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이 얘기해주는 "국왕의 초상화를 그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대에 한 국왕이 있었는데,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3명의 화가를 불러서,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이 국왕은 용모가 추악했고, 눈 하나가 먼 애꾸였으며, 다리 하나를 저는 절름발이였다. 첫번째 화가는 국왕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국왕을 키도 크고 몸도 건장하고, 두 눈이 모두 번쩍거리른 모습으로 그렸다. 국왕은 그것을 보고 화를 냈고 그 화가를 참수한다. 두번째 화가는 국왕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사실대로 그의 용모를 그려냈다. 국왕이 보고는 역시 화를 냈다. 그리고 그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세번째 화가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 한동안 생각을 한 후, 금방 <국왕수렵도>를 그린다. 국왕이 이를 보고는 연신 좋다고 칭찬하고 그 화가에게 상을 내린다. 원래, 그림에서, 국왕은 한 다리를 꿇고 다른 한 다리는 접고 있었다; 한 눈을 감고 다른 한 눈은 번쩍거렸다. 하얀 눈으로 국왕의 검은 얼굴이 돋보이게 하여 장엄하고 위풍당당했다.
선생님이 이 이야기를 해준 이유는 학생들에게 "횡간성령측성봉(橫看成嶺側成峰)"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작문을 하고 주제를 고르는데 다양한 각도에서 신경쓰라고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이 이야기가 필자에게 준 깊은 인상은 독제체제하에서 일국지존의 용모는 화가의 붓끝에서 양장피단(揚長避短)하여 아마도 과장되거나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진실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강희제를 좋아하기 때문에, 필자는 그가 지략으로 권신을 제거하고, 삼번을 평정하고, 대만을 수복하고, 제정러시아를 막아낸 등의 큰 공에 대하여 찬탄을 금치 못하는 외에, 이 대명이 자자한 제왕의 용모에 대하여도 연구를 해보았다.
강희제의 용모는 어떠했는가? <청성조실록>에서는 그에 대하여 "천표기위(天表奇偉), 신채환발(神采煥發), 상동일현(雙瞳日懸), 융준악립(隆準岳立), 이대성홍(耳大聲洪), 순제천종(徇齊天縱)". <청사고>는 그에 대하여 "천표영준(天表英俊), 악립성홍(岳立聲洪)"이라고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청나라조정이 기를 사관들과 만청유로의 붓끝에서는 강희제는 키도 크고, 용모도 당당한 잘생긴 사람이었다. 다만 이런 고인의 명군에 대한 전형적인 완벽한 이미지는 진실과 거리가 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강희황제의 용모, 신체에 대한 묘사는 외국인이 기술한 내용을 참고해야 한다고. 중국에 왔던 일부 외국사신과 선교사들은 강희제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허위과장할 필요도 없다. 잘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들이 친히 관찰한 것은 객관적이다. 신뢰도가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선후순서에 따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강희6년(1667년) 여름, 네덜란드의 사절단이 북경으로 온다. 그들 중 강희제를 본 사람이 있는데,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다: ".....일행은 4개의 문을 지난 후, 내궁으로 들어갔다. 먼저 아오바이(鰲拜) 나중에는 어비롱(遏必隆)의 검사를 받았다. 그 후, 강희제의 접견을 기다린다. 강희제는 말을 타고 걸어왔다. 그는 중등(中等)의 키에, 피부가 하얬다. 약 16살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입은 것은 앞뒤 어깨에 모두 글자를 써서 수놓은 남색비단 괘(褂)였다. 발에는 노란색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는 아주 자세하게 예물중의 말을 쳐다보았고, 두 눈은 거의 말들의 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수시로 웃음을 지으며 아오바이와 말에 대하여 얘기했다." 강희제는 1654년생이므로 네덜란드 사신이 그를 보았을 때는 나이 겨우 14살이다. 일기에서 묘사한 "약16세"와는 차이가 있다. 이를 보면 강희제는 조숙하고 발육이 비교적 빨랐음을 알 수 있다.
강희8년(1669년), 조선의 동지사 민정중(閔鼎重)이 막 권신 아오바이를 제거한 건륭제를 보게 된다. 그는 <견물별록>에서 이렇게 썼다. "청나라 군주의 키는 중간사람을 넘지 않았다. 두 눈은 부풀어 올라 있었고, 눈은 깊었다. 몸은 가늘고 생기가 없었다. 광대뼈는 약간 나와 있었고, 뺨은 여위고 턱은 뾰족했다."
강희21년(1682년), 조선이 청나라에 진공을 하도록 파견한 사신이 북경으로 와서 29세된 강희제를 본다. 그들 일행은 귀국한 후, 조선국왕이 강희제의 용모를 묻자, 사신단의 우두머리인 창성군(昌成君) 이필(李佖)은 국왕에게 이렇게 답한다: "황제의 용모는 아주 크고 멋있었습니다. 입은 것은 흑호구(黑狐裘)입니다."
강희제때, 청왕조는 세계대국이었다. 네덜란드, 조선등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강희제를 참배하는데는 예의규범의 제한이 있었다. 근거리에서 강희제를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술한 것은 대략의 윤곽이다. 개략적이고 모호한 인상이고, 구체적으로 깊이있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강희30년(1691년)을 전후하여, 프랑스에서 온 몇몇 선교사가 청나라조정에 들어간다. 그들은 황제를 위하여 병을 치료하는 약을 만들기도 하고, 황제에게 수학, 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강희제와는 근거리에서 접촉한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이명(李明)은 <중국현상>에서 중국황제 강희제의 풍도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황제의 키는 보통사람보다 약간 크다. 자태는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나보다는 약간 살이 찐 편이다. 다만 중국인들이 말하는 '부태(富態)'까지는 아니다. 얼굴은 약간 넓다, 마마자국이 있다. 앞이마는 넓고 크다. 코와 눈은 중국의 보통사람보다 약간 작다. 입은 예쁘고, 턱은 부드럽다. 동작은 온유하고, 모든 행동거지는 군주와 같다. 한번 봐도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그외에 선교사 백진(白晋)은 청나라조정에 있다가 귀국한 후, 국왕 루이14세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강희제의 용모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는 일신에 그가 점거한 왕위에 어울리지 않는 점은 전혀 없다. 그는 위무웅장(威武雄壯)하다. 몸은 보통사람보다 약간 크고, 오관은 단정하다. 두 눈은 그의 본민족의 일반인보다 크고 생기있다. 코는 뾰족하며 약간 둥글며 약간 메부리코의 형상을 하고 있다. 비록 얼굴에 천연두가 남긴 흔적이 있지만, 그의 영준한 겉모습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남회인(南懷仁)이 묘사한 건륭제의 외모는 이렇다: "나이는 오십세에 가까우며, 몸매는 괴위(魁偉)하다. 검은 큰 눈동자에 코는 약간 높다. 검은 색의 수염은 아주 짙다. 구렛나룻은 거의 없다. 얼굴에 약간의 마마흔적이 있으며 보통의 키이다."
18세기초, 네덜란드의 한 사절이 그의 일기 <달단여행기>에서 이렇게 썼다. "황제는 중등의 키에 자상하고 온건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한 인물이다. 그는 위엄있는 겉모습에 어느 방면에서 보더라도 천명 속에 넣어두었을 때 다른 사람과 다른 모습이다. 금방 구별해 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행동과 거지를 사람들이 한번 봤을 때 바로 고상한 인물이라고 보이도록 만든다.....오늘날 중국에 군림하는 달단족 군왕은 나이 오십에 가깝고, 몸매는 괴위(魁偉)하다. 검은 큰 눈동자에 코는 약간 높다. 검은 색의 수염은 아주 짙다. 구렛나룻은 거의 없다. 얼굴에 약간의 마마흔적이 있으며 보통의 키이다."
강희51년(1712년), 강희황제의 59세때, 조선사신 김창업(金昌業)이 중국으로 온다. <노가재연행일기>를 남겼는데, 당시 그는 강희제와 겨우 7,.8보 떨어진 거리에서 본다. 강희제는 "이마는 넓고, 턱은 약간 날카로우며, 성근 수염이 뺨에 나 있으며, 반백이었다. 자웅안(雌雄眼)에 신기청명(神氣淸明)했다. 그의 옷과 모자는 모두 검은색이어서 여러 오랑캐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신장은 "7,8척일 것이다." 또 다른 조선부사 최덕중(崔德中)이 쓴 <연행록일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황제가 쓴 모자와 입은 옷은 여러 오랑캐와 다를 바 없었다. 예의는 너무 간략했다. 인물은 명랑하고, 수염은 아름답고, 반백이었다. 자웅목(雌雄目)에 좋은 몸을 가졌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외국인들이 보기에, 성년이 된 후의 강희제는 중간정도의 키에, 넓은 이마를 지니고, 흰 피부, 높은 코, 약간 살이 쪘으며, 눈 하나가 약간 작고, 얼굴에 마마흔적이 있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약간 말라 보였다. 이들 기술은 비록 "천표기위(天表奇偉), 신채환발(神采煥發), 상동일현(雙瞳日懸), 융준악립(隆準岳立), 이대성홍(耳大聲洪), 순제천종(徇齊天縱)"라는 중국사료와는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강희제의 용모는 그래도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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