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문혁기간중 중국과 북한의 관계악화배경

중은우시 2006. 7. 22. 00:59

중국의 소수민족중에 조선족이 있고, 주로 중국의 동북지방에 북한과 인접하여 거주하고 있다. 한국전쟁후에 북한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하여,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들에게 "조국관념, 영수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영수는 김일성 장군이라고 선전하였다.

 

1959년 중국이 3년곤란시기에 접어들자, 북한은 기회를 잡고 많은 우대조건을 제시하며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중에서 대학졸업생이나 각종 전문직인사를 조국으로 돌아오도록 장려했고, 그들의 '천리마운동'에 힘을 보태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한은 변경지역에 '접대소'를 설치하고 월경자들을 맞이하였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상에 있는 백두산(장백산) 천지와 병사봉(백두봉)에 관하여도, 북한측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천지를 나눌 것을 요구하였다. 중국은 천지의 절반과 분수령 동쪽의 세 개의 산봉우리에 대하여 북한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북한측은 양도받은 다음 날 백두봉의 이름을 장군봉으로 하였다.

 

나중에 북한에서는 주중국대사관을 통하여 '엄중성명'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흑룡강성의 일부분, 길림성의 대부분, 요녕성의 일부분은 역사상 모두 고구려제국의 영토에 속하는데, 나중에 중국역대왕조에 의하여 침략받고 점령되어 왔던 것인데, 지금은 중국도 사회주의국가이니 도리상 당연히 이 영토를 반환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진의 외상은 즉시 주은래 총리에게 보고했고, 주은래는 길림성 사회과학원에 급히 중국과 북한간의 역대강역에 대하여 명확히 연구해서 국무원에 보고할 것을 요청했다. 길림성 사회과학원 학자들의 연구를 거쳐 얻은 결론은 이것은 고구려와 무관한 중국영토라는 것이었다. 중국측에서는 그러한 결론을 북한에 제시하였다. 북한은 이에 화를 내며, 즉시 소련으로 달려갔고, 소련공산당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여 천하를 놀라게 하였다. 김일성도 놀랐으며 두려워하였다. 그는 도대체 모택동이 뭐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고, 눈을 크게 뜨고 중국의 상황을 주시하였다.

 

그런데, 돌연 홍위병이 들고 일어나 참신한 구호 하나를 냈다. "모주석은 전세계 인민의 마음 속의 붉은 태양이다" 그리고 도처에 대자보를 붙였는데, 거기에는 '주자파 김일성을 체포하자'는 것도 있었다. 김일성은 이를 듣고는 매우 화가 났다. 스스로 북한의 붉은 태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모택동이 세계의 붉은 태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즉시 명령을 내려 지원군혁명열사능원을 훼손하였고, 열사비도 모두 부숴버렸다. 심지어 모안영(모택동의 아들로 6.25때 미군기의 공습에 사망)의 큰 비도 완전히 부숴 버렸다.

 

이와 동시에 변경지역에서 확성기를 설치하여 중국공산당이 부끄럼을 모른다고 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김일성 주석은 우리들의 마음 속의 붉은 태양이다"라고 소리질렀다. 더욱 심했던 것은 압록강에서 전개된 '축수전"이었다. 북한 병사들은 강의 중심에 둑을 쌓아, 물을 서쪽 강안으로 몰아서, 중국측에 수재가 발생하도록 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확성기를 걸고 김일성이 '조선수정주의자'라고 욕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홍위병과 조반파들이 욕설을 주도했고, 관방매체는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양국관계는 이미 교착상태에 들어섰고, 언제든지 욕설전이 폭발할 수 있는 상태로 되었다.

 

나중에 김일성은 문혁을 모택동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주자파들이 철저히 분쇄된 것을 보고, 모택동이 자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을 보고는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모주석을 만나 다시 지원군열사능원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모택동도 우의가 주요한 것이고 오해는 그 다음이라고 함으로써 양국관계는 다시 우호적으로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