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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의 마지막 하루

by 중은우시 2010. 12. 25.

글: 진령신(陳令申)

 

 

 

 

강희61년(1722년) 십일월 십삼일저녁, 일대명군 강희황제가 마침내 기나긴 인생을 끝마치고, 북경 창춘원(暢春園)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서의 기록을 살펴서, 강희제의 마지막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청성조실록>>에 따르면 강희61년(1722년) 십월 이십일일, 강희제 일행은 남원(南園)으로 사냥을 갔다. 몸이 좋지 않아서, 강희제는 십일월초칠일 창춘원으로 되돌아왔다. <<영헌록>>의 기재에 따르면, 강희제는 십일월 초칠일 남원에서 창춘원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병이 난다. 강희제는 성지를 내려서, "감기에 걸렸다. 오늘은 땀이 났다. 초십일부터 초십오일까지 정양하고 재계하니, 일체의 주장(奏章)은 올릴 필요가 없다."

 

이를 보면, 강희제는 십일월 초칠일에 창춘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초칠일부터 초십삼일까지는 1주일도 되지 않는데, 강희제가 돌연 붕어한다. 사람들은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강희제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렸는가? 그리고 어떻게 병이 들게 되었는가?

 

먼저 발병한 시간을 보면, 강희제는 사냥도중에 병을 얻은 것이다. 당시 북방이 십월말로 이미 초겨울이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마침 계절이 바뀌는 시기여서 감기에 걸리기 쉬운 때였다. 아마도, 강희제는 당시에 바람 속을 걷다가 추위를 만나고, 사냥과정에서 이미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남원에서 황급히 창춘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강희가 스스로 말한 '감기에 걸렸다'는 말과 들어맞는다.

 

창춘원으로 돌아온 후, 강희제의 병은 가중되었다. 그가 성지에서 말한 "오늘은 땀이 났다"는 것은 그가 당시에 감기가 이미 심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머리가 아프고 열이나고 땀이 나는 증상인 것이다. 강희제는 말년에 몸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진실한 병세는 아마도 그가 묘사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잘못하면 다른 합병증이 나타날 수 있다. 단지 강희 자신이 알지 못했거나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외에 '오늘은 땀이 났다'는 말투로 봐서는 강희제 자신은 병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같다. 그러나, 강희제는 이번의 병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던 것같다. 그래서 '초십이루터 초십오일까지 정양하고 재계하니, 일체의 주장은 올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 문구를 보면, 당시 강희제의 몸은 이미 허약했고, 그래서 그는 며칠간 쉬기로 결정하고, 상소문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후, 며칠동안, 강희제는 비록 상소문은 보지 않았지만, 어떤 일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처리하게 했다. 예를 들어, 초구일에 강희제는 자신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황사자 윤진으로 하여금 남교의 천단으로 가서 동지의 제천대례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제사일은 십일월 십오일이다. 강희제는 제천대례를 아주 중시했따. 이번은 자신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자, 윤진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한 것이다. 윤진으로 하여금 대신 가도록 한 것은 아마도 윤진이 이 분야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강희제가 윤진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는 윤진이 그를 대신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강희제는 윤진에게 따로 당부해서 먼저 재소(齋所)에 가서 재계하도록 한다. 이는 하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아마도 윤진은 당시에 부친이 이미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소에 간 후에, 초십일부터 초십이일까지, 매일 태감과 호위를 창춘원에 보내어 문안한다. 아마도 강희제에게 중간에 의외의 일이 벌어질까 걱정한 것일 것이다. 다만, 강희제는 매번 문안올 때마다 '짐의 몸은 약간 나았다"는 말만 전한다.

 

강희제의 성격으로 보아, 이 말의 뜻은 액면 그대로는 아닐지 모른다. 일을 하면서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므로, 상황이 위급하지 않다면 절대로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짐의 몸은 약간 나았다'늠 말은 강희제의 병세가 좋아지지는 않았고, 그저 악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과연, 십삼일 새벽이 되자, 강희제의 병세가 급전직하한다. 그는 자신이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 십삼일 축각(丑刻)에 사람을 시켜 당시 재소에 있던 윤진을 창춘원으로 부른다(사전에 윤진을 오라고 한 것을 보면 한가지는 아마도 윤진이 성밖에 있으므로 오는 길이 멀 것이어서일 것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아마도 윤진을 후계자로 하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윤진이 도착하기 전에 강희는 인각(寅刻)에 경성안에 있는 황자들을 모조리 부른다. 여기는 황삼자 윤지, 황칠자 윤우, 황팔자 윤사, 황구자 윤당, 황십자 윤아, 황십이자 윤도, 황십삼자 윤상, 황십오자 윤우, 황십육자 윤록, 황십칠자 윤례등이 포함된다.(황오자 윤기는 제외되었는데, 당시 그는 명응ㄹ 받아 동릉에 제사지내러 떠나서 경성에 있지 않았다)

 

이들 황자들이 모두 도착한 후, 윤진은 아마도 사각(巳刻)에 창춘원에 도착했고, 도착한 후 급히 침궁으로 가서 문안드린다. 십삼일 낮에, 윤진은 모두 세번을 들어갔다. 강희제가 윤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날 저녁 술각(戌刻)이 되어 강희제는 붕어한다.

 

강희제가 사망한 구체적인 시각은 <<청성조실록>>, <<영헌록>> 그리고 <<황청통지강요>>에 모두 "심삼일 술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옹정제 본인이 흠정한 <<대의각미록>>에도 이렇게 진술되어 있다. 시간은 분명히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십삼일 강희제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도 사실이다. 논쟁이 가장 많은 이슈는 윤진이 십삼일 낮에 강희제의 침궁에 문안을 드리러 들어갔는데,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였느냐는 것이다. 기록이 없으므로, 나중에 많은 소문과 말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강희제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마지막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 뒤에 발생한 일은 이미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따. 강희제의 비범한 일생을 되돌아보면, 8살에 등극하고, 9살때 모친을 잃고, 조모 효장태후의 도움하에 황위를 공고히 하고, 아오바이를 물리치고, 삼번을 평정했으며, 대만을 통일했고, 막북을 확장했다. 나라와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여러가지 공적을 세웠으니,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하다.

 

강희제의 일생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근면하고, 청나라 번영의 기초를 쌓았다. 그는 수백년간 만나기 힘든 영명한 군주였다. 동시에 중국역사상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