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영(呂潁)
얼마전 타이페이의 고궁박물원에서는 "강희대제와 태양왕 루이14세 중국-프랑스예술문화의 교류"라는 특별전시회에서 누렇게 된 루이14세의 강희제에게 보내는 서신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루이14세는 왜 강희제에게 이 서신을 적었을까? 서신의 내용은 무엇인가? 강희제는 왜 이 서신을 받아보지 못했을까? 이들 의혹을 풀기 위하여는 우리가 300년전으로 되돌아가보아야 한다.
17세기, 프랑스는 세력확장, 과학발전 및 천주교 포교를 위하여, 수학에 조예가 깊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재무대신의 사망으로 이 계획은 한 때 중단된다. 1684년이 되어 한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의 오래된 숙원은 실현된다. 당시, 마침 섬라(暹羅, 태국)의 사절단이 프랑스에 도착하는데, 납래왕納萊王)이 프랑스와 결맹을 맺고, 통상항구를 개방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온다. 루이14세는 이 기회를 빌어 '비조호(飛鳥號)'라는 이름의 배를 동방으로 보내어 섬라와 중국을 방문하고자 한다.
1685년 3월 3일, 쇼몽(Chaumont)의 기사를 대사로 삼은 섬라사절단과 홍약한(洪若翰, Jean de Fontaney, 1643-1710) 신부를 단장으로 하는 중국선교단이 브레스트항구를 떠난다. 중국선교단에는 홍약한, 장성(張誠), 백진(白晋, Joachim Bouvet), 이명(李明), 유응(劉應)과 탑사이(塔査爾)라는 6명의 예수회 선교사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뛰어난 학문을 지니고 재능이 풍부했다. 그리고 출발전에 루이14세로부터 황실수학자라는 칭호를 받는다. '비조호'는 1685년 9월 22일 섬라에 도착한다. 선교단은 그후 중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해상폭풍 및 계절풍때문에, 계속 전진하려던 계획이 흐트러진다. 1687년 6월, 탑사이를 제외한 5명의 신부가 한 상선을 타고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중국으로 간다. 1687년 7월 23일, 선교단은 영파에 도착하나, 절강순무등의 힐난을 받는다. 나중에, 남회인(南懷仁)과 은탁택(殷鐸澤)등 두 신부의 알선하에, 강희제가 최종적으로 명령을 내린다: "홍약한등 5인은 그 안에 입법에 능한 자가 있는지 결정되지 않았다. 모두 북경으로 보내어 쓸 수 있도록 하라; 쓰지 않는 자는 그 뜻에 따라 마음대로 거주하게 하라." 1688년 2월 7일, 선교단은 마침내 북경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중국역사문화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한다.
홍약한등 신부가 영파에 머무르는 기간동안 남회인은 5명의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1687년 10월에 다시 한번 루이14세의 참회신부 랍설자(拉雪玆)에게 서신을 보내어, 더 많은 동료들을 중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향후 선교사들은 육로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남회인의 이 건의는 주로 두 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 해로는 육로와 비교하여 거리가 더욱 멀고, 위험성이 더욱 컸다. 백응리(柏應理)의 추산에 따르면, 이전에 해로를 통하여 중국으로 간 유럽선교사는 모우 600여명인데, 그중 중국에 도착한 자는 겨우 10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절대다수의 신부들은 질병이나 선박사고등의 원인으로 바다에서 죽었다. 둘째는 선교사들은 오는 도중에 새로운 선교지역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많은 동방민족이 천주교에 귀의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이 건의는 루이14세의 지지를 받는다. 그는 유럽에서 유명한 서리백작(西里伯爵)으로 하여금 중국으로 통하는 육로를 개척하는 책임을 맡긴다. 그리고, 그에게 4명의 선교사와 일부 시종을 붙여준다. 1688년 8월 7일, 루이14세는 각각 페르시아왕, 러시아 짜르, 중국황제를 수신인으로 하는 3통의 서신을 적는다. 이를 바르샤바의 서리백작에게 보낸다. 그중 1통이 바로 첫머리에 말한 특별전시회에서 볼 수 있던 서신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걸출하고, 탁월하며, 만능이고 또한 숭고한 폐하, 짐의 가장 친밀한 친구:
하나밈은 당신의 영광을 더욱 높이고, 당신이 행복한 귀의를 바랍니다. 폐하께서 곁에 그리고 귀국에서 많은 유럽과학을 잘 아는 학자들을 두기 희망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짐은 몇년전에 일찌기 6명의 황실수학자를 파견하여 폐하에게 파리성내의 저명한 황실과학원의 가장 신기한 과학지식과 최신의 천문관측성과를 가져가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나라는 머나먼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있어 여러가지 불측의 일들이 생겨, 많은 시간을 들이고 그리고 여러가지 위험을 겪어야 비로소 여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 짐은 이번에 폐하에게 다시 황실수학자인 예수회 선교사를 한 무리 보내고자 합니다. 서리백작을 따라 더욱 짧고, 더욱 안전한 육로로 가게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상호존중과 우의를 증명하기 위하여 하루빨리 폐하의 곁에 도착하여, 서리백작이 귀국한 후, 사람들이 찬탄할만한 폐하의 행위에 대한 기술을 통하여 짐이 모든 비범한 사건을 충실히 견식할 수 있게 하고자 합니다.
이에, 짐은 하나님이 폐하의 영광을 증가시키고, 페하의 아주 행복한 귀의를 바랍니다.
1688년 8월 7일"
루이14세가 페르시아국왕과 러시아짜르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도 대체로 비슷했다. 상대방을 찬미하는 외에, 주로 중국에 황실수학자를 파견하는 것은 과학기술전파, 과학지식보급을 위한 것이며 세계 각민족에 봉사하고, 상대방이 이에 동의하고, 이와 관련해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편의를 제공해달라는 내용이다.
서리백작은 프랑스국왕의 서신을 받은 후, 1688년 9월초에 바르샤바에서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번에 명을 받은 4명의 선교사들이 원래 생각한 최선의 루트는 모스크바를 통하여 시베리아로 가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저해할 것을 우려하여, 인력을 둘로 나눈다. 아부서이(阿夫瑞爾)와 박현사(薄賢士)의 두 신부는 위의 노선으로 가고, 또 다른 두 명의 신부는 터키, 페르시아를 거쳐 다시르만공국의 수도 사마키에 도착한다. 만일 러시아에서 편의를 제공한다면 사마키로 가는 신부는 모스크바로 가서 동료들과 회합한다. 만일 러시아가 거절하면, 모스크바의 신부는 서리백작과 사마키로 향한다. 전체 사절단은 회합후에 페르시아북부와 중앙아시아지구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불행한 일은, 러시아가 여러가지 핑계를 들어, 선교사들이 가는 길을 방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외로 러시아는 그들을 고의로 갈라놓는다. 서리백작에게 페르시아방향으로 러시아를 떠나게 명령한다. 그리고 또 다른 두 신부를 갈리시아와 몰다비아 방향으로 떠나게 한다. 아부서이는 프랑스로 돌아가고, 박현사는 여러 곤란을 겪었지만, 새로운 루트를 찾는 임무를 완성하지 못한다. 나중에 해로로 겨우 중국에 도착한다. 서리백작은 루이14세가 강희제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1689년 여름 예전에 정했던 사카키에서 두번째 노선을 택한 신부들고 ㅏ회합한 후 함께 이스파한으로 떠난다. 그들은 원래 1690년 여름에 우스베키스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서비랙작은 그의 시종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의외의 사건은 그들의 선교사동료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다. 그리하여 계속 중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춘다. 강희제에게 보내는 이 서신은 이로 인하여 중국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그냥 프랑스로 가지고 돌아온다. 나중에 여러 경로를 거쳐 현재 프랑스 외교부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루이14세가 중국에 파견한 두번재 선교단은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중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서리백작사절단의 실패는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에서의 사업중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698년 프랑스 상선 "안피트리트호"가 처음으로 중국에 간 후, 중국으로 가는 선교사는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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