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는 지나친 언론자유로 멸망했는가?

중은우시 2010. 11. 22. 17:25

글: 주가웅(朱家雄)

 

청나라는 100년이상에 걸치는 잔혹한 문자옥(文字獄)정책을 썼다. 명나라때 살았던 사람들이 누린 언론의 자유라는 행복은 청나라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상, 명나라 통치자들의 언론자유에 대한 포용력은 대단했다. 역대왕조와 비교하더라도 첫손에 꼽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때는 금의위, 동창, 서창등 특무기구가 한때 횡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명나라의 절대다수의 시기에는 이들 기구가 백성들의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탄압하고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리의 부패를 조사하고, 여론을 살피고, 민생의 어려움을 반영하는등의 역할을 했다(당연히, 환관이 권력을 농단했던 몇 번의 짧은 기간동안은 그들의 권력농단의 도구로 전락한 적도 있었다)

 

명나라의 언론자유를 증명할 자료는 아주 많다. 비교적 전형적인 것은 대신들의 상소문에서 조정의 정책과 관료부패현상을 비판, 편달하고, 개선과 정리정돈을 바라는 것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용상에 앉은 황제를 욕하고 비난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 대신들중 절대다수는 이러한 솔직하고, 대담하고 심지어 과격한 언론때문에 살신지화를 입지 않았다. 언론자유를 가장 크게 누린 집단은 아마도 명나라말기의 동림당 사람들일 것이다.

 

먼저 해서(海瑞)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해서는 명나라때 가장 유명한 청백리이다. 1566년, 호부주사를 맡고 있던 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당시의 가정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진언한다. 그리고 도사와 무술을 미신하고, 생활을 사치하고, 근면하게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조정기강을 바로잡지 못하니, 성명한 군주가 아니다는 등등 언사가 날카로왔다. 가정제는 대노하였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본 후, 해서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고 죄를 물었다. 그러나, 같은 해 붕어할 때까지 해서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해서를 그의 후임인 명목종에게 넘겨준다. 우리는 이것이 가정제의 지혜로운 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명나라의 대신들은, 충분한 용기와 담량만 있으면, 백성에게나 혹은 대신에게나 황제에게, 하고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폐단을 맹렬하게 비판할 수도 있었다. 해서는 나중에 그의 솔직한 간언으로 명성과 지위를 얻는다. 그는 관료사회에서의 여러번에 걸친 부침에도 자신의 본색을 잃지 않았다. 이를 보면 해서의 말은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고, 사사로운 욕심을 지닌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국가에 유리한 행위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해서와 비슷한 경우도 적지 않다. 명무종때, 많은 대신들은 무수히 황제 본인에게 글을 올려 직언을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비록 상소문에 쓴 내옹이 억측인 경우이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거나 한 경우라 하더라도.

 

왜 명나라의 관리들은 언론의 자유를 이렇게 크게 누렸을까? 그 근원을 따져보면 아무래도 주원장이 설치한 언관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명나라초기, 주원장은 관료사회의 건강과 청렴을 위하여, 전체 관리쳬계가 행정과정에서 깨끗한지여부를 감독하고 고찰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그리하여 역대에 전승되어 내려온 어사제도와 언관제도를 개선한다. 이러한 개선은 언관의 중요성과 독립성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주원장은 언관들에게 관리의 악행과 조정의 폐단을 비판하는 것을 주요임무와 직책으로 맡겼다. 그리고 그들이 대담하게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면조부를 부여한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하고, 문제를 찾아내지 못할 것을 걱정했지, 일단 문제만 발견하면 상사와 황제에 보고하는 것이다. 잘못 말했을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잘못 말해도 상관이 없다. 그저 고의로 다른 사람을 모함한 것만 아니면 된다. 상사는 언관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황제가 뒤를 받쳐주고 있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으랴! 아마도 언관의 배후에 황제가 뒤를 받쳐주기 때문에, 명나라의 언관들(즉, 국가라는 큰 나무에서 벌레를 찾는 딱따구리들)은 대다수의 시기에 직언하고 동료들에게 미움을 살까봐 두려워하지 않는 개성과 성격을 지녔고, 그것으로 세상에 유명했다. 이리하여 언관제도는 근본적으로 전체 명나라시기에 언론자유의 정치환경과 사회기풍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언관제도는 진보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명나라 최고통치지가 맑은 정신만 유지하고 있다면, 언관제도는 국가의 건강에 아주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아쉽게도 명나라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일부 언관의 행태는 날로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예를 들어, 그들의 어떤 언론은 너무 과격하거나 편협하여 그저 두각을 나타내고, 눈길을 끌고, 명성을 얻으려 하였다). 심지어 그들의 일부 행태는 명나라의 생사존망과 관련되기도 하였다(예를 들어, 대신과 언관들의 원숭환을 죽일 것인가 말것인가 및 1644년 천도할 것인가말 것인가의 문제등에서의 행태등).

 

만력시대인 1589년, 대리사좌평사 낙우인(雒于仁)이 상소를 올려, 신종황제가 주(酒), 색(色), 재(財), 기(氣)에 빠져있다고 비판하고, 소위 사잠(四箴)을 올린다. 만력황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임금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에 이를 줄이야. 만력제가 보기에, 상소문을 올린 신하는 아무런 확실한 근거도 없이 자신을 이렇게 욕했으니, 너무나 심한 것이다. 그는 이 상소를 올린 관리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만력은 자신이 황음무도한 황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재능이 뛰어나고, 성취도 크게 얻었다고 생각했다. 단지 몸이 좋지 않아서 궁중에 깊이 거주하면서 대신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적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는 정무를 처리한다고 생각했고, 국가대사는 챙긴다고 생각했다. 만력은 이것이 일부인들의 자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해가 이렇게 깊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행히 내각수보 신시행이 잘 말을 해주어서, 낙우인을 죽이지 않고, 그를 삭탈관직하는 선에서 끝을 낸다.

 

오늘날의 사람들 눈으로 보자면, 만력제는 더 관용적일 수 있었다. 그의 관직을 빼앗지 말고, 그저 대신들을 불러모아서 이에 대하여 논의하게 하면 된다. 혹은 글재주가 있는 심복내신, 외신을 불러서 근거와 이론을 갖추고 성의있는 글을 써서 간행해도 된다. 그러나, 만력제가 보기에 역대이래로 이처럼 아무런 근거없이 황제를 욕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는 너무 심하니 처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각수보 신시행의 말을 듣고나서도, 그의 관직을 빼앗았다. 이런 처분이 그리 약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이후에 상소를 올리고 진언하는 관리는 계속 더 많아진다. 내용은 더욱 과격해져서 이전보다 훨씬 심했다. 재미있는 일은, 만력제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후궁에서 침묵했다. 그는 화를 내기도 귀찮았나보다. 이런 상소문을 읽기도 귀찮았을 수 있다. 이런 언론자유 심지어 망언을 지껄이는 배경하에서 후세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를 평가하고 보아야 할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관건은 후세인들이 이처럼 아무런 근거없이 올린 상소문을 가지고 관련역사인물의 덕생, 행위 및 역사지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살펴야 하고, 모든 명나라황제들의 관용적인 미덕은 칭송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명나라말기의 언론자유에서 언급할만한 일이라면, 대명왕조가 이런 분위기하에서 망했다는 점이다. 이것때문에 후세인들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명나라의 멸망은 언론에 대한 단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언론이 지나치게 방임되었던 것과 관련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동림당인들은 대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말을 했는데, 이것이 혹시 명나라의 통치기반을 뒤흔든 것은 아닐까?

 

소위 동림당(東林黨)은 명확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 단지 명나라말기의 사상기조와 집권이념이 비교적 유사한 한 무리의 관리와 지식인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동림당의 형성은 고헌성(顧憲成)등이 만력제중기이후부터 시작한 동림서원에서의 강학을 시점으로 한다. 곧이어 시국이 변화하면서 점차 강대해진다. 동림당인들은 조야를 불문하고, 시사, 관리, 조정에 대하여 자신의 비판, 견해 및 관점을 제시하는 것에 열중했다. 그리고 확실히 그들의 언론은 조정의 정책이나 관리의 임면에 영향을 주었다. 천계초년, 동림당인은 명희종을 즉위시키는데 대한 공으로 황상으로부터 중용된다. 동림당인들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주류지위를 차지한다. 아쉽게도 동림당인은 환관 위충현을 우두머리로 하는 엄당집단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곧 권력투쟁에 돌입한다. 그러나 동림당인이 최종적으로 패배한다. 동림당의 핵심인물인 양련, 좌광두, 웅정필등이 모두 엄당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동림당인의 실패는 동림당인 자신들에게는 물론이고 명나라의 국세에도 하나의 비극이다. 명나라가 망한 것은 원인이 많고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는 명나라인들이 누리던 언론자유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동림당인은 국가와 천하의 흥망에 열정을 가지고 말을 했다. 이런 애국애족의 언론은 당연히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확실히 정직하고 열혈인 동림당인이 실패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유지했더라면, 명나라의 강산은 아마도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필자는 명나라가 망한 원인이 아주 많고 아주 복잡하지만, 언론자유와는 관련이 없다고 본다. 우리가 명나라말기의 언론자유의 사례를 하나하나 분석해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가 반드시 인식해야할 것은 명나라의 언론자유가 사실 봉건사회내에서 민주가 한번 발휘된 경우라는 것이다. 명나라사회의 각계각층의 각종의견이 합리적으로 표출되는 통로였다. 각계각층이 이익을 다투는 문명적인 방식이었다. 이 단계의 충분한 자유는 통치계급으로 하여금 각계층민중(관리계층포함)의 이익요구사항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고, 통치자의 의사결정에 기반과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사회의 진보를 촉진하는데 널리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미리 위기를 준비하는 작용을 했다. 여기에는 실제문제를 해결하고, 관련잘못을 시정하며, 각종체제를 개혁하는데 참고할만했다. 이런 언론의 충분한 자유는 명나라의 통치를 해치지 않았다. 그저 민의를 소통시키고, 갈등을 해소시키고, 조화로운 사회를 촉진하는 작용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