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117

이암(李岩)의 신세내력과 대순(大順)의 멸망

글: 오유신(吳有信)​1944년 항일전쟁 7년째를 맞이하여, 각 정치세력 새롭게 판을 짜고 있을 때, 중국은 명나라멸망 300주년기념일을 맞이한다. 당시 중국의 내외정치환경은 이제 막 만청외족통치를 무너뜨린지 얼마 되지 않았고, 새로운 외적이 다시 문앞까지 쳐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국면이 명나라말기와 상당히 비슷했다. 숭정제(崇政帝)와 유사한 장개석(蔣介石), 그리고 이자성(李自成)과 비슷한 모택동(毛澤東), 그리고 오삼계(吳三桂)와 비슷한 왕정위(汪精衛), 그리고 만청(滿淸)과 비슷한 일본인까지.​선전을 잘 하던 공산당이 영도하는 좌파문인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리하여, 교관화(喬冠華), 전백찬(翦伯贊)은 곽말약(郭沫若)을 찾아가서 상의를 한 다음 곽말약이 시사를 풍자하는 기념글을 쓰..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을 둘러싼 의문점

글 : 장풍명월(長風明月)​명나라 정통14년(1449년), 오이라트(瓦剌)대군이 남하하여 명나라변경으로 침입했다. 명영종(明英宗)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였고, 토목보에서 오이라트군대에 패배하여, 명영종이 포로로 잡힌다. 토목보의 변은 명나라가 상승기에서 하강기로 접어드는 전환점이 되었는데, 사서의 기록에는 여러가지 의문점이 많다.​주류기록상의 토목보의 변의 경위토목보의 변토목보의 변은 주로 명종본기와 왕진전(王振傳)에 실려 있다. 다른 사람들의 전기에도 드문드문 관련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요 경과는 다음과 같다: ​[오이라트침입]​정통14년(1449년) 칠월, 오이라트는 4로로 나누어 대거 침입한다. 동로는 요동을 공격하고, 서로는 감주(甘州, 지금의 감숙성 장액)을 공격하고, 중간은 2로로 나누..

<규범도설(閨範圖說)>: 황위승계다툼에 말려들다...

글: 춘추소력(春秋小歷)​만력18년, 여곤(呂坤)이라는 사람이 산서안찰사(山西按察使)로 부임했다.​이 직위는 상당히 중요하다. 권력도 아주 크다. 산서성의 법률과 감찰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고, 적어도 정사품(正四品)에 해당한다.​이 여곤이라는 사람은 관리가 되기 전에 명나라의 거유(巨儒)로 학식이 뛰어났고, 책을 편찬하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산서에 부임한 후, 남는 시간에 책 하나를 편찬하여 출판한다. 명칭은 이다.​이 책은 인물의 전기로 주로 명나라이전 역대왕조 정결열녀(貞潔烈女), 현부양녀(賢婦良女)들의 이야기이다. 그녀들의 행위를 선양하고, 그녀들의 품덕을 칭송함으로써 천하의 여자들이 본받도록 선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이 책이 나온 이후 널리 호평을 받고, 산서에서 적지 않은 수량이 인..

후금(後金)과 피의 원한이 있는 요인(遼人)은 왜 후금의 편에 서게 되었을까?

글: 자귤(紫橘)​일반적인 논리대로라면, 외적이 쳐들어와 너의 친척과 동네사람들을 죽였다면, 너는 마땅히 그들과 불공대천의 원수가 될 것이고, 가장 강경하게 대항할 것이며,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말기 이런 기이한 현상이 발생해버린다. 후금은 요동(遼東)에서 피비린내나는 도살을 감행했고, 요인(遼人)을 붙잡아 노예로 삼는다. 원래 후금과는 피의 원한이 있는 요인들은 나중에 후금의 중요한 맹우가 된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요민수요토(遼民守遼土)의 시작​천계(天啓)시기, 요동의 국면은 혼란에 빠지고, 명나라는 약세에 처하게 된다. 당시의 요동독사(遼洞督師) 손승종(孫承宗)은 참모 모원의(茅元儀)의 건의를 받아 조정에 를 올려, 정식으로 "요동..

사안지란(奢安之亂): 명말 서남지역에서 17년간 지속된 반란

글: 자귤(紫橘)​천계(天啓)원년에 발발한 사안지란은 명말청초 서남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대동란이다. 이 반란은 17년이나 끌었으며, 그동안 중경(重慶)이 함락되고, 성도(成都)가 102일간 포위당하며, 준의(遵義)도 두 차례 함락되었다. 반란의 여파는 사천, 운남, 귀주등지에 미쳤으며, 명나라조정은 운귀총독(雲貴總督) 주섭원(朱燮原)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개성의 관군을 끌어모아 9년간 전투를 벌이고, 그후에도 다시 8년간 여파를 겪으면서, 17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비로소 평정할 수 있었다. 사안지란이 평정된 후, 명나라조정은 영녕(永寧)에 개토귀류(改土歸流)의 정책을 실시하여, 영녕사씨(永寧奢氏)라는 천년토사(千年土司)를 철저히 뿌리뽑는다.​영녕사씨​서남지역은 자고이래로 "철타토사(鐵打土司), 유수황제..

황소양(黃蕭養)의 난: 명나라때 남쪽지방 최대규모반란

글: 미남덕(米南德)​1449년은 대명왕조에 다사다난했던 한 해이다. 먼저 명영종(明英宗)이 토목보(土木堡)에서 패배한 후 오이라트몽골에 포로로 잡히고, 다시 오이라트몽골은 북경을 몇달간 포위공격한 바 있다. 재정지출이 커서 재정부족에 시달리게 되었을 뿐아니라, 사람의 이동조차 난국으로 제한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은 인심이 흉흉하고, 여러가지 감춰왔던 문제들이 수면위로 드러나게 된다.​예를 들어, 영남(嶺南)의 주강(珠江)델타지역은 황소양집단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규모반란이 일어난다. 이들 반란군의 출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배후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요소가 숨어 있다. 나중에 실패로 끝나면서 역시 광범위학 영향을 끼쳐, 이 지역의 역사발전에 수백년간 그 여파가 미치게 된다.​고대 통일..

이성량(李成梁)의 군현조선론(郡縣朝鮮論)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에 이성량은 동북아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그가 요동(遼東)에 있는 동안 여진(女眞)의 굴기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명나라에 충성한 장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8년의 한 사건은 이성량의 허약과 야심을 보여준다. 이성량이 조선을 군현으로 삼으려한 거동은 이미 명말군벌할거의 싹이 드러난 것이다. ​광해군의 계위를 둘러싼 갈등​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은 조선 선조(宣祖)의 차남(次男)이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도 않은 상황하에 1608년에 왕으로 등극한다. 급히 등극하게 되고, 게다가 명나라에서 그를 세자(世子)로 책봉하는 것을 거절당하자, 광해군의 통치는 불안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통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광해군은 즉위ㅜ 즉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어..

사보의 난(沙普之亂): 명나라말기 운남(雲南)의 혼란상황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의 혼란한 국면에서 이자성(李自成), 장헌충(張獻忠), 후금(後金)등 유명한 반란세력을 제외하고, 사라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서남토사(西南土司)들도 있다. 중앙정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들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후로 36년간 지속된 사보의 난(沙普之亂)이다. 사보의 난은 운남(雲南)지구에 침중한 재난을 가져왔을 뿐아니라, 운남에서 이백년간 지속되고, 거의 명나라의 존속시기와 나란히 했던 목씨(沐氏)가족의 운남통치도 끝장내게 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명나라말기의 운남​사보의 난은 운남 남부에서 발생했다. 이곳은 토사(土司)가 많고, 한인(漢人)은 비교적 적었다. 게다가 외국에 이웃하고 있었으며, 당시는 국경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늘 ..

명나라말기의 "가정병(家丁兵)": 유일하게 전투력이 있던 부대이며 명나라멸망의 원인이 되다.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의 소설을 보거나 TV드라마를 보면, 명나라말기에 위소병(衛所兵)은 이미 완전한 거지군대(乞丐軍)가 되어 버렸고, 변군(邊軍)도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유일한 역량은 각 장군들의 개인무장세력인 가정병(家丁兵)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가정군을 기르는 돈은 부정부패로 얻은 군비였다. 그렇게 하여 악순환이 이어진다. 군대의 전투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가정의 전투력은 갈수록 강해진다. 그렇다면, 가정병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명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켰을까, 아니면 늦춰주었을까?​명나라 가정의 탄생​가정제(嘉靖帝)때의 신하인 전미(錢薇)가 쓴 에 따르면, 가정의 기원은 정통제(正統帝)때부터이다. 정통시기 선대순무(宣大巡撫) 나형신(羅亨信)은 가장 먼저 가정군을 두자고 건의한 인물..

명나라때의 "왜구(倭寇)"는 일본인이었을까?

글: 조대부(趙大夫)​왜환(倭患)의 근원​대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명나라때 창궐했던 왜구는 당시의 "해금(海禁)"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명나라가 건립된 후, 엄격한 "해금정책"을 실행한다. 정부와 해외국가간에 조공무역관계를 유지하는 외에 나머지 민간해상무역은 일률적으로 금지되었다. 명태조 주원장의 홍무(洪武)시기에 여러번 명을 내린다: "바다에 인접한 백성들이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바다에 인접한 백성이 사사로이 해외 여러 나라와 통상하는 것을 금지한다." "인민이 마음대로 바다로 나아가 외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한다." 명성조 영락(永樂)시기에 약간 느슨해지는 했지만, 여전히 "해금"정책은 위배할 수 없는 '조훈(祖訓)'이었다.​그후, "해금"정책은 조이기도 하고 느슨해지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