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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117

명나라는 지나친 언론자유로 멸망했는가? 글: 주가웅(朱家雄) 청나라는 100년이상에 걸치는 잔혹한 문자옥(文字獄)정책을 썼다. 명나라때 살았던 사람들이 누린 언론의 자유라는 행복은 청나라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상, 명나라 통치자들의 언론자유에 대한 포용력은 대단했다. 역대왕조와 비교하더라도 첫손에 꼽힐 정도.. 2010. 11. 22.
임인궁변(壬寅宮變): 십여명의 궁녀가 가정제를 죽이는데 성공못한 이유는? 글: 방지원(方志遠) 가정제(嘉靖帝)는 양정화(楊廷和)를 핍박하여 은퇴하게 하고, 좌순문(左順門)에서 청원하던 관리들을 엄벌에 처하고, 장총(張璁)과 같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발탁하고, 양신(楊愼)등 반대파들은 징벌에 처하면서, 나를 따르는 자는 흥하고 나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식으로 자.. 2010. 11. 18.
살이호(薩爾滸)전투: 명나라와 청나라의 운명을 가른 전투 글: 유계흥(劉繼興) 한 전투가 있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명나라에게는 쇠망의 조종을 울리고, 청나라에게는 굴기의 표지가 된다. 이는 청나라가 268년간이나 중국을 통치하는데 기반을 쌓은 전투였다. 후세의 사가들은 "명나라가 쇠망하고 후금이 흥기한 것은 모두 이 전투에서 비.. 2010. 7. 26.
명나라중엽에 왜구가 창궐한 이유는? 글: 유조흥(劉照興) 일본의 옛이름은 "왜노국(倭奴國)"이다. 그리하여, 중국고대사 사료에서 일본의 해구(海寇) 및 나중에 이들과 결탁한 대륙의 간민(奸民)들을 통칭하여 "왜구(倭寇)"라고 불렀다. 왜구의 활동을 역사적으로 "왜환(倭患)"이라고 부른다. 원나라말기에서 명나라 만력연간까지, 일부 일본.. 2010. 5. 22.
명십삼릉(明十三陵)을 말한다. 글: 홍촉(洪燭) 자금성(紫金城)에서 십삼릉(十三陵)까지. 이것은 명나라때 대부분의 황제들이 반드시 거쳐간 길이다. 단지 3명이 예외이다. 첫째는 명태조 주원장이다. 그는 남경 자금산의 아래('효릉")에 묻혀 있다. 둘째는 건문제이다. 그는 자신의 숙부인 연왕 주체(즉 나중의 영락제)에게 패배당하여.. 2010. 1. 4.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글: 양려광(楊黎光) 중국인들은 뒤를 돌아보기 좋아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이익추구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신용기갈증을 앓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명청상방을 떠올리고, 그들을 신용을 기본으로 하고, 신용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신용으로 사업을 발전시킨 일대 "유상(儒商)".. 2009.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