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중엽에 왜구가 창궐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0. 5. 22.

글: 유조흥(劉照興)

 

일본의 옛이름은 "왜노국(倭奴國)"이다. 그리하여, 중국고대사 사료에서 일본의 해구(海寇) 및 나중에 이들과 결탁한 대륙의 간민(奸民)들을 통칭하여 "왜구(倭寇)"라고 불렀다. 왜구의 활동을 역사적으로 "왜환(倭患)"이라고 부른다. 원나라말기에서 명나라 만력연간까지, 일부 일본의 사무라이(武人), 낭인(浪人, 해상으로 도망친 패잔병), 해적상인 및 파산농민은 계속하여 중국, 조선의 연해를 침략하였는데, 전후로 합하여 300면에 이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왜구'라고 하면 명나라때, 중국의 동남연해지역을 침범한 일본해적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도있게 연구하고 분석해보면, 명나라중엽, 왜구는 일본인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로 중국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명나라정부는 연안지역의 반도들을 왜 "왜구"라고 불렀을까? 그 원인은 아마도 아래의 몇 가지때문일 것이다.

 

첫째, 봉건통치집단은 민족모순을 가지고 국내에 첨예하게 대립한 계급모순을 가리고자 하였다. 이런 칭호는 백성들에게 오랑캐의 침입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과 항거를 불러일으켰다. 이를 통하여 국내무장상단의 반명 의군이라는 본질을 약화시켰고, 국내에서 정부에 불만있는 사람들이 가담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것은 근현대에 유행한 '여론전'에 다름아니다.

 

둘째, 봉건왕조의 반역자들은 당시 통치계급이 일본인을 두려워하는 심리를 이용했고, 또한 자신의 이웃이나 가족들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하여 '왜'라고 사칭하였다. 가정제이전에, 명나라의 국력이 강하지 못하였지만, 일본은 남북조내란에 처해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군직을 잃은 대량의 남조무사들이 섬으로 도망쳤고, 일부 일본의 밀수상인, 파산농민과 결탁하고, 또한 장사성, 방국진의 잔여부대 및 나중의 건문제조정의 도망친 신하들까지 힘을 합하여, 계속하여 요동, 산동연해를 침범하고, 방화살인약탈간음을 저질러, 명나라의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감을 조성했다.

 

셋째, 봉건통치계급은 인민들의 반항투쟁에 대하여 극단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상 많은 사서에서 모든 의거농민을 "적(賊)", "도적(盜賊)", "유구(流寇)"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당시 국민당정부도 주모홍군을 "루불화를 받는다" "공산공처(共産共妻)"한다는 등으로 얘기하며 소련의 내간(內奸)이라고 선전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구"라는 단어는 봉건왕조의 반역자에 대한 멸시를 드러낸다.

 

명나라때 왜구의 활동은 가정조를 경계로 하여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기는 원나라말기에서 명나라초기 정덕연간까지이다. 원나라말기, 일본은 남북조분열시기에 들어가고, 내전에서 패배한 패잔병들, 해적상인 및 파산농민이 바다로 도망친다. 명나라초기 혼란을 틈타서 연해지역을 계속 침범한다. 홍무때, 해상방어가 정비되어, 아직은 큰 우환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영락17년(1419년) 육월의 망해과전투에서 명나라 요동총병 유강이 병사를 이끌고 수천명의 왜구를 섬멸한 후, 왜구는 조용해진다. 정통이후, 명나라때의 해상방어가 점차 느슨해지면서, 왜구의 침략이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아서, 왜구들이 다시 극성을 부린다. 이 시기의 왜구는 주로 일본본토인들로 구성되었다. 적나라하게 침략하는 외에 중국과 일본간의 무역을 이용하여 방물과 무기도 운송했다. 관병을 만나면 조공을 바치러 온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살륙과 약탈을 감행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정제 이전까지는 왜구의 침략은 그저 일부 지역에 한정되고, 시간도 짧았으며, 명나라 동남지역의 심각한 우환으로까지 커지지는 않았다.

 

가정제이후, 왜구는 창궐한다. 그 원인은 아래의 몇가지이다:

 

첫째, 명나라중엽의 극단적인 해상봉쇄정책이다. 먼저, 명나라정부가 해금정책을 추진한 이유는 국내의 반명세력과 일본왜구가 결탁해서 명나라정부를 위협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을 실시하자, 그 객관적인 효과는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는 동시에 중국연해주민의 정상적인 해외무역에 대한 수요까지도 제한받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연해지역의 많은 해상상인들은 생존을 위하여 부득이 무장을 하게 되고, 밀수집단을 조직한다. 그리고는 "왜인"으로 꾸미고 항거를 한다. 이것이 바로 명나라해외무역사상의 소위 "해구(海寇, 해적)"이다. 가정연간, 2,3십년의 소탕작전으로도 "왜구"를 뿌리뽑지 못하자, 융경원년 조정은 해금정책을 약간 완화시킨다. 동서이양에서 물건판매를 허용한다. 그후 소위 "왜환"은 자연히 줄어든다. 다음으로, 명나라의 농업생산이 건국에서 가정연간의 일백여년을 거치면서 회복되고 발전하여, 이미 상당히 번성한 정도에 이르렀다. 특히 동남연해지구의 농업생산은 발달하여, 농산품이 충분했고,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수공업생산과 상업무역으로 전환했다. 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난 것이다. 해외무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당시 중국역사발전의 필연적 요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자본주의생산관계의 성장을 질식시켰고, 연해의 상인과 백성들이 살기 위하여 해외무역을 하려는 것과 충돌하였다. "왜환"은 바로 이런 갈등이 격렬하게 나타난 것이다. 해금에 대한 강력한 징벌이다.

 

둘째, 명나라 일본의 쌍방은 사회갈등이 심각하게 격화되고 있었다. 15세기중엽이래로, 명나라의 사회갈등은 첨예했다. 토지겸병이 심각하고, 부역과 지조도 가중되었다. 이리하여 농민들이 곤경에 빠진다. 무거운 부역을 피하기 위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뿐아니라, 토지가 있는 농민들까지고 고향을 등지고 떠냐야 했다. 이렇게 하여 전국적인 유민이 발생한다. 동남연해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남연해의 일부 유민은 생활할 방법이 없자 바다로 나갔다. 물고기를 잡거나, '해적'이 되었다. 1470년대이후 일본에서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파산한 농민, 실직한 관리, 실업한 유민, 패전한 무사, 일없는 낭인, 이익을 탐하는 간상, 약탈을 업으로 삼는 해적이 각지 영주의 지원하에, 해외로 출구를 찾아나섰다. 이리하여 왜구가 창궐하게 되는 것이다. 명나라 영락이후, 정치는 날로 부패하고, 환관이 정권을 농단하며, 관리들은 탐욕스러워진다. 이렇게 하여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진다. 가정제때, 엄숭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뇌물이 성행하고, 관료사회가 부패한다. 연해사병들중에서도 대량으로 도망가는 자들이 나타나고, 전선의 수가 격감한다. 해상방어시설도 오래되어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왜구가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

 

셋째, 일본 봉건할거세력의 지지와 일본 명나라의 해적이 상호 결탁했다. 가정, 융경년간에 대량의 중국상인, 파산농민과 실의한 지식인등이 각종원인으로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게 된다. 그중에 자본이 있는 자들은 일본과 교역을 했고, 자본이 없는 자들은 '오랑캐와 연합하여 약탈을 했다' 이리하여 이들이 왜구의 주요구성부분이 된다. 이것이 이 시기 왜구의 큰 특징이다. 일본에 이주한 왜구수령 왕직(汪直), 서해(徐海), 모열(毛烈), 진동(陳東), 섭명(葉明, 일명 葉麻), 등문준(鄧文俊), 임벽천(林碧川), 심남산(沈南山)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일본봉건영주의 지지하에, 왜인의 복장과 깃발을 들고, 팔번선(八幡船)을 타고, 중국동남연해지역을 침략하여 많은 재물을 약탈했다. 이들은 명나라와 이런저런 관련이 있다. 내지연해의 일당들과 연락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여기에 유민, 간민, 귀족들도 생활을 위하여 혹은 이익을 위하여 왜구와 자연스럽게 결탁했다. 그리하여 왜구의 창궐은 그 핵심요소가 중국해적과 일본해적의 결탁에 있다. 만일 내간의 도움이 없었다면,왜구는 그저 연해에서 일시적으로 약탈하고 돌아가지, 장기적으로 머물지 못했을 것이고, 세력도 그렇게 크지 못했을 것이며, 위해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