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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명청황실의 조선출신 비빈(妃嬪)

by 중은우시 2006. 10. 17.

원나라 말에 원순제의 황후인 기씨(奇氏)가 고려여인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고 난 이후에도 조선에서 몇몇의 여인들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실에 비빈으로 보내어졌다.

 

명나라때는 영락제때 8명의 비빈, 22명의 시녀, 여관이 조선여인이었다. 선덕제때도 8명의 비빈과 16명의 시녀, 여관이 조선여인이었다. 청나라는 북경으로 내려오기 전에 10명이 있었고, 순치제때 16명이 있었다. 이외에 가무예인, 요리사는 선덕제때만도 100여명의 조선여인이 있었다. 이러한 여인들은 조선의 문화풍속을 중국황실에 옮겨왔다. 언어, 음식, 복식, 가무예술등.

 

영락제가 조선비빈을 취한 것은 그의 부친인 명태조 주원장이 고려국왕과 조선국왕 태조 이성계와 친척관계를 맺으려는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홍무22년(1389년) 4월, 홍무제는 고려국왕에게 명을 내려 출신이 좋은 여자를 골라 황실자제들과 결혼하도록 시켰다. "나는 여기에 사내아이가 몇 있으니, 너희 고려에 뿌리가 좋은 여자아이가 있으면 서로 맺어지도록 하자" 홍무25년에 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이 바뀐 후에 홍무31년에 명태조 주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양측은 여러 차례 협의를 거친 후, 조선에서 5명의 태감을 남경으로 보내었으며, 명태조 주원장은 "내가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 것은 나의 자손에 아들은 많은데, 딸이 적다 너의 그쪽에 8살부터 16살까지면 괜찮다". 영락원년(1403년)에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친히 남경으로 와서 영락제 주체를 친견하고 양국간의 우의를 다진다. 영락제때 세번에 걸쳐 조선에서 비를 선발하는데, 영락제는 조선여자를 좋아했을 뿐아니라 조선의 음식습관과 문화습속까지도 받아들였다.

 

첫번째는 영락제 즉위초기이다. 홍무제때부터 계속되던 "결혼"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영락원년 4월, 주체는 사신을 조선의 수도 한양에 보내어, 건문제의 사람중에 조선으로 도망친 자들을 찾는 동시에 혼인의 뜻도 전달한다. 영락5년에 서황후가 병으로 죽었다. 영락6년(1408년) 4월 16일, 영락제는 내사 왕엄등을 한양에 파견하여 조선에서 선비(選妃)업무를 시작한다. 11월이 되어서야 끝이 나는데 5명의 여자를 선발한다. 그들은 공조전랑 권집중의 딸, 인녕부 좌사윤 임첨년의 딸, 공안부 판관 이문명의 딸, 호군 여귀진의 딸, 중국 부사정 최득비의 딸이었다. 여기에 수행인원 12명, 태감 12명이 따른다. 국왕은 예문관대제학 이문화를 특사로 하여 그녀들을 호송한다.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하여 특히 순백의 두꺼운 종이 6000장을 보내며, 대외적으로는 종이를 바치는 예를 행한다고 한다. 이 다섯명의 여자는 영락제7년 초에 북경에 도착한다. 2월에 권씨는 "현비"로 책봉되어 육궁의 사무를 관장하고, 황후의 역할을 담당한다. 임씨는 "순비"로 책봉되고, 이씨는 "소의"로, 여씨는 "첩여"로, 최씨는 "미인"으로 책봉된다. 권비의 오빠인 권영균은 조정의 광록사경에 임명되어 관직이 삼품에 이르고, 채단 60필, 채견 300필, 금 10필, 황금 2정, 백은 10정, 말 5필, 안정 2개, 의복 2습, 초3천장을 준다. 이것은 비를 책봉하는 납채예물에 해당하였다. 임비의 부친은 홍로사경에 임명하였고, 이소의의 부친, 여첩의의 부친은 광록사소경에 임명하였으니 모두 4품이다. 최미인의 부친은 홍로사 소경에 임명하였으니 관직이 5품이다. 권비는 <<명사. 후비전>>에서 유일하게 기재한 조선여인이다. "공헌현비 권씨, 조선인...옥피리를 잘 불었으며, 황제가 그녀를 아꼈다" 그러나 다음해 10월, 주체를 따라 남경에서 북경으로 가던 길에 사망한다. <<조선실록>>에서는 영락제가 현비의 오빠를 보고는 "말씀을 내리실 때, 눈물을 머금고 탄식하였으며,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적고 있다. 영락제는 조선의 민족음식과 문화습속을 좋아하였는데, 만년에도 권비를 그리워하였다. "짐이 늙었구나 음식이 맛이 없다" "권비가 살았을 때는 바치는 음식들이 아주 입에 맞았는데, 죽은 후에 음식, 술, 옷빨래 등이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두번째는 영락제 7년(1409년)이다. 5월 3일, 태감 황엄이 한양에 사신으로 가서 구두로 성지를 전한다. 작년에 여기서 데려간 여자들이 모두 뚱뚱한 여자는 뚱뚱하고, 키작은 여자는 키가 작고 뻣뻣한 여자는 뻣뻣해서 모두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단지 국왕의 공경하는 마음을 생각해서 비에 봉할 자는 비에 봉하고, 미인에 봉할자는 미인에 봉하고, 소용에 봉할자는 소용에 봉하는등 모두 책봉하였다" 말은 이렇게 하였찌만, 다시 두 명을 보내라는 말이었다. 8월에 조선에서는 사람을 뽑았다. 그러나 명나라가 몽고족의 달단부가 북경으로 진공하는 것을 막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영락제는 핑계를 대서 연기해달라고 하였다. 영락제 9년(1411년) 4월 2일, 조선측의 정씨녀가 북경으로 보내졌다. 영락제는 보고서 매우 총애하였고, 일행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비록 이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영락제의 자손들은 <<태종실록>>에 한마디를 남겼다: 9년정월, "정윤후(정씨녀의 부친)를 광록사소경에 임명하였다. 윤후는 조선 사람이고, 사돈관계이다. 그에게 특별히 직위를 내렸지만 그 일을 하지는 않았다" 황제의 장인은 일반적으로 상응하는 작위를 받게 된다. 영락제가 몇명의 조선 장인들에게 모두 광록사의 직함을 내린 것을 봐서는 그가 조선음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제3차는 영락15년(1417년)이다. 조선측에서 한씨, 황씨 두 여자를 뽑아서 수행시녀 6명, 내시 2명과 함께 보냈다. 8월초에 떠나서 10월초에 북경에 도착했다. 영락제는 조선여자를 너무 좋아했고, 한씨부형에게 많은 재물을 내렸고, 요동까지 호송했다. 이어서 11월 3일, 조선국왕에게 치하하는 칙서를 보냈고, 백금2000냥, 문기표리 200필, 사라.융금 50필, 말 24필을 보냈으며 조선왕비에게도 문기표리 80필을 보냈다.

 

명나라 선덕제는 명나라 초기의 비교적 평화로울 때의 태평천자였다. 그는 중국역사상 예술적인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황제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북경에서건 북쪽 사막을 토벌하러 갈 때건 모두 할아버지인 영락제를 따라다녔다. 그의 황위계승자로서의 지위도 바로 할아버지에 의해서 확정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도 조선의 음식을 좋아했고, 조선의 가무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재위10년동안 노래하는 여자와 음식하는 여자 100여명을 데려왔고,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8명의 조선비빈을 취하였다.

 

선덕제 주첨기는 조선에서 비를 뽑아온 것은 단 한번이었다. 즉 즉위후 다음해인 1426년 3,4월이었다. 내관 창성, 윤봉, 백언을 사신으로 보내어서 비빈과 요리사를 뽑아오게 하였다. 당시에 그는 28살이었다. 뽑은 여자들은 모두 7명이었다. 성씨녀, 차씨녀, 정씨녀, 노씨녀, 안씨녀, 오씨녀, 최씨녀. 영락제때 입궁했던 한씨의 여동생의 용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명나라 사신은 다시 그녀를 데려오게 하여 모두 8명이 되었다. 이 8명의 여자와 요리사 10명, 여관 16명, 태감 10명이 3년 7월 20일에 한양을 떠나서, 11월 26일에 북경에 도착했다.

 

선덕제때 입궁한 한비는 역사에서는 "소한(小韓)"이라고 부른다. 영락10년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이 계란(桂蘭)이었다. 명나라 궁전에서 선덕, 정통, 경태, 성화의 네 황제를 거쳤따. 영종의 아들인 성화제 주견심을 길렀으므로, 성화제가 감사해하고 존경하였다. 성화제의 비빈들도 그녀를 존경하여 "여사(女師)"로 불렀고, 그녀를 "로로(老老)"라고 불렀다. 노년의 한태비는 태후와 관계가 밀접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데려온 환관인 정선(鄭善)등을 여러차례 파견하여 고향의 옷, 놀이개, 음식등을 가져오게 하였다. 성화19년(1482년) 5월 18일 한태비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덕제 이후의 136년동안 명나라에서는 더 이상 조선의 비빈을 뽑지 않았다. 명나라무종 주후조는 황음한 황제였다. 그는 조선여자를 뽑기 위하여 태감 김의, 진호를 보내어서 비빈을 뽑게 하려고 보냈는데, 사신들이 요동에 도착할 때쯤 표방에서 사망했다. 그리하여 사신들은 조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되돌아 가게 된다.

 

조선과 명은 당시 함께 후금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숭덕2년(1636년)에 청나라는 조선을 치게 되고, 순치7년(1650년), 실제로 권력을 장악했던 도르곤의 정실부인이 사망한다. 그리하여 도르곤은 조선국왕에게 혼인을 제안한다. 당시 조선국왕 효종의 딸은 두살에 불과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선은 청과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민하던 중에 종실의 금림군 이개윤이 자신의 딸을 내놓고, 국왕은 그녀를 "의순공주"로 봉한 후에 4월 12일 한양에서 북경으로 출발시킨다. <<청세조실록>>에 의하면 5월 21일 "섭정왕이 왕, 대신을 이끌고 조선국에서 보내온 부인을 연산에서 맞이하였고 그날 성혼하였다"고 적고 있다. 연산은 지금의 요녕성 요양일대이다. 북경에서 천리나 먼 곳인데, 도르곤이 기다리지 못하고 급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죽은 후, 순치제와 강희제는 그의 추행을 기록하였다. 순치13년(1656년)에 순치제는 태자태보 의정왕대신 하스툰으로 하여금 의순공주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해주고, 조선정부로 하여금 생활비를 제공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