에 있다. 장국도에 있지 않다. 이 결론은 12기 중공정치국상위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1991년 중공당사연구실이 편찬하는 <중국공산당역사>(상권)이 출판된다. 그런데 서로군문제에 대한 진술은 여전히 이전 모택동의 견해를 답습하고 있었다.

당시 전국정협주석이던 이선념은 그것을 보고 크게 화를 낸다. 그는 즉시 중공당사공작소조의 조장 양상곤(楊尙昆)에게 서신을 쓴다. 서신에는 이렇게 썼다: "봉명(奉命), 봉명, 도대네 누구의 명령을 받들었다는 것이냐. 수십년동안 계속 얘기해왔다. 서로군은 장국도의 명령에 따라 황하를 건넜다고. 심지어 서로군은 장국도가 독자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서로군은 장국도의 잘못된 노선의 희생물이라고. 등등. 현재 중앙이 정식출판하는 당사판본에 이렇게 모호하게 쓸 수 있느냐" 이선념은 이렇게 질문했다. "이렇게 쓰면, 죽은 서로군 장병들에게 면목이 있느냐?"

이선념의 서신을 받은 후, 관련인사들은 부득이 잘못을 인정해야 했고, 이미 인쇄된 서적을 모조리 회수한 후, 수정하여 다시 간행한다.

필자의 생각에 모든 견해는 다 이치에 맞는다. 역사의 진상은 아마도 정말 복잡할 것이다.

여하한 중대역사사건에 대한 평가도 당시의 정치환경을 벗어날 수 없다. 위의 각측의 견해를 종합하면, 개인적으로 장국도의 주장이 가장 믿을만하다. 왜냐함녀 그는 가장 중요한 당사자중 하나일 뿐아니라, 글을 쓴 시기는 이미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지 여러 해가 지난 후이기 때문이다. 모택동에 대하여 남은 불만과 원한외에 심리상태는 이미 안정되었고, 다른 사람의 보복이나 불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