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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의 죽음: 함한졸사(含恨猝死)

by 중은우시 2015. 3. 26.

글: 유아독존(惟我獨尊)


강희제의 죽음에 대하여 역사상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일설에는 병사했다고 하고, 일설에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필자는 강희제의 팔대손 김항원(金恒源) 선생은 강희제의 사인을 새로 논증하였다. 그는 강희제가 '함한졸사'했다고 하였다. 급사한 직접적인 원인은 극히 잔혹한 궁중권력투쟁이다.


청나라의 공식역사기록에 따르면, 강희61년(1722년) 십월 이십일일, 69세의 강희제는 신나게 남원(南苑)으로 사냥을 떠난다. 십일월 칠일, 몸이 불편하다고 느끼고, 십삼일 저녁에 사망한다. 강희제의 임종전 며칠동안 그저 "우감풍한(偶感風寒)"이 있을 뿐, 다른 위급한 병세는 없었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여하한 '위독상황'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희제가 죽기 전에 도대체 궁중에는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십일월 육일, 강희제는 남원에서 윤진, 융과다가 보고하는 통주의 양식창고점검에 관한 건을 "오랫동안 상의한 후 헤어진다"


십일월 칠일, 강희제는 '우감풍한'했다. 그러나 이후, 시종 여하한 병치료활동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십일월 구일: 강희제는 윤진에게 남교(南郊)로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한다. 윤진은 "성궁불예(聖躬不豫. 황상의 병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가지 않겠다고 하며, 여러번 강희제의 곁에 남아 있기를 간청하나 강희제는 거절한다.


십일월 십일, 윤진은 하루에 세번 시위를 강희제의 침궁에 들여보내고, 이후 매일 계속하여 여러번 시위를 들여보낸다. 


십일월 십삼일, 새벽 1시-3시, 강희제는 급히 윤진을 부른다. 윤진은 당시 남교 천단에 있었고, 창춘원에서 말을 타고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사각(巳刻, 9시-11시)에서야 급히 도착한다. 윤진은 왜 8시간-10시간동안 시종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십일월 십삼일 저녁, 강희제는 급사한다.


의심스러운 점은 십일월 십일부터, 십일월 십삼일저녁 강희제가 급사할 때까지, 윤진 1사람이 5번 드나든 것을 제외하고, 어느 대신, 황자, 후비도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다; 강희제가 급사한 후, 윤진은 부친의 옷을 갈아입혔다. 여전히 어느 대신, 황자, 후비도 현장에 없었다. 강희제가 급사한 후, 창춘원에서 자금성내로 영구를 옮길 때, 여전히 그 어느 대신, 황자, 후비도 현장에 없었다.


사실의 진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옹정 본인이다. 삼탕사건(蔘湯事件)이 도대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하여 옹정제가 온갖 방법으로 변명한 후 마침내 진실을 토로했다. <대의각미록>에서 옹정제는 이렇게 말한다. 팔아거는 그가 강희제에게 삼탕을 올린 건을 가지고, 그 악명을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 보복했다는 것이다. 옹정제는 이렇게 말한다: 팔아거는 강희제의 죽음을 자신이 강희제에게 삼탕을 올린 것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악명을 짐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를 보면, 옹정제가 부인한 것은 그가 삼탕으로 부친을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고, 자신이 강희제의 임종일에 강희제에게 삼탕을 올린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옹정제가 삼탕을 올릴 때, 팔아거는 현장에 아예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당시 강희제의 곁에 있던 사람이 말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옹정제가 황제에 오르자 강희제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일망타진하는데, 원인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강희제의 급사를 조성한 원인은 거대하고 강렬한 정신적 자극때문이다.


강희제의 죽음에 관한 여러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청사학자 왕중한(王仲翰)은 <청세종탈적고실>이라는 글에서, 이탈리아인 마국현(馬國賢)이 직접 목격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황제가 붕어하는 날 저녁, 통곡소리가 들리고, 불안한 모습은 있었지만, 독약의 일은 없었지만, 분명히 돌연한 큰 변이 일어났다."


강희제의 죽음에 관하여,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강희제의 사망과 윤진의 즉위는 "무력을 방패로 하여, 정교하게 기획하고, 교묘하게 안배한 궁정쿠데타이다." 이는 "융과다가 약품 혹은 식물에 치명적인 독약을 타서" 강희제를 해친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모해치사설'을 완전히 부정한다. 왜냐하면, 강희제는 생전에 윤진을 비교적 신임하고, 임종때 황위를 넘겨주는 것은 완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희제는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고, 감기로 인하여 나머지 증상을 불러왔을 것이므로, 그가 사망한 것은 실로 정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강희제 본인이 약을 가볍게 쓰지 않고, 경비를 삼엄하게 하여, 인삼탕으로 그를 독살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역사에 대한 연구를 더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