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한국/한중관계

김일성의 급사 과정

중은우시 2006. 5. 16. 13:32

중국신문에 보도되었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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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한반도의 정세는 다시 긴장되었다. 이유는 미국이 북한을 핵실험을 준비한다고 지적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무조건적으로 IAEA의 핵사찰을 받으라고 하였으며, 만일 사찰인원의 입국을 거절하면, 미국은 국제사회와 연합하여 북한에 대하여 엄중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대통령 카터가 북한을 방문한 22일후에 김일성이 돌연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은 여러가지 수수께끼를 남겼다.

 

6월 16일, 카터는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이번 회담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카터와 포옹을 하였고, 여러번 환영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참가한 북한 관리중에 김정일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김정일의 몸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김정일은 부친을 위하여 함께 일을 분담해주지 못한 것이다. 카터는 김일성이 흥분할만한 소식을 하나 들고 왔다. 한국에서 김일성의 서울방문을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살아 생전에 다시 한번 서울을 볼 수 있고, 유사이래 남북한간의 정상회담을 함으로써 한반도의 통일을 촉진할 수 있다면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즉석에서 정무원 총리인 강성산에게 회담준비를 지시했다.

 

카터는 평양에 3일을 머물렀는데, 매일 김일성과 회담을 했다. 매번 회담의 시간은 매우 길었고, 마지막 회담은 연회활동까지 포함하여 6시간 지속되었다. 중간에 겨우 20분을 쉬었을 뿐이다. 김일성의 부인인 김성애는 마음이 다급해져, 여러번 김일성에게 몸을 생각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흥분상태였던 김일성은 이런 말을 전혀 듣지 않았고, 매일 십여시간씩 일을 했다. 그는 낮에는 회의에 참가하고, 저녁에는 문건을 처리하였다. 북한의 관리들은 그가 이렇게 정열적으로 일하는 것을 보고는 그의 실제나이를 잠시 잊을 정도였다.

 

카터가 떠난 후에, 김일성은 여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 손으로 남북정상회담의 구체적인 사항을 지휘했고, 방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클린턴과의 회담방안도 고쳤다. 남북회담방안에 대한 심의가 끝난 후에, 김일성은 여전히 쉬지를 않고 농촌시찰에 나섰다.

 

몇년동안 북한의 농업은 계속 상황이 좋지 못하였다. 어떤 지방에는 굶어죽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급 간부들은 사실대로 보고할 수 없었다. 이 때는 바로 여름철 수확기였으므로 허위보고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보고된 내용은 믿지를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농촌에 내려가서 시찰해보려고 하였다.

 

농촌에서 그는 누렇게 뜨고 비쩍 마른 어린 아이를 보았다. 그곳을 떠날 때, 하늘이 갑자기 변하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비행기가 뜰 수가 없었다. 현지 관리는 김일성에게 하루를 머물다 떠나기를 요청하였지만, 김일성은 응하지 않고, 기차를 타고 묘향산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전용열차가 우중에 달렸다. 김일성은 창밖을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이번 농촌방문에 그에게 준 자극이 너무 컸다. 연일 돌아다니느라 그는 체력상의 피로를 회복하기도 힘들었다. 의사는 계속 그에게 휴식을 권했으나, 그는 문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나 잠이 들지도 않았다. 7월 7일밤에, 김일성이 탄 전용열차는 희천에 도착했다. 그는 열차에서 내려 자동차를 타고 묘향산별장으로 갔다. 그는 너무 피곤했고,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쉬려고 하지 않고,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최비서를 불러 오늘의 현황을 보고받았다.

 

첫번째 소식은 76세의 조명선 상장이 병으로 사망한 건이었다. 김일성은 큰 충격을 받은 듯이 보였다. 조명선은 14살때부터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유격전을 펼쳤었다. 수십년동안 고난을 함께한 사람이었고, 손발과 같았다. 직전 1달동안 이미 3명의 상장이 세상을 떠났는데 조명선이 바로 세번째였다.

 

김일성은 감정을 억누르며 조명선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물었다. 어떤 사람이 조명선이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다시 어떤 치료방법을 썼는지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보수적인 치료법을 썼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대노했다. "왜 두부 수술을 해서 목숨을 구하지 않았느냐? 의사들은 바로 책임질까봐 두려워 한 거야. 봉화의원에 입원했었지. 원장을 나에게 데려와. 직접 내 앞에서 분명하게 설명해보라고 해." 그는 말할수록 더 화가 났고, 온 몸을 떨었다.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급히 진정할 것을 권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화를 냈다. 그러다가, 돌연 그는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은 바로 우왕좌왕하였고, 의사가 달려왔다. 진단후에 심장병급성발작으로 진단되었다. 김일성은 이전에 한번도 심장병을 앓은 적이 없으므로 별장에 심장병 약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상의한 후, 김일성을 평양의 봉화의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헬리콥터가 명을 받고 바로 날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에 비가 내렸고 산지에 시야가 좋지 않아 급히 날아오던 헬리콥터는 산에서 추락하여 중턱에 부딪치고 말았다. 두번째 헬리콥터가 다시 떴고, 힘들게 노력해서 겨우 별장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에 내릴 수 있었다. 일행은 우산을 받쳐들고, 김일성을 들것에 실어 헬리콥터에 올라탔고, 급히 평양의 봉화의원으로 후송했다.

 

봉화의원은 북한 최고급의 병원이었다. 그러나 그를 살릴 수는 없었다.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의 심장은 영원히 멈추었고, 향년 8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